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전재형 회장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씽긋 웃었다. 아이들의 미소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그런데 전재형 회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회장님, 전문가들의 조언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그냥 요즘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물어봤단다.”
“하지만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냥 넘어가는 건 또 내 성격과 맞지 않았다.
“삼전 자동차 재무구조가 안 좋더라고요. 특히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악화일로만 남았는데, 언제고 파실 거, 저라면 과감하게 빨리 정리하겠습니다. 이미 상한 과일은 냉장고에 둬도 부패만 늦출 뿐이잖아.”
전재형 회장의 눈빛이 매서워지는 게 느껴졌다. 전재형 회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빙긋 웃었다.
‘상한 과일은 냉장고에 둬도 부패만 늦출 뿐이라고….’
이런 비유는 처음이었다.
“이제, 밥 먹자. 내가 괜히 식사 시간에 다들 어렵게 만들었구나.”
[휴우.]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뒤로 전재형 회장과 아빠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성국이 아버님이 하시는 보쌈, 정말 맛있더라고요.”
“제가 원래 일하던 보쌈집에서 전수받은 거거든요.”
아빠는 재벌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전재형 회장은 문득 생각난 듯이 오른손 약지로 관자놀이를 슬쩍 긁었다.
[저 버릇 여전하네. 전재형 회장.]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면 하는 버릇이었다.
“이건 그냥 생각인데요. 제가 만약 아버님이라면 체인점 생각도 해봤을 것 같아요.”
“체인점이요?”
“지금도 다양한 체인이 있지만, 앞으로 소비자들은 맛이 보증되는 본사에서 관리하는 체인점들을 믿고 갈 거거든요. 아버님 보쌈 정도면 충분히 맛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고. 투자만 잘 받는다면 충분히 전국 체인도 가능할 것 같아서요.”
전재형 회장은 역시 기업가다웠다.
이때, 전재형 회장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는데?]
순간, 온몸이 굳었다.
내 오른손 약지가 관자놀이를 긁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어색하게 나는 천천히 테이블 아래로 손을 내렸다. 방심했다. 나 역시 전재형 회장처럼 생각에 빠질 때면 관자놀이 부근을 긁는 버릇이 있었다.
전재형 회장은 씁쓸한 미소를 짓더니 엄마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작은 쪽지에 적힌 메모 같은 거였다.
“저희 집안에서 매년 신년 운세를 보는 곳이에요. 성국이네 이름으로 예약해 뒀으니 편하게 가서 한번 보세요.”
[설마 삼청동?]
엄마는 얼떨떨한 얼굴로 쪽지를 받아 들었다.
“여기가 어딘가요?”
“이상한 데 아니고, 유명한 역술가분이세요. 아시다시피 저희 회사에서 요직에 사람을 뽑을 때 관상과 사주도 참고하거든요. 매번 봐주시는 분입니다. 성국이가 초등학생도 되고, 아버님과 어머니 사업도 하시니까 재미 삼아 가볍게 가서 보세요.”
“이런 건 본 적이 없어서요.”
엄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빠가 웃으며 대신 답했다.
“이런 것까지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신년 운세 재미 삼아 잘 보겠습니다.”
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전재형 회장을 쳐다봤다.
[뭔가 찜찜한데….]
* * *
삼청동.
익숙한 골목에 들어섰다.
1998년 새해의 삼청동은 고즈넉한 서울의 동네의 전형이었다.
노포 몇 곳이 보였다.
[저기가 그 유명한 수제비집인가…. 밀가루 따위가 뭐 대단하다고. 쯧쯧쯧.]
삼청동이 조금 유명해지면서 나 역시 이곳을 오가다 가게 앞에 잔뜩 줄 선 사람들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동네의 정감 가는 식당 정도로 보였다.
“성국아, 아빠랑 저기 식당 갈까?”
[아빠, 난 수제비는 사절이야. 밀가루 때문에 요즘 배가 점점 둥글어지는 거 같아.]
아빠 손에 붙잡힌 나는 어느새 수제비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민국이를 잡은 엄마가 뒤따랐다.
“자기야, 수제비 먹게?”
“여기 진짜 맛집 같아서. 멀리서도 멸치 육수 우린 냄새가 끝내줘.”
아빠는 홀린 듯이 수제비 집으로 들어갔다.
엄마와 나, 민국이는 어쩔 수 없이 식당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는 단출했다.
수제비와 감자전뿐이었다.
“여기 수제비 3인분이랑 감자전 하나요.”
아빠가 주문을 하자 눈매가 동그란 아주머니가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 집 양이 많아요. 애들 아직 어리니까 수제비 2인분이랑 감자전 시켜서 나눠 먹어요.”
