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63화 (63/231)

제63화

구수영 회장과 길을 걸어 나오는 길.

엄마, 아빠 뒤로 명품 쇼핑백을 가득 든 비서들이 따랐다.

“회장님, 저희는 따로 선물도 준비 못 했는데요.”

“저희가 갑자기 만나자고 한 게 무례할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와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죠. 저희 부인이랑 딸들이 손이 좀 커요. 제가 그래서 많이 힘듭니다.”

“아빠, 돈 많은 사람이 돈도 써야지. 그래야 경제가 돌아간다고 맨날 그랬잖아.”

“저희 집 딸이 철이 아직 없어요.”

구수영 회장네 가족은 정말 화목해 보였다.

저번 생의 친구였던 구수영 회장의 맏아들 녀석도 살아 있었다면 분명 행복하게 잘 살았을 텐데….

“회장님.”

“왜, 성국아.”

“분명 행복했을 거예요… 아드님이요.”

“…그래, 고맙구나.”

구수영 회장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왔다.

[전재형 회장 아니야!]

나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괜히 왜 쪼는 거지.]

마치 조강지처 두고 바람피운 기분이랄까.

전재형 회장이 포커페이스로 걸어왔다. 이미 나와 구수영 회장을 멀리서 발견한 것 같았다.

전재형 회장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회장님, 여기서 또 뵙네요. 성국이네도요.”

“잘 계셨어요? 회장님.”

아빠가 가족 대표로 인사를 했다.

전재형 회장이 구수영 회장이 내 손을 잡은 것을 흘깃 보는 게 느껴졌다. 괜히 식은땀이 나는 건 기분 때문이겠지?

나는 최대한 태연히 생글거리며 전재형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성국이도 잘 있었지?”

“네에!”

“자네도 아트페어 때문에 온 건가?”

“네, 가족들이 모두 이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전태국과 전미진도 여기 있단 말이었다.

“그럼, 잘 구경하고 가게.”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구수영 회장은 전재형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보란 듯이.

* * *

엄마와 아빠는 얼떨떨한 얼굴로 선물받은 쇼핑백을 풀어봤다.

“자기야, 여기 브랜드 알아?”

“나는 이런 거 잘 모르잖아. 근데 엄청 비싼 거겠지?”

[이거… 이거… 내가 나서야 하나. 나는 사실 이런 명품은 너무 흔해서 잘 안 쓰는 거긴 했지만, 모르는 브랜드는 아니었다.]

엄마가 얼른 손뼉을 쳤다.

“미영이 언니 불러서 물어봐야겠다. 언니는 직장 생활도 하고 해서 잘 알 거야. 엔터 대표라 종종 연예인들한테 이런 선물도 하더라고.”

“그러자. 만약 너무 비싸면 돌려드리자.”

[하아, 아빠. 그러지 마. 그 딸 이야기 못 들었어? 부자들이 돈을 써야 경제가 돌아가는 거야.]

부우욱-.

나는 얼른 내 선물이 든 포장지를 찢어버렸다. 돌려줄 수 없게.

아빠가 놀란 눈으로 얼른 내 손을 탁 잡아 세웠다.

“성국아, 안 돼.”

하지만 나는 이미 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마저 쇼핑백을 뜯었다.

부우욱-.

“진짜, 전성국 요즘 너무 말 안 듣지 않아?”

[여덟 살이 말을 들으면 이상한 거야, 아빠.]

나는 얼른 포장마저 뜯고 선물을 열어봤다.

아동용 백팩이었다. 백팩을 열자 각종 옷들이 나왔다.

[역시 취향이 고급지네.]

나는 흡족한 얼굴로 옷을 들고 이리저리 맞춰봤다.

“밍구기 꼬. 밍구기 꼬.”

민국이도 이미 말릴 사이도 없이 선물 포장지를 찢어버렸다. 민국이 선물도 나랑 비슷한 거였다.

잠시 후에 온 김미영은 나 대신 이 브랜드에 대해서 잘 알려줬다.

“와, 역시 회장님 댁이시네요.”

“언니, 여기 엄청 유명한 데예요?”

“당연히 유명하고. 비싸서 더 유명한 브랜드예요.”

“지갑 이거, 하나에 얼마예요?”

“모르고 들어요.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거예요.”

아빠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 지갑에 3만 원 이상 넣고 다니지도 않는데, 지갑 잃어버리면 지갑만 훔쳐 가겠는데요.”

