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55화 (55/231)

제55화

나는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이 선생은 내가 회장 자리에 오를 것을 이미 예언한 사람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늘 그렇듯 자신이 권력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했다. 언제나 1등인 나를 멍청한 전태국과 비교해서 나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일은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됐다.

이때, 나를 안심시켜준 게 이 선생이었다.

“회장님….”

“이 선생, 나는 아버지가 아니지 않은가.”

“제 말은 곧 되실 거라는 겁니다. 사주의 기운이 올해부터 작용하는데….”

이때, 이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뭐가 걸리는가?”

“분명 회장 자리에 오르실 기운인데….”

“호사다마라지 않는가.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따르겠지. 편히 말하게.”

“인생이 완전히 바뀌실 것 같습니다.”

“회장이 되니 바뀌는 게 아닌가….”

“제가 이번에 계룡산에를 갑니다. 기도 좀 올리고 다시 말씀드리지요.”

그게 끝이었다.

그 후로 진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이 선생은 우선 내게 시선을 거뒀다.

엄마, 아빠는 두 무릎을 포갠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부모님 사주부터 우선 풀이해 드리겠습니다.”

“네.”

이 선생은 엄마, 아빠의 생일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님께서 69년 7월 14일 미시 생이 맞으신가요?”

“왜 그러세요?”

“이 사주라면 지금의 삶이 도대체 상상이 안 되네요.”

“그게….”

아빠는 머뭇거렸다.

나는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사실은 저희 부부가 고아입니다. 어릴 적에 보육원에 버려져서 자랐거든요. 저는 태어난 날과 시도 모른 채 백일 경쯤 버려져서 고아원에 온 날이 제 생일이 됐습니다.”

아빠는 담담히 자신의 아픈 상처를 이야기했다.

나는 아빠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빠의 등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빠! 우지 마.”

민국이가 얼른 아빠를 안았다.

아빠는 민국이를 무릎에 앉혔다.

“저는 생일도 모르지만, 저희 와이프는 생일은 압니다. 버려질 때, 태어난 날짜랑 시 그리고 이름도 적힌 쪽지가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부인분 사주부터 풀어 보겠습니다.”

이 선생은 엄마의 사주를 쭉 풀더니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았지만, 스무 살에 대운이 들었네요.”

“스무 살이면 제가 성국이를 가진 해인데….”

[이 선생, 내가 대운이긴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격도 야무지시고, 머리 회전도 빠르시네요. 남편분보다 융통성도 있고, 배포가 크세요.”

끄덕끄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혹시….”

이 선생은 말을 끊었다.

엄마가 궁금한 표정으로 이 선생을 바라봤다.

“어머니 사주로만 봐서는 재상의 어머니 상이십니다.”

[이 선생, 그 재상이 바로 나지?]

“재상이요?”

“과거에는 재상이었으니, 현재에는 그만큼 높은 지위를 가지는 아이의 어머니가 되실 겁니다.”

[당연하지.]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선생이 나를 얼핏 보는 게 느껴졌다.

“성국이란 아이의 사주가 참 신기합니다. 1991년 9월 12일 신시 생. 원래는 이 집이 아니라 재벌가의 맏이로 태어날 운명인 아이인데….”

이 선생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굉장히 큰 기운을 가졌네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요. 이런 큰 기운을 가진 아이는 부모님이 옆에서 잘 보살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가 밝아요. 절대 이 기운을 꺾으려고도 하지 마세요.”

[어라? 이 선생이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엄마와 아빠는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그럼 저희는 성국이를 지켜만 봐주면 될까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세요. 엇나갈 인성도 아니고, 노력을 게을리할 아이도 아닙니다. 근데 전생에 마음이 허했어요. 그 허함을 채워주는 게 이번 생의 부모의 몫인 듯합니다.”

아빠가 내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아, 아빠 믿어.”

“응!”

나는 얼른 대답했다.

이 선생은 정말 옳은 답을 엄마와 아빠에게 줬다.

간섭은 최소화하고, 마음의 의지가 되어주어라.

그리고 지금 엄마, 아빠는 충분히 내 마음의 의지가 되어주고 있었다. 한 녀석만 빼고!

