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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57화 (57/231)

제57화

부동산 사장은 황당한 얼굴로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나를 보곤 엄마와 김미영을 번갈아 봤다.

“죄송한데요. 두 분이 땅 사러 오신 거죠?”

“아, 네. 그런데….”

엄마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아마도 내가 땅을 사려는 것을 믿는 부동산 업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장님, 아이가 저희 이야기 들어서 그래요. 이 부근에 땅 나오는 것 없을까요?”

김미영이 재빨리 치고 들어갔다.

“애가 영특하네요.”

사장은 웃더니 매물 목록을 살폈다.

“흠… 3억은 힘들 것 같고… 5천만 더 쓰시죠.”

나는 작게 고개를 흔들면서 엄마의 치마를 가로로 잡아당겼다. 절대 안 된다는 표시였다.

엄마는 얼른 부동산 대표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사장님, 한 번 소유주랑 이야기해 보세요. 요즘 정말 금리 미쳤잖아요. 땅 사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들 많지 않을 거예요.”

“그렇긴 해도….”

부동산 사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보통 부동산에서는 땅을 팔 때 자신들이 얼마까지 받아줄 테니, 얼마를 달라는 요구를 한다. 싸게 팔면 그만큼 부동산 사장이 가져가야 할 파이가 작아지는 것이다.

“사장님, 부탁드려요.”

“알았어요. 말은 해볼게요. 어… 엔터테인먼트 팀장님이시네요. 소속 연예인이 누가 있어요?”

“임선미 아시죠?”

“당연히 알죠!”

부동산 사장은 급반색을 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나설 타이밍이었다.

“저도 있어요!”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부동산 사장은 내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곤 손뼉을 딱! 마주쳤다.

“얘… 걔… 아니에요?”

“네, 얘… 걔… 맞아요.”

나는 얼른 대답을 했다.

“아니 이렇게 유명하신 분들이 오시고… 제가 한번 다른 매물도 찾아서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유명한 어린아이가 이럴 땐 참 유용했다.

* * *

부동산을 다섯 군데 더 돌았다.

이건 순전히 김미영의 판단 때문이었다.

여상을 나와서 경매로 원룸 건물까지 산 경력 때문인지, 확실히 김미영은 부동산 투어에 도움이 됐다. 엄마는 옆에서 눈치껏 명함을 남겼다.

엄마와 내가 김미영이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언니, 정말 대단해요. 그동안 이 힘든 일 해 오신 거잖아요.”

“힘든 게 아니라, 재미있어요.”

빙고!

공부도 재미있어야 잘하듯이, 돈도 재미있어야 잘 벌리는 것이다.

발품 팔고, 가격 흥정하고. 이 모든 일이 재미없다면 돈을 벌어도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뒷자리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 힘들어?”

“아니, 엄마도 재미있어.”

[다행이네. 엄마라도 이런 데 관심이 있어서.]

나는 싱긋 웃었다.

아빠처럼 요리밖에 모르다가는 흙수저로 태어나 동수저 한 번 되는 게 고작일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아빠를 설득할 말들을 생각했다.

괜히 긴장이 됐다.

저번 생에서도 수없이 한 PT였지만, 이번은 뭔가 달랐다.

아빠를 설득하지 못하면, 나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 * *

전재형 회장은 고심에 빠졌다.

IMF에서는 삼전 자동차의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요구했고, TF팀에서도 구조 조정이나 매각을 추진했다. 하지만 임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초대 회장인 전주신 회장의 유지라는 이유를 들었다.

양 비서가 커피를 내밀었다.

“회장님, 커피 한잔하시죠.”

“…….”

전재형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삼전 자동차 말이야. 나는 매각해야 된다고 보거든. 근데 임원들의 반대가 너무 심해. 이렇게 가다가는 다른 돌 밑장 빼서 삼전 자동차 먹여 살리는 것밖에는 안 되는데….”

