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아빠의 반대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소영아, 생각을 해봐. 땅이 한두 푼도 아니고 어떻게 어린 성국이 말만 믿고 덥석 땅을 사. 거기다 판교, 내가 알아보니까 완전히 시골이야. 동탄이란 동네는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지금은 동탄이 아니라 화성군의 부분이었다.
“자기가 예전에는 성국이가 번 돈 성국이 마음대로 쓰게 두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
“그거야. 경기가 다 좋을 때지. 지금 주식시장 봐. 뉴스에도 주식, 사업 실패로 한강 다리 가는 사람들 이야기 계속 나오잖아.”
“자기야, 자기 말도 다 맞아. 근데, 미영이 언니랑 이야기해 봤는데… 성국이가 그동안 경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나름 공부도 열심히 했잖아. 아직 어린 나이이긴 해도, 재벌가에서는 이 나이에도 경제관념을 키워주기 위해서 투자도 시키고 한대.”
“소영아, 우린 재벌이 아니잖아.”
[아빠, 나 전직 재벌이야.]
아빠는 여전히 단호했다.
“자기야, 성국이가 투자하게 해주면 초등학교 간대.”
“뭐라고!”
아빠는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전성국, 너 아빠가 그렇게 가르쳤어? 부모한테 조건을 걸라고 그렇게 가르쳤냐고!”
아빠가 이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고, 옆에 앉아서 애니메이션을 보던 민국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자기야, 민국이까지 울잖아. 소리 좀 낮춰.”
“하아…. 아니, 내가 이상한 거야? 이제 갓 여덟 살이 된 놈이 몇억씩이나 되는 땅을 사고, 거기다 주식을 하겠다는 게 이상한 거야! 소영아, 나 가게 나가.”
아빠는 겉옷을 걸치고는 집을 나섰다.
쾅-. 현관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민국이는 그 소리에 더 울어댔고, 엄마는 민국이를 달래기에 바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내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본 채 입을 닫았다.
이제부터 단식투쟁이다!
* * *
“성국아, 저녁 먹자.”
엄마가 방문을 빼꼼 열더니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바라봤다.
나는 몸을 살짝 틀어서 눈을 감았다.
엄마가 침대 옆에 앉는 게 느껴졌다.
“성국아, 자?”
[안 자지만 자는 척할 거야.]
“성국아, 저녁 먹어야지.”
엄마가 내 팔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엄마 손은 참 따뜻하고 좋은데… 아빠는 왜 내 맘도 몰라줄까?
5억이란 돈이 크다면 클 수 있다.
하지만 10년 후에도 5억이라는 돈이 큰돈일까?
대한민국처럼 매년 경제가 성장하는 나라에서 현금은 가치가 하락할 뿐이다.
앞으로 딱 10년 후에는 부동산 가치가 미친 듯이 상승한다. 그때는 지금 5억으로 살 수 있는 집도, 세 배 이상 줘야 살 수 있다. 그 말인즉슨, 5억짜리 부동산은 15억이 될 수 있지만 현금 5억은 영원히 5억이라는 이야기이다.
엄마는 계속해서 내 팔을 쓸어내렸다.
“성국아, 네가 하고 싶은 것도 잘 아는데… 아빠 말도 한번 들어봐. 다 너 걱정돼서 하시는 말씀이야. 혹시라도 투자 잘못해서 돈 잃으면 네가 하고 싶은 공부도 못 하잖아.”
엄마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까?
저번 생에서 사교육이란 사교육은 다 받아봐서 이번 생에서는 아무 의미 없단 말을 믿을까?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올리고 돌아누웠다.
엄마가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성국아, 배고프면 나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 한 끼 굶는다고 죽지 않을 것이다.
* * *
아침부터 엄마, 아빠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성국이가 벌써 두 끼나 건너뛰었다고. 자기가 가서 성국이 좀 말려봐.”
“됐어. 밥 먹지 말라고 해. 지가 뭐 워렌 버핏이야. 겨우 여덟 살짜리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성국이가 번 돈이잖아. 성국이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 돈 우리가 일부러 성국이 이름으로 된 통장에 고대로 넣고 하나도 안 건드린 거잖아.”
[옳소!]
엄마 말이 다 맞았다.
내가 피땀 눈물 흘려가며 카메라 앞에서 웃고 뒹굴어서 번 돈이었다.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우리가 안 건드린 돈은 아니지. 그 돈으로 앞으로 지가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라고 우리가 안 건드린 돈이지.”
아빠도 만만치 않았다.
