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72화 (72/231)

제72화

아빠가 내 머리를 헝클었다.

“녀석 단호하긴. 성국아, 그건 네 주식이니까 마음대로 해. 나중에 손해 봤다고 아빠한테 손 벌리기 없기다.”

“그럴 일 없어.”

나는 담담히 말했다.

삼전 주식은 쇠똥구리가 굴리는 똥과 같다.

계속 굴러가며 커질 것이다.

* * *

1999년 새해가 밝았다.

유학 절차는 거의 다 끝났고, 이제 출국만 하면 된다.

가족들이 지희의 백일은 같이 보내기를 원해서 지희의 백일 이후로 출국일을 늦췄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따뜻한 우유 한 잔을 하며 노트북으로 주식과 세계 뉴스를 검색했다.

아직 IMF를 극복할 시기는 당연히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경기는 살아나고 있었다.

‘흠…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세계 멸망의 해가 올해인가….’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TV를 틀 때마다 각종 예능이나 광고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우유가 없네.’

나는 우유 잔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아빠가 막 욕실에서 나왔다.

“성국아, 우유 더 줘?”

“응, 아빠.”

아빠는 <원아저씨 보쌈>의 도시락과 족발 술안주 발매 이후 가게까지 덩달아 매출이 상승하는 바람에 아침 일찍부터 가게에 나갔다.

아르바이트생까지 두 명을 뒀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자, 여기.”

“감사합니다.”

아빠는 방긋 웃고는 로션을 발랐다.

“성국아,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휴가 때 꼭 너 보러 미국 갈게. 좋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이 이제 다 컸다고 아빠한테 뽀뽀도 안 해줄 거야?”

[아빠, 난 원래 태어날 때부터 마흔 살이었다고.]

하지만 예의상이라는 게 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예의상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얼른 아빠 뺨에 뽀뽀를 날렸다.

쪽. 쪽. 쪽. 쪽. 쪽.

“알았어, 이 녀석아. 그만해도 돼.”

아빠는 유쾌하게 웃으며 셔츠를 입었다.

엄마가 지희를 안고 안방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민국이 아직도 자?”

“응, 다들 조용히 좀 해.”

[민국이 이 녀석. 일곱 살이나 먹었으면 아침에 빠딱빠딱 일어나야지.]

이리저리 봐도 모자란 민국이 녀석을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성국아, 지희 좀 봐줄래? 엄마가 얼른 아빠랑 네 아침 차릴게.”

엄마는 지희를 바닥에 눕혔다.

지희는 민국이보다도 얌전했다.

눕혀놓으면 눕혀놓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지희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지희야, 넌 대체 누굴 닮은 거야?]

나는 완벽하게 엄마, 아빠의 장점만 닮았다. 민국이도 그럭저럭 봐줄 만은 했다. 하지만 지희는 엄마, 아빠가 가진 단점만 그대로 닮았다.

엄마의 짱구 이마. 아빠의 사각 턱.

지희의 미래 플랜은 아무래도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해 보였다.

[머리는 똑똑한가?]

나는 얼른 지희 옆에 앉아서 동화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희는 그저 몸만 바동거릴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희를 내려다봤다.

[전지희. 도대체 너, 뭐 먹고 살래?]

히죽히죽.

[웃긴. 오빠님이 말씀하시잖아.]

히죽히죽.

[오빠 백일 때는 이미 뭐 먹고 살지 걱정했단 말이야.]

히죽히죽.

[말을 말자.]

나는 동화책을 덮어버렸다.

* * *

“어, 언니. 성국이한테 말해볼게.”

밥을 먹던 엄마가 전화를 끊더니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했던 거 기억나?”

“응. ‘저스트’랑 같이 했잖아.”

“와, 우리 성국이는 정말 머리가 천재인가 봐.”

“엄마가 맨날 말하자나. 그건 왜?”

