제53화
엄마와 아빠는 약속 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왔다.
민국이는 이모님이 봐주고 있어서, 나는 오랜만에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혼자 타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빠는 몇 년 전에 중고차를 헐값에 샀다.
승차감 같은 것은 논할 수 없는, 굴러가는 것도 다행인 국산차였다. 거기다 직물 시트에서 먼지는 폴폴 올라왔고, 스테레오는 개판이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도 소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생애 첫 차를 사고 막걸리 뿌리고 고사떡까지 돌리면서 이 차를 애지중지했다.
드디어 저 멀리 삼전 호텔의 입구가 보였다.
아빠는 나를 살짝 백미러로 쳐다봤다.
“성국아, 배고프지?”
도리도리.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재형 회장이 허투루 나를 보자고 할 리는 없었다. 불안한 건 아무래도 제이슨 리와의 대화였다.
오늘 내가 아빠와 엄마까지 데리고 삼전 호텔에 온 건 단 하나의 이유였다.
바로 아빠에게 삼전 호텔의 맛난 짜장면을 먹여주고 싶어서였다.
엄마와 김미영과는 그동안 일 때문에 자주 왔지만, 아빠는 내 생일 파티 때 딱 한 번 왔었다.
“성국아, 아빠는 무지 배고픈데. 소영아, 거기 가서 짜장면만 먹어도 엄청 비싸지?”
“자기야, 걱정 마. 회장님이 나오시는데, 설마 우리보고 밥값 내라고 할까 봐.”
“부담되잖아. 맨날 얻어먹는 거.”
[아빠, 아빠는 전재형 회장이 삼전 그룹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종종 까먹는 것 같아. 평생 얻어먹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그 돈 다 못 쓰고 죽어.]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어야 할 호텔은 IMF 때문에 평소와 달리 장식도 최소한으로 다루었다.
“소영아, 주차장이 어디지?”
“글쎄, 나도 맨날 미영 언니 차만 타고 와서….”
나는 얼른 아빠에게 주차장 위치를 알려줬다.
“아빠, 저기!”
“성국이가 진짜 기억력은 끝내줘.”
[삼전 호텔은 눈 감고도 찾아다닐 수 있어, 아빠.]
아빠는 핸들을 꺾어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가 멈추고 나는 깡충 주차장에 뛰어 내려갔다.
삼전 호텔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단 게 어쨌든 행복했다.
“성국아, 엄마 손 잡아.”
“엄마, 나도 이제 여덟 살.”
“주차장에서 뛰면 안 돼.”
[하아, 어쩔 수 없지. 세상은 나를 어린애로 보니까.]
나는 다소곳이 엄마 손을 잡았다.
아빠가 다가오더니 나머지 내 한 손을 잡았다.
“성국아, 아빠도 손.”
“자, 잡도록 해줄게.”
“이 녀석이…. 정말 이제 성국이 못 당하겠어.”
아빠는 내 손을 잡으면서도 연신 웃었다.
행복이란 참 별게 없는 거였다. 사이좋은 부모와 나처럼 똑똑한 자식만 있으면 이렇게 행복하다니…. 저번 생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남자였지만, 불행할 때가 많았다.
“안녕하세요.”
나는 호텔 문을 지키고 선 직원들에게도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들어갔다.
모두들 나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아줬다.
“와, 성국이 맞죠?”
“네.”
엄마는 부끄러운 듯 대답했다.
“성국이가 이렇게 큰 거예요? 성국아, 몇 살이야?”
“여덟 살 돼요.”
“해피 뉴 이어!”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배꼽 인사를 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는 기특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이는 진짜 어디 가든 사랑받을 거야.”
[당연하지.]
없이 살아도 인사 잘하고 잘 웃으면, 사람들은 친절했다. 이번 생에서 터득한 삶의 기술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누군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 몇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지? 전재형 회장도 이렇게 경호 빡세게 안 하는데….]
이때, 덩치 좋은 경호원들 사이로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걸어갔다.