이 선생은 다음으로 민국이의 사주를 살피더니, 빙긋 웃었다.

“민국이라고 했나요?”

“녜에!”

민국이가 엄마, 아빠 대신 대답했다.

“똘똘하네요. 눈치도 빠르고, 똑똑해서 자신의 인생도 잘 헤쳐 나가는데, 형이 아주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형이 아마 많이 도와줄 겁니다.”

[그 말은 평생의 혹이란 소리 아닌가, 이 선생.]

“형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 만큼, 또 형에게는 마음으로 갚는 아이이니 서로가 평생을 두고 우애 좋은 형제가 되겠네요.”

엄마, 아빠는 흐뭇한 얼굴로 나와 민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도 사이가 무척 좋아요. 민국이가 형을 엄청 잘 따르거든요. 성국이도 민국이를 잘 챙기고요.”

[내 인생의 짐 될까 봐 챙기는 거야.]

아빠는 쀼루퉁한 나를 보더니 볼을 살짝 꼬집었다.

이 선생은 또다시 말을 이었다.

“헌데, 어머님….”

“네, 선생님.”

“혹시 셋째 계획이 있으신가요?”

“셋째요?”

엄마는 놀라 이 선생을 쳐다봤다.

엄마만큼 나도 놀랐다.

[이 선생, 민국이 하나만으로도 인생 버겁다고. 근데 셋째라니?!]

이 선생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올해 셋째를 낳으시면 분명 딸일 겁니다.”

“어머. 자기야, 딸 정말 가지고 싶은데.”

나는 얼른 엄마의 니트를 잡아당겼다. 그러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엄마, 셋째 안 돼.”

이 선생이 나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성국아.”

“네에.”

“저번 생에서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집안에 네가 태어나서 마음고생이 많았구나. 남들이 보기에는 세상을 다 가진 삶인데, 그걸 지켜내기가 힘들었어. 그치?”

“…….”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근데 이번 생은 말이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태어났지만, 많은 것을 이룰 인생이야. 그중에 가족도 있단다. 저번 생이 풀 하나 나지 않은 사막에 홀로 선 것 같은 외로운 인생이었다면, 이번 생에 가족은 너에게 의지가 되어줄 구름이 될 것이고, 바람이 될 것이고, 물이 될 것이야.”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가진 것 하나 없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보다 멍청하지만 언제나 나 좋다고 졸졸 쫓아다니는 민국이.

내가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발버둥 치는 이유는 비록 가난 때문이지만, 이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성국아, 이번 생에서 사막이 아니라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그늘이 있는 그런 산속에 태어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힘들 때 너를 채찍질하는 게 가족이 아니라, 너를 품어줄 가족을 만난 거야.”

“…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 때 나를 채찍질하는 가족이 아니라, 나를 품어주는 가족.

이게 바로 저번 생과 이번 생의 가장 큰 차이였다.

민국이가 얼른 나를 안았다.

“형아, 따랑해.”

포근하고 몰캉몰캉한 녀석.

나도 민국이를 안았다.

* * *

이 선생은 혼자 된 방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재형 회장이었다.

“회장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될까 모르겠지만… 이번 생에서 성국이란 아이와의 인연은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이십니다.”

- 그게 무슨 말인가?

“성국이란 아이를 직접 보니 알겠네요. 제가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이라고요. 헌데, 그 인연이라는 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는 인연입니다. 아들은 아비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을 것이고, 아들은 아비를 밟고 일어설 것이지요.”

전재형 회장의 말은 없었다.

다음 말을 기다린다는 신호였다.

“회장님, 조심하고 또 조심하십시오. 아비와 아들의 인연이 되어야 마땅한 인연이라 평생을 두고 얽힐 것입니다.”

- 알겠네….

이 선생은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재형 회장에게도 말하지 않은 하나를 조용히 읊조렸다.

“아들을 이기는 아비는 없죠. 회장님….”

* * *

“코스피가 300선도 붕괴됐습니다.”

온통 파란불이 켜진 증권가 화면을 보며 좌절한 사람들의 모습이 뉴스 화면에 잡혔다.