“솔직히 우리 그때 성국이가 이렇게 똑똑하고 대단한 아이인 줄 몰랐잖아. 지 혼자 영어에 프랑스어까지 하는 애인데, 공부보다 투자가 하고 싶다잖아.”
“소영아, 난 우리 성국이가 돈 많이 버는 사람보다 진짜 그 똑똑한 머리로 공부 많이 해서 교수나 그런 거 됐으면 좋겠어. 돈은 너랑 나랑 열심히 벌면 되잖아. 솔직히 이제 우리 집 IMF에도 끄떡 안 하고, 서울에 34평 아파트도 있잖아.”
[아빠, 우리 집은 연줄 없어서 대한민국에서 대학교수 되기 힘들어. 대학 거기, 다 돈이고 인맥이야.]
아빠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이름 있는 대학의 교수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게 언제나 한이 된다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기야. 자기가 고등학교밖에 못 나와서 그런 거지?”
엄마가 세게 나왔다.
“소영아, 난 정말 성국이가.”
“됐어. 왜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성국이한테 이루라고 하는데? 결국, 공부하란 건 자기 욕심이잖아. 성국이도 다 생각이 있는 아이야.”
[엄마, 나이스!]
나는 침대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빠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암튼 난 절대 반대야. IMF에 다들 힘든데, 지금 이 마당에 그 힘든 사람들이 급하게 내놓은 땅을 사겠다는 게 말이 돼? 금 모으기 운동에 내게 애들 돌반지 좀 찾아놔.”
[아빠! 안 돼!]
나는 속으로만 소리를 쳤다.
아빠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이 힘든 마당에 급매로 내놓은 땅을 누군가 사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바로 은행 소유가 된다. 그렇게 되면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둘째, 금 모으기 운동은 물론 힘든 나라를 되살리려는 서민들의 애국심이지만, 왜 우리가 IMF 외환 위기를 맞이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원인 규명은 하지 않은 채 애국심에 호소하는 감정 마케팅이다.
조선을 일본에 팔아먹은 것은 국민들이 아니라 을사오적, 다섯 명이었다. IMF 외환 위기 역시 열심히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탓이 아니라 방만하게 기업을 경영한 일부 경영인들의 책임이 더 강했다.
왜 그 책임을 전 국민이 통감해야 하는데!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가 문을 열었다.
“성국아, 자? 아침 안 먹어?”
나는 꿈쩍도 안 했다.
엄마가 침대 곁에 앉았다.
“성국아, 이렇게 밥 안 먹고 한다고 아빠가 허락하진 않아. 너도 투자를 하고 싶다면 아빠를 설득해. 단식투쟁은 설득이 아니라 그냥 떼쓰는 거야. 알았어?”
엄마는 그 말만 남긴 채 떠났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엄마 말대로 나는 설득이 아니라 어린애처럼 떼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던 임원들이나 하던 짓을 내가 한 것이었다.
[어려지더니 정신까지 같이 어려진 건가…. 전태국도 하지 않을 이런 짓을 하다니….]
흠… 쪽팔리지만.
나는 식탁에 가서 앉았다.
걱정하고 있을 엄마가 신경 쓰였다.
엄마가 나를 흘끔 보더니 밥을 차려줬다.
TV 보던 민국이가 조르르 달려와서 내 옆에 앉았다.
“엄마. 밍구기도 바압.”
“민국아, 너 아까 먹었잖아.”
“형아 띰띰하자나. 가치 머글래.”
나는 민국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민국이는 나를 보며 위아래 이를 다 드러내며 웃었다.
“엄마, 형아 밥!”
“알았어.”
민국이는 내 밥까지 챙겼다.
엄마는 밥을 가져다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엄마 말 들어줘서 고마워.”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며칠 골 부린 내가 부끄러워졌다.
가족들은 언제나 나를 생각하는데, 나만 너무 내 생각을 밀어붙인 것 같았다.
“형아, 우러?”
“울긴 누가 울어.”
나는 얼른 붉어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하아, 왜 이렇게 쪽팔리냐, 진짜….]
* * *
나는 엄마와 김미영의 손을 잡고 부동산으로 향했다.
부동산에서 내가 원하는 매물을 보고 아빠에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는 것은 엄마의 아이디어였다. 거기다 부동산을 잘 아는 김미영도 함께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님이 반갑게 맞이했다.
저번 아빠 상가 일로 이미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오늘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사장님, 저번에 제 아들이 말한 데요. 판교 쪽에 부동산 매물 나온 것 좀 있나 해서요.”