[얼굴이 눈에 익은데…. 아, 맞다!]
지금 걸어가는 남자는 바로 삼전 그룹의 영원한 맞수 효진 그룹의 회장인 구수영이었다.
맞수이기는 했지만, 서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가 달라서 구수영 회장은 어린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
구수영 회장이 후계자로 생각한 첫째 아들이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또래인 나를 더 애틋하게 생각했다.
아래로 딸만 둘이었는데, 딸 둘은 성격은 좋았지만 경영에 그렇게 재능이 있지 못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순간, 구수영이 멈칫 멈춰 서더니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아빠가 난감해하는 게 보였다.
구수영은 경호원들을 물리더니 나에게 걸어왔다.
[엇, 실수했나.]
“혹시 삼전 전자 모델 했던 아이 맞지요?”
구수영은 조심스레 아빠에게 물었다.
“네,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어른만 보면 인사를 해서요.”
구수영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구수영 회장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IMF 외환 위기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구수영 회장의 아들의 비보가 정재계에 전해졌던 기억이 났다.
구수영 회장은 무릎까지 꿇고 나를 쳐다봤다.
“이름이 뭐니?”
“전성국입니다! 내일이면 여덟 살이 됩니다!”
나는 최대한 어린이답게 해맑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구수영 회장의 눈가가 붉어지는 게 보였다. 아들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구수영 회장의 아들은 나도 똑똑히 기억했다.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구수영 회장을 꼭 닮아서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었다.
삼전 그룹과 달리 대대로 명문 가문이었던 효진 그룹은 미국 조기 유학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간 구수영 회장의 아들은 그곳에서도 적응을 잘했다.
나와도 친구 관계였기 때문에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안부를 묻을 때면 어서 미국으로 와서 너도 공부하라고 잔소리까지 했었다.
하버드 입학을 확인하고, 구수영 회장은 아들에게 차를 선물했다. 대학 입학 전에 미국을 횡단하고 싶다는 아들의 소원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됐다.
미국 횡단을 시작하고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시카고 근처 고속도로에서 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중앙선을 넘어오던 대형 트럭과 부딪혀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내 친구이기도 해서, 이 시기 나도 참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났다.
구수영 회장은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지갑을 꺼냈다.
나는 얼른 구수영 회장의 지갑을 밀었다.
“용돈 괜찮습니다.”
“허허.”
구수영 회장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이제 내일이면 여덟 살이 되니 초등학교 들어가는 거지?”
“네.”
구수영 회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허리를 폈다.
이때, 전재형 회장이 바로 뒤로 걸어오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구 회장님.”
“전 회장, 여기서 다 보네.”
전재형 회장은 구수영 회장과는 열 살 넘게 차이가 났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연말 모임이 조촐하게 있어서. 집에 있으면 우울하기만 해서 나와 봤네.”
“잘 오셨습니다. 제가 특별히 모시라 알려 두겠습니다.”
“됐네. 삼전 호텔이야 뭐든 다 잘하지. 자네도 모임인가?”
“아, 저는 여기 있는 성국 군 가족이랑 식사하려고요.”
“이 가족이랑?”
“네.”
구수영 회장은 의아한 얼굴로 우리 가족을 쳐다봤다.
아무리 삼전 전자의 모델이었다고 해도, 굳이 연말 식사를 기업의 오너가 같이 할 이유는 없었다.
“자네가 무척 아끼는 아이인 모양이네.”
“네, 성국 군 덕분에 저희 회사 이미지도 좋아지고 저희 아이들과 유치원도 같이 다녀서요. 연말에 적적해서 저도 식사나 같이 하려고요.”
“그래, 자네나 나나 모두 외롭구만. 연초에 모임에서 보세나.”
“들어가시지요.”
구수영 회장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전재형 회장이 아빠에게 인사를 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다. 바로 재벌 후계자쯤 되면 평범한 서민들에게 막 대할 거라는 환상.
