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카메라가 나와 엄마, 민국이를 잡았다.
나와 민국이가 고사리손으로 가져온 금을 올려놓자, 직원이 웃으면서 금의 무게를 쟀다.
내 뒤로도 사람들이 길게 줄서 있었다.
이때, 자연스럽게 기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여기 아역 모델과 배우로 유명한 전성국 군과 전민국 군 형제도 나와 있네요. 안녕하세요, 잠깐 인터뷰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내가 번쩍 손을 들자 보고 선 모두가 엄마, 아빠 미소를 지었다.
“성국 군, 오늘 돌반지 낸 거예요?”
“저는 돌잔치 때 돌반지 못 받아서 없고요. 동생 돌잔치 때 받은 거 가지고 왔어요.”
“아휴, 장하네요. 성국 군, 올해 몇 살이죠?”
“여덟 살 됐어요.”
“아기 때부터 우리가 지켜봤는데, 이제 초등학생이 됐네요. 성국 군 IMF가 뭔지 알아요?”
“대한민국 경제가 어려워요.”
기자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국 군이 잘 알고 있네요. 성국 군의 도움으로 대한민국 경제가 살아나겠죠?”
“네, 대한민국 경제는 꼭 일어날 거예요. 걱정 마세요!”
나의 확언에 보고 선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기자가 정리 멘트를 시작했다.
“저도, 아니 우리 모두도 성국 군과 같은 마음입니다. 금 모으기 현장에서 이선우 기자였습니다.”
* * *
구수영 회장은 죽은 아들의 방을 한동안 눈으로 훑었다.
아들이 쓰던 침대, 보던 책들이며 컴퓨터까지 그대로였다.
방학 때면 한국에 들어와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아서, 얼마 전까지 보던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수영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재벌가지만 화목을 강조했던 구수영 회장은 결혼 후에 따로 만나는 여자도 없었다. 똑똑한 첫째에, 욕심 없는 딸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가족이었다.
구수영 회장은 책을 덮고 한숨을 쉬었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둘째였다.
“아빠, 나와서 디저트 같이 먹어요.”
“그래.”
구수영 회장은 애써 웃으며 거실로 나갔다.
한창 9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IMF 외환 위기에 대한 기사들이 흘러나왔다.
셋째 딸이 구수영 회장에게 마카롱을 내밀었다.
“아빠 좋아하는 마카롱이요.”
“그래.”
구수영 회장이 무척 좋아하는 마카롱이었지만, 국내에는 잘하는 데가 없어서 홍콩이나 프랑스에 가면 딸들이 종종 사오곤 했다.
부인도 딸들도 모두 평소처럼 행동하고 대화를 나눴지만, 모두들 괜찮은 척 연기하고 있었다.
구수영 회장은 마카롱을 한 입 깨물었지만, 예전처럼 맛있지도 좋지도 않았다.
“어머, 쟤 저스트랑 육아일기 찍었던 아기 아니야?”
둘째가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TV를 가리켰다.
“어머, 언니. 벌써 여덟 살이래. 와, 근데 쟤는 어쩜 어릴 때랑 고대로 자랐지? 신기하다.”
“엄마, 엄마도 그 프로 엄청 좋아했잖아요.”
부인도 화면을 보며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어머, 진짜 그대로네.”
“엄마, 성국이 쟤 정말 잘생겼지? 크면 장난 아닐 거 같아.”
“그러게.”
구수영 회장도 딸들의 수다에 따라 뉴스를 봤다. 인터뷰까지 아주 또박또박 잘했다.
“아빠 얼마 전에 쟤 봤어.”
“진짜? 아빠 어디서 봤어?”
둘째가 반색을 했다.
“삼전 호텔에서 연말 모임 하러 갔는데, 로비에서 우연히 봤어. 삼전 전재형 회장이 후원해주나 봐.”
“아, 맞다. 예전에 삼전 가전 모델도 했었어.”