“이번에 방송국에서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그 후’로 너랑 촬영을 하고 싶대. 그 감독님이 이제 곧 우리 기획사에서 하는 작품 감독도 하시잖아. 이야기하다가 의견이 나왔는데, 방송국도 좋다고 하고 ‘저스트’도 스케줄을 빼본다고 했대.”

‘저스트’는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이후 대박 그룹이 되었다.

특히 내가 선곡해준 <거짓이야>라는 곡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곡이다.

마이클이라는 건방진 놈도 빠지고, 선한 영향력을 주는 아이돌 그룹이 되어서 팬덤도 대단했다.

“엄마, 출연료는?”

아빠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이 녀석. 어린 게 그렇게 돈 밝히면 안 된다고 아빠가 그랬잖아.”

“경제관념이 밝은 거야.”

나는 이제 서서히 속마음을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암튼 성국이, 말로는 이길 수가 없어.”

“성국아, 이 프로그램 하고 가는 게 어떨까? 엄마 생각에는 성국이가 공부하러 가기 전에 찍고 가면 우리 가족들이 성국이 그리울 때마다 이 영상 보면 될 것 같아서 해봤으면 좋겠어.”

“우선 미팅부터 해볼래.”

“그래, 이따 오후에 감독님이 사무실로 온다니까 같이 가보자.”

“응!”

* * *

“성국아, 이게 얼마 만이야.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안녕하세요, 감독님.”

“나 기억나?”

“잘은 안 나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내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두 돌쯤 만난 사람을 여덟 살에 기억하는 아이는 많지 않았다.

“이 녀석,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나도 기억 못 하고. 서운한데.”

“죄송합니다.”

“와, 말도 못 했는데… 이제 말도 잘하고. 영어랑 프랑스어도 잘한다며?”

“네.”

감독은 몇 년 사이에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모자로 대충 가리고 있었지만, 이마가 넓어졌다.

“참, 김 대표가 그러던데. 성국아, 네가 요리 경연 프로그램 아이디어 냈다며?”

“아빠가 하시는 것 보니까 재미있어서요.”

“성국아, 네 기획으로 우리가 이번에 프로그램 계획 중이야. 잘되면 기획에 네 이름 올라갈 거야.”

[저작권 좀 챙기는 건가….]

나는 방긋이 웃었다.

“감사해요.”

돈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았다.

이제 돈 이야기를 하면 마냥 순순해 보이지만은 않은 나이가 됐다.

“감독님, 커피 한 잔 하시면서 이야기하세요. 성국이 오자마자 쉴 새 없이 말씀하신다는 거 아세요?”

김미영이 요령 있게 감독을 내게서 떼 갔다.

[겨우 한숨 돌렸네.]

어릴 적에야 말도 못 하고, 발음도 어눌하니 속으로 이런저런 말을 내뱉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말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불쑥불쑥 내뱉던 속마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성국아, 이제 같이 회의할까?”

“네!”

나는 얼른 회의실로 들어갔다.

“성국이는 우유.”

김미영 대표가 우유를 내밀었다.

엄마는 얼른 커피를 감독과 스태프 몇 명에게 돌렸다.

“감독님, 정말 너무 오랜만에 뵈어요.”

“성국이 동생이 또 태어났다면서요?”

“네, 곧 백일이에요.”

“그 녀석도 정말 한 인물 하겠네요.”

“딸이에요. 아직 백일이라 잘 모르겠어요, 저희는.”

그 말인즉슨, 지희의 인물은 나와 민국이. 즉, 우리와 비교할 게 아니란 말이었다.

감독은 커피를 마시며 기획안을 몇 개 돌렸다.

“이번에 성국이랑 ‘저스트’의 재회편 한번 보세요.”

스태프들과 김미영, 엄마와 나는 감독이 돌린 기획안을 얼른 훑었다.

이야기는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7년 후’라는 콘셉트이었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그룹 저스트. 그리고 겨우 두 돌에 가까워진 나의 7년 후 삶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쫓는 이야기였다.