“저희 네 명인데요.”
“아이고, 아직 애들 어린데. 이것들이 먹어봤자지.”
[아주머니, 저 아주머니보다 많이 먹습니다.]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럼, 수제비 2인분에 감자전 하나 주세요.”
“그려요. 근데, 얘 혹시 옛날에 TV 나오는 애 아니에요? 그 가수들이랑. 맞죠?”
“어릴 적에 나왔는데, 기억하세요?”
엄마가 되물었다.
“얼굴이 그대로네. 어머, 어머. 잠시만요.”
아주머니는 주방에 주문을 알리고는 얼른 펜과 종이를 가지고 테이블 위에 놨다.
“사인 좀 해줘요. 우리 집에 종종 탤런트들도 오긴 하는데, 이렇게 유명한 사람은 또 처음이네.”
[하아, 나 아무 데나 사인 안 하는데.]
나는 미간을 찌푸리자, 아빠가 살짝 옆구리를 찔렀다.
“성국아, 어서 해드려.”
“이 아줌마가 사인 값으로 수제비는 서비스로 줄게.”
[그럼, 뭐 공짜라니…. 내 사인 있으면 여기 성지가 되겠군.]
나는 펜을 잡고 사인을 멋지게 했다.
“어머, 어린애가 글을 왜 이렇게 잘 써.”
“저 여덟 살 됐어요.”
나는 내 나이를 각인시킬 겸 말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내 미소에 안 넘어오는 아줌마를 본 적이 없었다.
“이제 다 컸네. 정말 남의 애들 크는 건 순식간이지. 잠시만 기다려. 아줌마가 얼른 수제비 가져다줄게.”
수제비 좀 넉넉하게 끓이라는 소리가 우리 자리에까지 들렸다.
“성국이 덕분에 아빠가 돈 굳었으니까, 이따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빵빠르!”
“자기야, 나랑 민국이도 빵빠르!”
“알았어.”
곧 수제비와 감자전이 나왔다.
아주머니 말대로 수제비는 넉넉했다.
내가 숟가락을 들고 망설이자, 아빠가 얼른 앞접시에 수제비를 옮기더니 입으로 호호 불었다.
“성국아, 뜨거우니까 아빠처럼 호호 불어서 먹어.”
[이런 서민 음식 별로 안 좋아하지만, 아빠 성의를 봐서 먹어주지.]
나는 잘 식은 수제비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대체 이 맛은 뭐지!!!
나는 얼른 다음 수제비를 입안에 넣었다.
감칠맛 나는 육수에 짜장면 면발보다 더 부드러운 목 넘김.
어느새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수제비를 먹고 있었다.
“성국아, 천천히 먹어.”
[엄마, 말 시키지 마. 나 이런 맛은 처음이야.]
민국이도 질세라 수제비를 들이켜고 있었다.
아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국이랑 민국이 둘 다 수제비가 마음에 드나 봐.”
“자기야, 우리는 감자전 먹자. 애들 먹게 두고.”
“그래.”
엄마와 아빠는 난생처음 수제비 맛에 눈을 뜬 나와 민국이를 두고 감자전에 집중했다.
“자기야, 자긴 정말 음식 쪽으로 잘될 거 같아. 한눈에 맛집도 알아봤잖아.”
“소영아, 나 벌써 음식 장사만 몇 년째인데. 그리고 말이야…. 저번에 전재형 회장님이 하신 말씀 있잖아.”
[나라님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하는 건데, 극존칭이 뭐야, 아빠.]
아빠와 엄마는 정말 뼛속까지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무슨 말?”
“보쌈집 체인 해보라는 말.”
나는 잠시 수제비를 입에 넣고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에 비해 융통성이 부족한 아빠는 음식에는 진심인 편이었다. 하지만 크게 사업을 벌일 만큼의 욕심은 없었다.
“자기야, 진짜 생각해보게?”
“아직은 아니지. 이제 겨우 우리 동네에서 입소문 난 건데…. 근데, 그런 꿈을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아빠의 입에서 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아빠들에게도 꿈이라는 게 있었나?
저번 생의 아빠인 전재형 부회장은 삼전 그룹을 물려받으려고 노력했고, 물려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꿈인지, 혹은 다른 꿈이 있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에서 만난 아빠에게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게 아빠의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소영아, 요즘 IMF로 힘들잖아. 보쌈은 솔직히 가격이 있는 음식이라 우리 매출도 많이 떨어진 게 사실이잖아.”