양 비서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임원단을 전체적으로 교체하지 못한 게 문제 같아.”

“안 그래도 명예퇴직자들 신청도 끝났고, 이제 구조 조정 시작이지 않습니까. 임원진들 중에도 명예퇴직을 하신 분들도 있지만 전주신 회장님의 측근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이번 구조 조정을 이용해 보시지요.”

양 비서는 적재적소에 조언을 했다.

전재형 회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럴 때 든든한 아들이 있다면…. 전재형 회장은 어린 시절 아버지 곁에서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었다. 마치 성국이처럼….

‘내가 왜 이러지….’

전재형 회장은 정신을 차렸다.

삼청동 이 선생의 말대로라면 이번 생에서 전성국이라는 아이는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 * *

아빠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IMF 때문에 가게 장사가 영 시원치 않았지만, 아빠가 일찍 퇴근하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 10시 30분.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나는 얼른 아빠에게 달려가서 인사를 꾸벅했다.

“아빠, 다녀오셨습니까.”

“응.”

아빠는 평소와 달리 짧게 대답했다.

엄마에게 판교 땅을 보고 온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분명하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하는 투자에 대해서 반대 입장인 것도 보였다.

엄마가 민국이를 재우고 방에서 나왔다.

“자기야, 씻어. 성국이가 할 말이 있대.”

“알았어.”

아빠가 욕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준비한 기획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전성국의 총자산 5억 7천만 원.

이 중 판교 땅 3억 매입.

2억 삼전 주식 매입.

그리고 왜 하필 지금 땅을 사고 주식을 사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자료로 만들었다.

아빠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아빠 앞에 앉았다.

아빠는 나를 슬쩍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말해봐.”

“네, 아빠.”

나는 얼른 노트북 화면을 아빠 앞으로 돌렸다.

“아빠, 이게 지금 뭐냐면요. 우리나라의 수출 지표예요.”

“수출 지표?”

“네. 지금 우리나라가 IMF잖아요. 그동안 부실하게 경영했던 기업들이 도산하면서, 그 아래서 하청을 담당했던 작은 기업들까지 어음을 제대로 받지 못해 줄도산 하는 상황이잖아요.”

“아빠, 그런 거 잘 몰라.”

[아빠, 이것도 어려워? 앞으로 보쌈 체인 사업 하려면 이 정도는 기본인데….]

나는 애써 침착하게 수출 지표를 손가락으로 다시 가리켰다.

“IMF 상황이지만, 대한민국 수출 지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어요.”

“진짜 그러네.”

엄마가 옆에서 일부러 내 말에 대답해줬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대한민국의 경제는 망하지 않는다. 수출이 이렇게 잘되는데, 망할 이유가 없고 IMF에 진 빚은 조만간 갚을 수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빠가 머리를 털던 수건도 멈추고 나에게 집중했다.

“우리나라는 곧 IMF를 극복할 거고요. 그렇게 되면 지금 바닥으로 떨어진 부동산도, 주식도 다시 올라갈 거란 말이에요. 이전보다 더 높게, 더 높이요.”

“그래서 지금 투자를 해야 한다?”

“네, 아빠.”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수건으로 다시 머리를 말렸다.

“성국아, 아빠한테도 생각할 시간 줄 수 있지.”

끄덕끄덕.

[물론이지, 아빠.]

“그리고 아빠가 만약 허락하지 않더라도 초등학교는 가는 거다?”

[하아…. 아빠, 나 배워야 할 건 이미 저번 생에서 다 배웠어. 내가 받은 사교육비만으로도 강남에 빌딩 올렸을 거야.]

대신 나도 아빠에게 다른 대답을 줬다.

“아빠, 나도 생각해볼 시간을 주세요.”

“그래, 우리 공평하게 서로 생각해보자. 아빠한테 뽀뽀해줄 거지?”

“네에!”

나는 얼른 일어나 아빠의 거칠거칠한 뺨에 뽀뽀를 했다.

