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엄마, 나 학교 끝나고 정우네서 공부하고 올게.”
나는 책가방을 메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성국아, 정우네 맨날 가면 정우 엄마 싫어하실지 몰라. 아무래도 내가 전화 한번 해봐야겠다. 정우 어머니 전화번호 가지고 와.”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정우 어머니는 오히려 과외도 맨날 안 받으려던 정우가 나와 함께하니 과외도 열심히 받고, 책도 잘 본다고 엄청 좋아하셨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나는 정우에게 산수도 알려주고, 맞춤법도 알려줬다.
나는 얼른 가방에 벽돌 무게의 노트북을 넣고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성국아, 전화번호 꼭 가지고 와.”
“네에!”
나는 얼른 대답을 하고는 학교로 향했다.
정우 덕분에 지겹던 학교가 조금은 덜 지루해졌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학교는 여전히 지루했고, 선생은 여전히 답답했지만 정우와 운동장을 뛰어노는 게 신이 났다.
친구가 생긴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예전에는 몸 쓰며 운동하는 것도 좋아했는데, 이번 생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쉬는 시간이면 남아도는 체력을 정우와 함께 권투나 달리기로 소진했다.
그러곤 넓고 아늑한 정우네 집에 가서 노트북으로 부족한 공부를 했다.
정우가 영어 과외 할 때는 선생님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시간 보내는 것도 좋았다.
정우네 영어 과외를 오는 올리버는 미국 대학도 다니다 말았지만, 한국에서는 영어만 잘하면 일을 구할 수 있어서 미국에서보다 더 돈을 잘 번다고 떠벌렸다.
물론 정우는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면 눈만 끔뻑였다.
나는 언제나, 올리버가 이상한 짓을 하거나 마약을 소지했으면 신고할 생각으로 감시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우는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거 같아. 영어가 안 늘어.”
올리버가 나에게 영어로 말했다.
[물주를 몰라보다니. 이렇게 멍청한 인간이 있나.]
나는 얼른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영어로 답했다.
“올리버, 영어를 못 하니까 배우는 거지. 정우가 영어를 잘하면, 네가 돈을 벌 이유도 없는 거잖아. 그리고 올리버 너.”
“어….”
올리버는 조금 쫀 모습이었다.
“올리버, 너 한국말은 잘해?”
“그게… 나는 영어 강사잖아.”
“영어 강사지만,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도 못 하면서 한국에 살면서 영어 배우는 우리를 욕할 처지는 아닐 텐데.”
나는 따끔하게 이야기했다.
“미안….”
“올리버, 난 천재니까 영어를 잘하는 거고, 정우는 평범한 아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정우 무시하지 말고 잘 가르쳐. 내가 지켜볼 거야. 돈은 정우 엄마가 주는 거고, 정우 엄마는 나를 엄청 믿고 계시거든.”
“알았어.”
올리버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정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정우는 조금 느릴 뿐이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올리버의 관심에 정우도 오늘따라 영어에 관심을 더 기울였다.
* * *
올리버가 간 이후에 정우 어머니는 각종 간식을 가져다주셨다.
재벌 시절일 때보다야 못하지만, 중산층 가정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간식이었다.
[어디 먹어볼까.]
내가 몸을 기울이자, 정우가 배시시 웃으며 초콜릿을 건넸다.
“성국아. 이거. 이거 정말 맛있어.”
정우가 내민 것은 삼전 호텔에서나 파는 초콜릿이었다.
[뭐지? 이 녀석은.]
나는 한번 정우를 테스트하기로 했다.
“정우야, 진짜 나 이거 먹어도 돼?”
“응. 이게 제일 맛있는 거야.”
“이거 딱 하나잖아. 너 먹어.”
“아니야. 넌 내 친구잖아.”
뭉클.
[뭐지? 이 녀석.]
순간 심장이 꿀렁거렸다.
친구라는 말을 이번 생에서 듣게 될 줄 몰랐다. 삼전 유치원에서 만난 동기들이야 어릴 적부터 이해관계가 너무나 분명했다.
부모의 서열이 곧 친구들 사이에도 서열로 정해졌다. 흙수저인 나는 그곳에서 피라미드 맨 아래층이었다.