“아마 그럴 거예요. 성국이 이 복덩이는 정말 아주 여기저기서 사랑을 받네.”

[당연하지, 나 전성국이야.]

나는 배시시 웃었다. 그러곤 가방을 메어봤다.

엄마와 아빠가 사준 백팩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큰 로봇이 그려져 있어서 영 내 취향은 아니었다.

[이건 내 취향이긴 한데… 엄마, 아빠가 서운해하겠지?]

“성국아, 잘 어울린다.”

“진짜?”

“성국이는 이런 비싼 게 척척 어울리네. 나 닮았나 봐, 소영아.”

“치, 나도 비싼 거 잘 어울려. 없어서 못 하는 거지.”

엄마와 아빠는 유치하게 또 티격태격했다.

나는 민국이에게 백팩을 메어주고는 얼른 거울 앞에 민국이를 데리고 가서 섰다.

“형아, 나 쫌 멋지지?”

“멋진 건 형아지. 너는 좀 귀엽네.”

[잠깐, 지금 내가 뭐라고 한 거지? 이 녀석이 귀엽다는 것을 인정한 건가….]

민국이는 내 손을 꼭 쥐었다.

“형아, 쪼아.”

살다 보니 이런 타이밍도 오는 거였다.

경쟁자 녀석에게 빈틈을 내어줄 타이밍도.

이젠 나도 내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형도 민국이 쪼아.”

“와아!”

민국이가 나를 꼭 껴안았다.

* * *

홍콩에서 특급 배송되어온 데미안 허스키의 판화가 내 방에 걸렸다.

엄마와 아빠는 너무 어둡다고 반대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이게 얼마짜리가 되는데….]

하지만 팔 생각은 없었다.

선물은 원래 파는 게 아니다. 간직하는 거지.

“성국아, 어서 아침밥 먹고 학교 가야지.”

“네에!”

나는 얼른 후다닥 뛰어나갔다. 등에는 구수영 회장 부인이 선물한 백팩을 멨다.

* * *

3월의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고요할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맨 뒷자리인 내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최정우란 녀석이 나를 힐끔 보는 게 느껴졌다.

키는 비슷했는데, 살이 쪄서 덩치가 더 좋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성국아, 여행 다녀왔어?”

“응. 홍콩 다녀왔어.”

내가 이 말을 내뱉자마자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나를 중심으로 모두 꽃받침을 한 채 뭐라도 질문을 던졌다.

“성국아, 놀이동산 갔어?”

“응.”

“성국아, 홍콩 재미있어?”

“난 별로. 딤섬은 좋았어.”

이런 허접한 대화 내용이 진행되는 가운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자, 다들 자리에 앉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자리로 흩어졌다.

[겨우 살았네.]

“자, 1교시 수업 시작할게. 다들 교과서 펴자!”

선생님의 말에 따라서 책을 폈지만, 나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걸 나보고 하라고?]

선생님은 애들을 한 명 한 명 돌면서 덧셈을 확인했다.

나는 애저녁에 다 끝내놓고 다음 페이지, 그다음 페이지에 그다음 페이지까지 풀었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약간 기분 나쁜 어투로 말했다.

“성국아, 지금 거기 하는 거 아니지. 여기 풀어야지.”

나는 푼 페이지를 보여줬다.

“다 풀어도, 다음 페이지는 친구들이랑 같이 나가야지. 앞으로는 그러지 마.”

“네.”

나는 맥없이 대답했다.

[하아, 어서 검정고시 봐야겠어.]

내가 한숨을 쉬는 사이에 옆자리에 앉은 최정우는 문제를 열심히 풀었다. 좀 낑낑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최정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새우깡이 세 개가 있어. 그리고 새우깡이 일곱 개가 더 있는 거야. 그럼 몇 개야?”

“여, 열 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정우가 빙긋이 웃으며 고마워했다.

쉬는 시간에 최정우는 나에게 가방에서 싸온 과자를 나눠주기도 했다.

“성국아, 아까 고마웠어.”

[녀석, 은혜를 갚을 줄 아는군.]

나는 과자를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

최정우는 배시시 웃으며 과자를 먹었다. 살이 쪄서 그렇지 이목구비는 꽤 괜찮았다.

나는 얼른 과자를 쏙 입에 넣었다.

수업이 다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가정통신문을 돌렸다.

“2주 후에 공개수업 있으니까, 시간 되시는 부모님들은 모두 참석하시라고 그래. 선생님이랑 그날 면담도 하고 그러면 좋을 거야.”