“아빠, 이번에 우리 그룹에서 쟤 모델로 쓰자.”
“언니, 흑심을 드러내지 마.”
“야, 무슨 여덟 살짜리한테 흑심이야.”
딸들도 오랜만에 아웅다웅했다.
첫째 아들이 죽은 후로 오랜만에 식구들이 웃었다.
구수영 회장도 성국이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첫째 아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성국이를 보면 첫째 아들의 어릴 적이 떠올랐다.
“우리도 준호 이름으로 장학재단 하나 설립하자.”
준호라는 말에 거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구수영 회장의 입에서 첫째 아들의 이름이 나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아들이 죽은 후로 그 이름은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보, 좋은 생각인 거 같아.”
제일 먼저 입을 뗀 건 구수영 회장의 부인이었다.
죽은 아들을 기리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기도 했었다.
“아빠, 그럼 성국이 쟤 삼전에서 우리가 뺏어오자.”
“그건 상도가 아니지.”
“삼전에서 맨날 우리 가전 베끼잖아. 그건 뭐 상도인가.”
“우선 성국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보고.”
구수영 회장은 마카롱을 마저 먹었다. 코끝에 달큰한 향이 감돌았다. 잃었던 식욕이 오랜만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 * *
아빠가 근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아빠, 제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마. 제발….]
“내가 부동산에 알아보니까 미성년자는 부동산을 살 때 부모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건 나도 안다고. 안 그랬으면 내가 혼자 얼른 사버렸지.]
나는 입을 앙다물고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성국아, 한번 투자해봐.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와아! 아빠 만세!”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폴짝폴짝 뛰었다. 그러곤 얼른 아빠에게 달려가서 거칠거칠한 뺨에 뽀뽀를 해댔다. 여덟 살짜리의 뽀뽀를 싫어하는 아빠는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전성국, 아빠 말 아직 안 끝났어.”
[무섭게, 왜 그래. 아빠.]
나는 막 뽀뽀한 입술을 손등으로 훔쳤다.
“성국아, 초등학교는 다니는 거다.”
“…….”
나는 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아빠가 예스 혹은 노를 할 경우에 걸 조건들을 생각했다. 아빠가 예스를 할 경우 초등학교에 다니라는 조건을 걸 거라는 예상은 했다. 그 경우, 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아빠, 초등학교 다닐게요.”
“성국아, 잘 생각했어. 이건 아빠가 투자를 허락해주는 조건으로 건 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초등학교는 누구나 가야 하는 거야.”
“아빠, 대신에요. 제가 초등학교 가서 공부 잘하면 검정고시 보게 해주세요.”
“…….”
아빠는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나는 아빠의 눈을 바라봤다. 간절히.
드디어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이 한마디에 나는 다시 일어나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초딩들과 학교를 같이 안 다녀도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엄마가 나를 끌어안았다.
“성국아, 그렇게 좋아?”
“네에!”
나는 신이 나서 목소리도 높게 대답했다.
“엄마, 나 판교에 땅 살래요.”
“조금 더 알아보자.”
“네에!”
[그래, 이 정도는 내가 기다려주지!]
나는 얼른 엄마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 * *
구수영 회장은 김 비서를 통해서 성국이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삼전 그룹의 전재형 회장님께서 전성국 군에 대해서 유독 관심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이유는 전성국 군의 천재성 때문이었습니다.”
“천재성?”
“네. 전성국 군의 부모는 둘 다 고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이런….”
“둘 다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고아라는 신분 때문에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결혼도 빨랐습니다.”
“흠….”
구수영 회장은 사연을 들을수록 마음 한편이 아렸다.
“전성국 군의 아버지는 일찍 요리를 배워 수유에 있는 주점 주방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보쌈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고, 전성국 군의 어머니는 여상 졸업 후에 경리로 잠시 회사를 다니다 전성국 군을 가지면서 그만뒀지만, 현재는 전성국 군이 소속된 SKJ 엔터테인먼트의 팀장이자 실직적인 소유주로 일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평판은 무척 좋습니다.”