나는 정우가 건넨 초콜릿을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정우를 올려다봤다.
“정우야.”
“응, 성국아.”
“앞으로는 좋아한다고 너무 마음 주지 마.”
“왜?”
“원래 더 좋아하는 쪽이 손해 보는 법이야.”
“손해? 그게 무슨 말이야?”
“흠… 손해란 말이야. 더 많이 잃는다는 거야.”
정우는 내 말에 방긋 웃었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좋아하니까, 더 많이 잃어주는 거지. 성국이가 먹는 게 나는 조아. 난 이거 먹을게.”
정우는 맛없는 과자 하나를 집었다.
나는 멈칫했다.
단 한 번도 손해 보는 삶을 살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재벌 시절에 나는 언제나 손해 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친구도,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란 이런 건가….]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정우는 나를 보더니 손에서 초콜릿을 가져가 까서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어서 먹어.”
“…응.”
나는 초콜릿을 목으로 넘겼다. 맛있었다.
내가 초콜릿을 먹자, 정우도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정우 이 녀석, 오래 두고 봐도 괜찮을 것 같네.]
확실히 삼전 유치원에서 만난 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때, 방문이 열리면서 정우 어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성국아, 저녁 먹고 갈 거지?”
“네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줌마가 맛있는 거 준비했어.”
[앗, 엄마가 번호 알아오라고 했는데….]
나는 얼른 일어나서 정우 어머니에게 걸어갔다.
“저희 엄마가 매번 미안하다고 인사드린다고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하셨어요.”
“어머, 성국이는 어쩜 말을 이렇게 또박또박해. 난 우리 정우랑 성국이가 놀아줘서 더 고마운데.”
정우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 이번 생에서 어른들은 나만 보면 머리를 쓰다듬는구나.]
이미 체념한 채 나는 머리를 맡겼다.
정우 어머니는 곧 전화번호를 적더니 내게 내밀었다.
“이거 전해드리고. 나는 성국이가 정우 친구가 되어줘서 너무 고마워. 정우가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집에 안 데리고 왔거든.”
“엄마, 그만! 창피해.”
정우는 얼른 엄마 품에 안기더니 애교를 부렸다.
“성국아,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 아줌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네에!”
나는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 * *
나는 교실 문을 요란하게 열고 들어갔다.
내 행동은 정말 여덟 살 또래 남학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근데 정우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정우는 언제나 나보다 일찍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상하네. 어디 아픈가….]
걱정하는 마음도 들었다.
종이 울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올 때까지도 정우는 오지 않았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선생님에게 물어봤다.
“선생님, 정우 학교 안 왔어요?”
“그게…. 정우가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됐단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는 이해가 안 됐다.
분명 토요일에 헤어질 때, 월요일에 보자고 했는데….
그때까지 전학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내 곁으로 오더니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이가 정우랑 친했지?”
“네에….”
나는 힘없이 대답했다.
정우가 없는 학교생활은 지옥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다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기 싫었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입을 앙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벽돌 노트북이 든 가방을 메고 정우네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때, 정우네 집에서 사다리차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분명 정우네였다.
정우네 집 가구며, 정우네 집 가전이며, 모든 게 정우네 집 물건이었다.
나는 사다리차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1층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나오는 정우가 보였다.
정우의 어머니는 얼굴 반 이상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보통 철의 여인은 자신의 얼굴에 성형이나 시술 자국을 가리기 위해서 선글라스를 썼다.
[정우 어머니도 뭔가 가릴 게 있나.]
이때, 나를 본 정우가 달려왔다.
“성국아!”
“정우야, 오늘 왜 학교 안 왔어?”
“성국아, 나 전학 가.”
“토요일에도 말 없었잖아.”
“그게….”
정우 어머니가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우리도 갑자기 정해진 거라 정우가 미처 말 못 한 거야.”
“정우, 어디로 이사 가요? 멀리 가요?”
“그게….”
정우 어머니는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때, 정우 아버지가 다급한 얼굴로 나왔다.
정우 아버지는 작은 무역 회사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정우야. 엄마랑 어서 차에 타.”
“정우, 지금 친구랑 인사하잖아요.”