[아, 진짜 여덟 살이 되어도 세상 살기 힘드네. 힘들어.]

아빠는 내 궁둥이를 빵빵 쳤다.

“이제 화해한 거다, 아빠랑?”

[삐친 건 내가 아니고, 아빠잖아.]

그렇지만 우선에 지금 급한 건 나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곤 필살기 뽀뽀까지 했다.

쪽.

금세 아빠는 빙긋 웃었다.

* * *

“소영아, 성국이 말대로 하는 게 좋을까?”

지성은 소영을 보며 몸을 돌렸다.

민국이의 낮은 코 고는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자기야, 난 성국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면 어떨까 싶어. 성국이가 번 돈인 사실 같은 거 다 떠나서… 성국이는 정말 특별한 아이잖아. 진짜 아무것도 없는 우리 사이에 태어나서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해준 아이인데, 다 잃는다 해도 이미 우리 많이 가졌잖아.”

“…….”

지성은 말이 없었다.

소영이의 말이 맞았다.

수유의 단칸방. 월 50도 안 되는 월급. 그런 자신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덕분에 집도 생겼고, 가게도 생겼다.

지성은 소영이의 손을 꼭 잡았다.

“소영아, 너 나한테 시집올 때 이렇게 잘살 줄 알았어?”

“그냥 그땐 자기랑 있는 게 좋았고… 한 10년 후쯤에는 방 두 칸짜리에는 살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 생각만 했지.”

“나도…. 가게도 차도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못 했어.”

지성도 옛날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자기야, 근데 그 삼청동 이 선생님이 한 말 기억나?”

“무슨 말?”

“내가 재상의 어머니 상이라고.”

“설마, 너 그거 듣고 성국이 지지해주는 건 아니지?”

“솔직히 그런 것도 있지.”

소영은 배시시 웃었다.

“참, 소영아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야지. 성국이 금반지는 없지만, 민국이 때 받은 건 좀 있잖아.”

“아, 맞다. 내일 모아서 성국이랑 민국이 데리고 은행 갈게. 애들도 이런 건 경험하면 좋지.”

* * *

나는 안방에서 들리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지 듣고 있었는데, 어느새 시시덕거리는 게 영 불안했다.

[이러다 이 선생 말대로 진짜 셋째 생기는 거 아니야? 그럼, 곤란한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 집안에서 가족들 먹고살 생각 하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흙수저 경진 대회 나가면 1등 먹기 딱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집 장만하고, 아빠 가게 만들어 주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거기다 민국이 밥벌이 시키겠다고 내가 얼마나 연기 지도를 했는데….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면서 와인 생각이 났다.

이럴 때 와인 한 잔 하고 잤으면….

나는 침대에 앉아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기도라는 것이 떠올랐다.

저번 생에서도 종교는 없었다.

삼전 그룹의 후계자였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다시 태어났더니 흙수저 집안에 태어났는데 신이 있으면 원망밖에 할 게 없어서 기도 같은 것도 안 했다.

그런데 오늘은 꼭 기도를 하고 싶었다.

나는 얼른 바로 앉아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어느 신이시든 제 기도 좀 꼭 들어주세요. 저희 가족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주시고요. 아빠가 마음을 바꿔서 꼭 투자하게 해주세요.”

* * *

엄마와 민국이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금 모으기 운동이 한창인 은행이었다.

“엄마, 금 모으기 하러 온 거야?”

“응. 우리도 나라가 어려운데 도움이 돼야지.”

[정말 서민들은 어쩔 수가 없네. 지금 제일 어려운 게 서민이잖아! 엄마, 우린 서민이라고!]

하지만 나는 얼른 방실방실 웃으며 은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송국 카메라가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가 금 모으기 창구를 찾는 동안, 방송국 직원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성국이 아니에요?”

“네, 맞아요.”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러 오신 거죠?”

“네.”

“그럼, 짧게 인터뷰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제가 할게요!”

나는 얼른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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