물론 그런 망나니들도 있다. 그런 애들은 대부분 기업 후계에서 이미 밀려나서 돈만 쓰는 것들이었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 후보 정도 되면 어릴 적부터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라고 교육받는다.
아빠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저희야 영광이죠.”
“과분한 말이시네요. 저랑 같이 식당으로 올라가시죠.”
“네.”
아빠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아빠 손을 꼭 쥐었다 살짝 폈다.
“아빠, 긴장 풀어.”
“어… 성국아.”
하지만 여전히 아빠는 긴장한 채였다.
* * *
역시 삼전 호텔 짜장면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였다.
나는 정신없이 짜장면을 흡입했다.
전재형 회장이 나를 흐뭇한 얼굴로 쳐다봤다.
“성국이 아버님은 성국이 같은 똑똑한 아들 두셔서 흐뭇하실 것 같습니다.”
“성국이 자체가 저희한테는 복이에요.”
아빠는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저번 생의 아빠와 이번 생의 아빠를 번갈아봤다.
물론 이제는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지만 전재형 회장의 사랑의 포인트는 분명했다.
똑똑한 아들.
저번 생에서도 나를 인정하는 포인트는 언제나 성적이나 실적이었다. 수치로 보이지 않는 것은 인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아빠는 나 자체가 복이라고 말했다.
내가 잘나지 않았어도 사랑을 해줄 사람들.
이번 생의 아빠와 엄마였다.
뭉클.
또 감정이 출렁였다.
나는 묵묵히 짜장면을 호로록 먹었다.
[감동이 올 땐, 역시 먹는 게 최고야.]
호로록. 호로록.
그사이 전재형 회장은 좋아하는 불도장을 뜨더니 언 채로 밥을 먹는 아빠를 쳐다봤다.
“성국이가 비범하단 이야기를 주변에서 계속 듣게 되더라고요.”
“그냥 아이일 뿐입니다. 뉴스랑 이것저것 많이 보긴 해요.”
“그 정도 수준이 아닌 것 같아서요. 미국 여행 때도 느꼈지만, 뭔가 다른 감각이 있는 아이입니다. 유학도 거부하시고, 저희 후원도 더는 부담스럽다고 하셔서 제가 다 안타까워서 식사 자리 마련했습니다.”
“저희는 성국이 의견이 최우선이라서요. 말씀하신 대로 성국이가 조금 다른 면이 있긴 한 걸 저희도 알긴 하지만, 성국이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게 최우선 같아서요.”
“좋은 말씀이십니다.”
[거짓말.]
속으로 전재형 회장은 비범한 아이를 평범한 부모가 키우는 것을 욕하고 있을 게 뻔했다. 자신이라면 아마 나를 벌써 유학을 보내고, 영재교육을 시작했을 거였다.
전재형 회장은 속내를 숨기고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짜장면 맛있어?”
“네에!”
[회장님, 말 돌리지 말고 속내를 드러내시지요.]
전재형 회장은 내 대답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냅킨으로 입을 톡톡 두드렸다.
“성국아, 아저씨가 질문 좀 해도 될까?”
[지금 나 테스트하는 겁니까, 전 회장님?]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재형 회장은 내 눈을 쳐다봤다. 나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남자 대 남자로 하는 기 싸움이었다.
“성국아, 아저씨네가 자동차 회사를 가지고 있거든. 그게 참 아픈 손가락이야.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은데… 성국이 생각은 어때?”
나는 힐금 엄마, 아빠 얼굴을 살폈다. 전재형 회장의 난이도 높은 질문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만약 전재형 회장과 단둘이 있는 자리라면 내 생각을 이야기했겠지만, 지금은 엄마, 아빠와 함께였다. 전재형 회장이 바란 게 이것이다. 내가 얼마나 똑똑한 아이이고 얼마나 형편없는 교육을 하고 있는지 엄마, 아빠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성국아, 너무 어려운 질문이야?”
[전 회장님, 지금 저 간 보는 겁니까!]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는 냅킨으로 짜장 범벅인 입술을 닦았다. 그리고 전재형 회장을 똑바로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