“내가 궁금한 건 부모가 아니라 전성국 군일세.”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성국 군은 아시다시피 광고와 주말 예능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쌓았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점은 바로 전성국 군이 단 한 번의 과외도 없이 영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얼마 전 삼전 투자 증권에서 퇴사한 제이슨 리에 의하면 경제에 특히 밝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저도 그게 이상해서 여러 루트를 통해서 알아봤습니다. 전성국 군의 학업 성취도와 경제에 대한 관점은 누가 봐도 천재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김 비서는 잠시 말을 골랐다.
“최근에는 판교 부근의 토지 투자를 알아보고 있다고 합니다.”
“판교를?”
“네.”
구수영 회장은 살짝 놀랐다. 어린아이가 투자를 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거기다 판교라니…. IMF 이전에 이곳저곳에서 판교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긴 했다.
“김 비서, 전성국 군과 삼전 그룹의 관계는?”
“삼전 그룹에서는 전성국 군에게 유치원부터 대학이든 대학원까지 혹은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데까지 지원하기로 이미 약속한 상태입니다.”
“삼전 그룹 장학생은 유명하니 놓칠 리가 없겠지.”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은… 얼마 전부터 전성국 군이 삼전 그룹의 후원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초등학교 입학은 영성 초등학교가 아닌 일반 초등학교로 진학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삼전 그룹을 손절한다는 의미인가?”
“거기까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전성국 군이 삼전 그룹의 전폭적인 후원을 불편하게 여기는 모양인 것 같습니다.”
구수영 회장은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김 비서, 성국 군과 자리 한번 마련해보게.”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리고… 우리 회사 차원에서 전성국 군을 지원할 수 있는 걸 찾아서 나에게 보고하게.”
“네, 회장님.”
* * *
부동산 사장의 전화를 받고 엄마와 나는 부리나케 분당으로 달려왔다. 김미영도 함께였다.
부동산 사장은 내가 찾는 매물이 나왔다고 했다.
원래는 4억 이상을 부르던 땅이었지만, 상황이 긴급해졌다고 한다. 보나 마나 빚 독촉이 심해진 경우일 것이다.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사장이 우리를 반겼다.
“땅 보러 갈 수 있을까요?”
김미영이 먼저 말을 건넸다.
부동산을 보지 않고 사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며 분당으로 오는 내내 김미영이 우리에게 말했다.
“물론이죠. 물건 보고 사야죠.”
부동산 사장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우리는 부동산 사장의 차를 타고 매물이 나온 곳으로 향했다.
내가 정확하게 찍은 판교역 부근이었다. 물론 평수는 조금 줄었지만, 지도상으로는 판교역 근처라 더 가치가 있는 땅이었다.
“여기입니다. 평평한 땅.”
부동산 사장은 내가 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휙 둘러봤다.
허허벌판.
이 말이 제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곳은 20년 후에 대한민국 IT 산업의 허브가 된다. 동시에 경기도의 가장 노른자위가 된다.
나는 엄마에게 속삭였다.
“엄마, 마음에 들어.”
엄마가 내 대답을 듣고는 부동산 사장을 쳐다봤다.
“사장님, 근데 이 땅 어떻게 나온 거예요?”
“요즘 같은 세상에 뻔하죠. 아들이 사업하다가 힘들어져서 부모가 내놓은 거예요.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면서 처음엔 4억 이하로는 절대 안 파신다 그러더니, 지금은 빨리 임자만 찾아달래요. 최근 들어서 땅 사겠다는 사람이 정말 씨가 말랐거든요.”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부동산 사장은 나를 아기 보듯 쳐다봤다.
“성국아, 왜에?”
“사장님.”
“응?”
“제가 이 땅 살게요!”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