나는 김미영이 사온 딸기를 먹으면서 뉴스에 집중했다.

엄마는 옆에서 김미영에게 이 선생에게 사주 본 이야기를 하면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언니, 성국이는 엄청 큰 기운을 가졌고, 저보고는 재상의 어머니 상이래요.”

“진짜요?”

“네. 성국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는 주되 막지는 말라고 하더라고요.”

재상의 어머니.

큰 기운을 가지고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아들인 나. 그리고.

“언니, 저 이번 해에 자식 낳으면 딸이래요.”

“성국이 엄마, 딸 낳고 싶어 했잖아요.”

“근데… 성국이가 완전 반대예요.”

이번 해에 낳으면 딸이라는 이야기까지, 이 선생에게 다녀온 뒤로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난 항상 손을 들어 반대했다.

[엄마, 아빠 그리고 민국이. 이렇게만으로도 난 충분하다고. 전미진 같은 여동생이 태어나면 민국이보다 더 골치 아프다고. 민국이 겨우 이제 사람 만들어 놨는데… 누구를 또 키워.]

이 선생의 말뜻은 너무 잘 알았지만, 난 이 가족만으로도 충분했다.

김미영은 웃으며 답했다.

“편하게 생각해요. 생기면 낳고, 아니면 말고.”

[그렇게 무턱대고 낳고 보면 평생 가난을 못 벗어난다. 그 말도 몰라? 다들 왜 이래.]

“저희도 그러려고요.”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나에게 좀 중요한 날이었다.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고,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엄마, 아빠가 완전 화가 난 상태였다.

지금도 살짝 나와 엄마, 아빠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

나는 얼른 방에 있는 노트북을 들고 와서 김미영에게 보여줬다.

“성국아, 이게 뭐야?”

[뭐긴. 제대로 봐. 여기 내가 정확하게 땅까지 표시했잖아.]

나는 판교와 동탄. 두 군데를 동그라미 쳤다.

“여기 땅이잖아.”

“네. 저 여기 땅 사고 싶어요.”

“성국아, 그러지 마. 언니, 요즘 성국이가 맨날 저희한테도 저기 땅 보여주면 사라고 난리예요.”

엄마가 말렸다.

김미영은 조금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여기 땅 사고 싶어?”

“네에!”

“왜?”

“대한민국은 부동산이니까요.”

김미영이 작게 웃었다.

“성국이 엄마, 성국이 이름으로 땅 사두는 거 어때요?”

“언니, 지금 대한민국이 망한다고 난리잖아요. 이럴 때 땅을 사면 어떡해요. 성국이가 가진 삼전 주식도 완전 바닥이에요.”

“나는 성국이 생각이 괜찮은 거 같은데요.”

“진짜요, 언니?”

김미영은 빙긋 웃었다.

“성국이가 그동안 경제 공부 열심히 하고, 여러 가지 분석한 거잖아요. 그럼, 한번 시범 삼아서 판교 쪽 땅 사보는 거 어때요? 그다음 문제는 그 후에 결정해도 될 거 같은데.”

“그럴까요.”

엄마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미성년자는 정말 불편한 상태였다.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내가 번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대로 투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엄마 다리에 매달렸다. 이럴 때는 애교가 최고였다.

“엄마, 나 땅. 땅 사줘. 그럼 초등학교 다닐게.”

“성국아, 진짜야?”

“응! 판교 땅. 삼전 주식.”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판교 땅도 사고, 삼전 주식도 더 사달라고?”

“네에!”

어쨌든 지금 내게는 대리인이 필요했다.

김미영도 거들었다.

“성국이 엄마, 성국이 말대로 한 번 조금이라도 사봐요. 요즘 부동산에서 매물 엄청 나온다고 연락 많이 오긴 해요. 은행에 넘어가느라 밑지고라도 파는 거죠.”

“남편이랑 상의해 볼게요.”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전성국, 너 고집 너무 센 거 알지? 정말 저 고집, 누구 닮았나 몰라.”

나는 다시 엄마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아들이자나. 헤에.”

엄마는 그제야 얼굴을 풀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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