아빠는 담담히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배달을 위주로 하는 아빠의 보쌈집은 입소문을 타고 적지 않은 순수익을 냈지만, IMF로 매출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때 성국이나 자기 말 안 듣고 가게 안 샀으면 정말 월세에, 수수료에 장난 아니게 힘들었을 것 같아. 그래서 요즘 생각해 봤는데… 서울에는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신혼부부도 많으니까 1인용이나 2인용 세트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 보쌈은 손이 많이 가는 요리니까, 가족 수가 적으면 하기 귀찮잖아.”
내가 아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이에 민국이의 숟가락이 내 앞접시를 향해 돌진했다.
탁! 나는 얼른 민국이의 숟가락을 막았다.
민국이 녀석은 이미 빈 그릇을 보며 입맛만 다셨다. 그리고 나를 세상 가장 애처롭게 쳐다봤다.
“혀어엉.”
[불쌍한 척은. 나온 네 배를 봐, 전민국.]
“혀어엉. 밍구기. 배고파.”
[하아… 이 세상 유해한 동생 같으니라고. 먹어라, 먹어.]
나는 슬그머니 내 앞접시를 민국이 쪽으로 밀었다.
“민국아, 형 먹는 거 빼앗아 먹으면 안 되지.”
“형아, 밍구기가 먹어도 돼?”
“응.”
나는 의젓하게 숟가락을 놨다.
[없는 집 형의 인생이란 이런 거구나….]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자기야, 수제비 1인분만 더 시킬까?”
“엄마, 나 배불러요.”
나는 의젓하게 대답했다. 아빠가 IMF 때문에 매출도, 순수익도 반 토막이 났는데 1인분을 더 먹을 입맛도 사라졌다.
“성국아, 더 먹어도 돼.”
“아냐. 성국이 배불러요.”
아빠가 달랬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
“왜, 성국아?”
“앞으로는 1인 가구가 대세가 될 거예요. 애 안 낳는 사람들도 많아지고요. 그러니까… 아빠 생각 완전 멋있어요!”
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성국아, 진짜?”
“네! 외국에서는 이미 혼자 밥 엄청 먹어요. 우리나라도 앞으로 그렇게 될 거예요. 경제 뉴스 보면 다들 경기가 어려우니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살기도 힘들다고 했어요.”
나는 괜히 경제 뉴스 핑계를 댔다.
앞으로는 실제로 가족 단위보다는 1인 가구와 2인 가구가 대세가 된다. 이들은 음식을 직접 하는 비용보다 음식을 사 먹는 게 훨씬 이득이다.
“맞아. 요즘 보면 보쌈 작은 거 찾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거든. 포장해가는 사람들 자세히 살펴보면 젊은 학생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꽤 돼.”
“자기야, 그런 것도 관찰한 거야?”
“IMF 때문에 매출이 줄긴 했지만, 덕분에 시간이 많아져서 이런저런 구상도 많이 하고, 분석도 했지.”
아빠도 음식만 만들 줄 아는 게 아니라, 음식 장사에는 센스도 있는 것 같았다.
“소영아, 우리 점집인지 뭔지 갈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우리한테는 이렇게 똑똑한 성국이가 있잖아.”
“전 회장님이 약속까지 다 잡아 주셨는데, 가야지.”
“알았어.”
“끄으윽.”
옆에서 민국이가 수제비 국물까지 다 마시고 요란하게 트림까지 올렸다. 그러곤 민망한지 혼자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하아, 이 혹덩어리….]
나는 민국이의 등짝을 세 번 두드렸다.
민국이는 제법 눈치를 빨리 채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이번 생에서 민국이는 전태국보다는 똑똑하고, 눈치도 있었다. 없는 집 자식이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 * *
삼청동의 오래된 한옥의 정원을 걸어 들어가자 단아한 한옥이 나왔다.
한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이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네.”
아빠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하고는 엄마를 살짝 쳐다봤다.
“소영아, 여기는 점집 같지 않아.”
“미영 언니가 그러는데. 여긴 정말 돈이 많아도 아무나 예약할 수 있는 곳이 아니래.”
“나 떨려.”
“자기야, 내 손 잡아.”
엄마는 아빠의 손을 꽉 잡았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연애 패턴이 눈에 보였다.
소심한 아빠와 대범한 엄마. 언제 시간 되면 엄마, 아빠의 연애사도 한번 파고들어 봐야겠다. 이제 나도 여덟 살이니 그 정도는 알아도 될 것 같았다.
젊은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한옥 안의 큰 방이 나왔다.
거기에는 정갈한 한복을 입은 이 선생이 있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희끗희끗한 머리는 염색도 하지 않았지만,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눈가에 주름이 많았는데, 얼핏 보면 보살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이 선생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민국이 얼굴을 한눈에 쓱 살폈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봤다. 입가는 분명 웃고 있지만, 눈매는 매서웠다.
[이 선생, 오랜만이야. 나, 전성국 회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