“안 그래도 진짜 연락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됐네요.”
부동산 사장은 우리에게 연락처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가 내 친구가 분당 쪽에서 하는 부동산이에요. 여기 한번 가보세요. 그쪽에 판교 쪽 매물이 많이 나오거든요.”
[좋은 부동산?]
이름처럼 좋은 곳인지는 확인해봐야 알 것 같았다.
“나온 김에 우리 같이 가볼까요?”
김미영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언니, 시간 되세요?”
“주말에 싱글은 할 일이 없잖아요.”
“저야 고맙죠. 사장님, 그럼 저희 간다고 연락 좀 해주세요.”
“알았어요. 친구한테 좋은 물건 많이 골라놓으라고 할게요.”
* * *
김미영의 차가 멈춰 선 곳은 판교의 어느 부근이었다.
1998년 1월의 판교는 전원일기에나 나올 것 같은 시골이었다.
김미영이 차에서 내려서는 판교 일대를 쭉 훑었다.
“와, 언니. 여긴 나랑 오빠가 자란 서촌보다 더 시골인 것 같아요.”
“성국이는 여길 왜 콕 집은 걸까요? 성국아, 이유가 뭐야?”
“강남이랑 가까운 곳에 이렇게 큰 땅이 있어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서울로 모이잖아요. 서울은 점점 커지고, 땅값은 비싸져서 신생 기업들은 서울 근교에 자리 잡을 터전을 찾을 거예요. 아마 국가적 차원으로 그런 용지가 필요하고요. IMF만 없었어도 이미 추진될 일인데, 좀 지연되는 것 같아요.”
나는 또박또박 말했다.
김미영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와, 나도 돈만 있었으면 여기 땅 좀 사고 싶네.”
“언니, 돈 없어요?”
“상가 사느라 돈 다 털었어요. 아쉽다.”
김미영은 아파트 상가 두 채를 정리하고 급매로 나온 아파트 근처 꼬마 건물을 하나 샀다. 1층에는 커피숍과 편의점. 2층에는 독서실이 입점해 있었다.
안정적인 투자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내가 할 투자는 나에게는 안정적이지만, 남들에게는 도박처럼 보이는 것일지 모른다.
1998년 하반기에 판교는 개발 용지로 지정된다.
외환 위기 때문에 2006년에나 판교 테크노 밸리의 첫 삽을 뜨지만, 지금 산다면 어떤 로또보다도 대박 나는 투자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황량한 땅을 바라봤다.
돌아가신 전주신 회장이 떠올랐다.
전주신 회장은 소 팔아 장사를 시작해 삼전이란 그룹을 만든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 성국아, 땅은 절대 배신을 안 한다. 주식이야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되서 공중에 훨훨 날아가기도 하지만, 땅은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땅을 보고 다루는 법을 알아야, 다음 투자도 하는 것이다. 알아들었니?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었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가 땅을 혼자 사고팔 일은 없었다.
“성국아, 무슨 생각 해?”
“엄마!”
“응?”
“엄마, 나 여기 땅 꼭 살래요.”
판교의 허허벌판을 보는 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이렇게 심장 뛰는 일은 처음이었다.
역시 나는 돈을 버는 일이 제일 신이 났다!
* * *
미리 연락을 받은 부동산 사장은 우리에게 매물을 여러 개 보여줬다.
“요즘 말도 못 해요. 다들 찾아와서 울면서 매물 내놓는다니까요. 자식들이 원수지. 부모가 평생 피땀 흘려 일군 땅을 담보로 사업들을 해서는 아주 다 말아먹었어요.”
부동산 사장은 매물로 나온 땅을 설명해줬다.
“요즘 시세는 평당 20만 원 정도 해요. IMF 전까지만 해도 경제 뭐 개발 지구인가 지정 이야기가 있어서 50만 원 정도는 훌쩍 넘긴 땅들이에요. 참, 땅값 떨어지는 거 보면 꼭 나라 망할 것 같다니까요. 차라리 성남이나 이런 데 땅이나 집을 보시는 게 어떠세요? 거기도 요즘 급매가 장난 아니에요.”
“아저씨.”
“응, 왜?”
부동산 사장이 설명을 하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평평한 땅이요. 2천 평. 3억에 살 수 있는 데 구해주세요.”
“평평한 땅?”
“네.”
나는 지금은 허허벌판이지만, 앞으로 판교역이 생길 곳을 정확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당도 성남도 아닌 곳. 판교.
대한민국의 미래도 내 미래도 이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