정우 어머니는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선글라스 사이로 보인 정우 어머니의 눈은 펑펑 운 다음 날처럼 부풀어 있었다.
“정우야, 빨리 인사해. 시간 없어. 지체하면 또 그 인간들 올 거라고.”
정우 어머니는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정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우야, 빨리 인사하자. 너도 그 아저씨들 다시 보기 싫지?”
“응.”
정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성국아, 그동안 고마웠어.”
“무슨 소리야. 내가 고마웠지.”
이건 진심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교에서 유일하게 같이 뛰어논 친구였고 정우네 집에서 편하게 공부도 많이 했다. 그런데 이 행복이 깨지다니….
그리고 대충 이 집안의 상태를 보니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도망가는 것 같았다.
정우 아버지는 뒤에서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고, 정우 어머니는 선글라스 아래로 흐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닦아냈다.
[잘살다가 망하면 더 힘들 텐데….]
난 내 인생의 첫 친구인 정우가 걱정됐다.
정우는 붉어진 눈시울로 노트와 펜을 내밀었다.
“성국아, 너희 집 전화번호 적어줘. 이사 가서 연락할게.”
나는 얼른 집 전화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정우야, 전화번호 잊어버리면 우리 아빠 상호 알지?”
“응. 원아저씨 보쌈.”
“거기로 전화해.”
“응. 알았어, 성국아.”
담배를 다 피운 정우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만 가자.”
정우 어머니도 이제 재촉했다.
“정우야, 가자.”
정우는 끝내 눈물을 터트렸고, 나도 조금은 슬펐다.
“성국아, 안녕. 나 꼭 연락할게.”
정우는 다시 연락 못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게 내 인생 첫 친구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나는 얼른 정우에게 가서 정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우야, 만약 네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싶으면 나한테 꼭 연락해.”
정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최정우, 아빠 간다!”
“아빠, 같이 가.”
정우는 그제야 차에 올라탔다.
정우 아버지 차는 빠르게 아파트를 빠져나갔고, 이삿짐 차도 그 뒤를 이었다.
내 시야에서 정우의 차가 사라졌다.
그리고 내 인생 첫 친구가 사라졌다.
* * *
퇴근을 한 아빠가 침대에 드러누운 나를 보더니 걱정스레 엄마에게 물었다.
“성국이가 오늘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성국이 친구 있잖아. 정우가 오늘 전학 갔대.”
“갑자기?”
“알아보니까, 정우 아버지 사업이 안 좋아졌나 봐. 일요일에 빚쟁이들이 와서 난리가 난 모양이야.”
“그렇다고 순식간에 이사 간 거야?”
“응. 그래서 성국이가 상심이 커.”
나는 그 이야기를 뜬눈으로 모두 들었다.
이번 생에서 친구가, 그것도 또래의 친구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두 내게 관심을 보였지만, 어울려서 즐거운 친구도 없었다.
정우도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모자라고 유치했지만, 그래도 함께 놀 때는 즐거웠다. 정우 취향에 맞춰주느라 자동차 놀이나 레고도 했지만, 정우네 집에서 같이 공부하던 때도 좋았다.
나는 몸을 뒤척였다.
거기다 마음을 연 최초의 친구와 갑자기 이별해서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민국아, 가지 마.”
[오늘은 민국이랑 놀아줄 마음이 아닌데.]
민국이가 문을 열고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민국이는 침대로 기어 올라오더니 내 등 뒤에서 나를 꼭 안았다.
“형아, 슬포?”
“응.”
“왜?”
“친구가 사라졌어.”
“밍구기가 있자나. 밍구기는 안 사라져.”
[거짓말. 너도 커서 여자 만나고 그러면 다 내 곁에서 떠나갈 거야.]
순간, 울음이 쏟아졌다.
“흑. 흑. 흑.”
나는 침대에 얼굴을 박고 울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가 다가와 나를 꼭 안았다.
“성국아, 울지 마.”
그렇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는 더 서럽게 울었다.
“흐아아앙. 흐아아앙.”
“성국아, 그래. 울어. 펑펑. 친구랑 헤어졌는데 얼마나 슬프겠어.”
아빠가 내 등을 도닥였다.
나는 그렇게 인생 첫 친구와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