“네에!”

나는 백팩을 메고 일어섰다.

최정우가 나에게 오더니 조용히 물었다.

“성국아, 오늘 뭐 해?”

[나 할 일 많아. 주식 좀 봐야 하는데.]

“공부해야지, 왜?”

“같이 공부할래?”

[너랑 나랑 하는 공부가 다른데….]

나는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생에 평범한 친구 한 명쯤 사귀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집 갈래?”

정우가 먼저 제안을 했다.

“그래.”

[서민들 사는 것 좀 구경해보지, 뭐.]

* * *

정우의 집은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가장 큰 평수였다. 60평이 넘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여기가 너희 집이야?”

“응.”

정우는 쑥스러운 듯 대답했다.

이미 난 집 안 구석구석을 보고 있었다.

[전성국, 없는 거 티 내는 거야?]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구석구석 놓인 미술품들도 진품이었다. 거기다 내가 아는 작가들이었다!

안에서 최정우의 엄마가 우리를 반겼다.

“정우야, 친구 데리고 온 거야?”

“엄마, 성국이.”

“어머, 얘는….”

[네, 맞습니다. 제가 그 유명한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에 나온 그 전성국입니다.]

정우 어머니는 반색을 했다.

“어머, TV 나온 애 맞지?”

“정우야. 왜 말을 안 했어.”

“난 모르는데….”

나랑 같이 기어 다니던 놈이 TV를 제대로 봤을 리가 없을 것이다.

“엄마, 우리 간식. 성국이가 오늘 나 산수 가르쳐줬어.”

“진짜? 정말 고마운 친구네. 성국아, 어머니한테는 우리 집에 온다고 이야기했지?”

“네. 저희 아빠가 여기서 보쌈집 하세요. 말씀드리고 왔어요.”

나는 아빠 가게에 잠시 들러서 정우를 인사시켰다.

“보쌈집? 어디?”

“원아저씨 보쌈이요.”

“어머, 그 집 맛있어서 나도 자주 시켜 먹는데, 아버지가 하시는구나.”

“네에!”

“잠시만 기다려. 아줌마가 간식 챙겨올게. 정우야, 손 닦고 네 방으로 가.”

“응. 엄마.”

정우란 녀석도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게 분명해 보였다.

정우의 방은 안방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푸른 계열로 맞춘 방에는 딱 봐도 좋아 보이는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성국아, 너 TV 나왔어?”

“이젠 안 나와.”

“와, 부럽다.”

“뭐가 부러워. 일한 건데.”

“난 연예인이 꿈이야.”

정우는 수줍게 말을 꺼냈다.

아직은 살이 쪄서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보니 인물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연예인도 많잖아. 가수도 있고. 탤런트도 있고.”

“난 가수. 랩 하는 가수가 되고 싶어.”

정우의 방 한구석에는 피아노도 놓여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피아노 앞으로 갔다.

“나, 쳐봐도 돼?”

“응.”

나는 얼른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능숙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우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피아노 진짜 잘 친다.”

동시에 문이 달칵 열리면서 정우 어머니가 간식을 들고 들어왔다.

“어머, 성국아! 너 피아노도 치니?”

“네.”

나는 잠시 피아노를 멈췄다.

정우 어머니가 가져온 간식은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과자들이었다.

“성국아, 이거 먹어.”

“감사합니다.”

내가 배꼽 인사를 하자 정우 어머니는 흡족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정우랑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성국아, 자주 놀러 와.”

“네에!”

정우 어머니가 나가고 난 뒤에 나는 정우의 눈높이에 맞춰서 놀아주느라 기진맥진했다.

[역시 초딩은 재미없어.]

정우는 은근 눈치가 빨랐다.

“성국아, 재미없어?”

“정우야, 난 공부가 좋아.”

“공부가 진짜 좋아? 나는 영어 선생님이 제일 싫어.”

“난 공부하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같이 공부할래?”

“그, 그게….”

정우는 당황하더니 다시 대답했다.

“그래, 공부하자. 엄마한테도 말해야겠다.”

정우는 문을 열고 나가더니 엄마에게 성국이랑 이제 같이 공부할 거라고 종알종알 말하는 게 들렸다.

집에 가면 놀아달라는 민국이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는 조용히 간식 먹으면서 편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국아, 엄마가 맨날 와도 괜찮대.”

[역시, 공부하겠다는 자식 싫어하는 집은 우리 집밖에는 없다니까.]

“정우야, 우리 공부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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