‘저스트’는 대한민국의 국민 아이돌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계약 기간이 끝나고 범선을 비롯한 몇 명의 멤버들이 다른 기획사로 이적했다. 일반적인 보이 밴드의 해체 수순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나에 대한 이야기는 간략했다. 어린 나이에 천애 고아가 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나는 뛰어난 외모와 재능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종종 모델 활동을 하던 중에 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그사이에 나는 천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언어와 각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효진 그룹의 준호 재단 첫 후원자로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한 사람이 있었다.

“감독님, 마이클은요?”

“마이클? 성국아, 너 마이클은 기억하니?”

아차.

하지만 이럴 때는 태연하게 대처하면 된다.

“비디오테이프 봤어요.”

“역시 천재는 비범하네. 마이클 뭐 하지?”

감독이 스태프 중 한 명을 쳐다봤다. 구성 작가인 듯 보였다.

“저희도 안 그래도 수소문했는데요.”

“뭔 사고 친 건 아니지?”

“자잘한 사고는 쳤고요. 다행히 얼마 전부터 이태원에서 미국식 수제 버거집 운영하고 있어요. 나름 평가도 좋네요.”

“마음 잡았나 보네.”

“결혼도 했어요.”

마이클의 인생은 저번 생에서 지켜본 것과는 조금 달라졌다.

일찍 ‘저스트’를 탈퇴하고 우여곡절을 겪고 사람이 됐나 보다.

“감독님, 마이클 만나고 싶어요.”

“성국아, 진심이야?”

“네. 옛날 비디오 보니까 마이클이랑 저랑 맨날 싸워서요. 애기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사과하고 싶어요.”

“저희가 종종 옛날 비디오 애들한테 보여 주거든요.”

엄마가 설명을 해줬다.

“성국아, 네가 사과할 일은 없어. 마이클이 다 너 괴롭힌 거야.”

[감독, 알지. 나 다 기억한다고. 근데 그렇게 하면 프로그램이 되겠어, 어디.]

“저도 마이클 괴롭힌 거 같아요.”

나는 그저 방긋 웃었다.

감독은 볼펜으로 머리를 슥슥 긁더니 구성 작가를 쳐다봤다.

“마이클과 성국이의 화해의 장 같은 거 만들어볼까? 그 김에 다른 멤버들과의 화해의 장 같은 것도 만들고. 어때?”

“괜찮은데요. 근데 마이클이 하려고 할까요?”

“이태원에서 수제 버거집 한다며. 요즘 경기 어려운데 방송 나오면 광고도 되고 좋지. ‘저스트’ 멤버들도 결국 다 찢어진 건데, 지들 광고할 수 있다니까 다 나온다는 거 아니야.”

“한번 접촉해 볼게요.”

“성국이 덕분에 아이템 하나 건졌네.”

감독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 *

“아기 바구니와 다섯 남자 7년 후요?”

“네, 마이클 씨.”

구성 작가는 진땀을 빼고 있었다.

이태원의 수제 버거집을 운영한다는 마이클의 성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제가 그 프로 때문에 얼마나 욕을 먹었는데요. 나가고 싶겠어요? 더군다나 사생활까지 밝혀져서 그룹에서도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왔잖아요.”

“그래서요. 그룹 멤버들과 화해의 장, 이런 거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저 나가도 한 명도 안부 전화 한 통 없었어요.”

마이클은 수제 버거의 패티를 뒤집으며 투덜거렸다.

“그런 오해, 서로 풀어보자는 거죠.”

“됐어요. 장사도 안 되는데 귀찮게 마시고 가세요.”

“그러니까 더 나오셔야죠.”

마이클이 구성 작가를 쳐다봤다.

“장사 어렵잖아요. 저희 콘셉트가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7년 후잖아요. 다큐식으로 그간의 여정과 지금 삶의 모습을 따라갈 거거든요. 그럼 이 가게. 마이클 씨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등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죠. 광고 효과도 분명 톡톡히 얻으실 거예요. 어떠세요?”

마이클은 패티를 뒤집다 말고 구성 작가를 쳐다봤다.

“좋아요. 하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이거 하나 드셔보세요.”

구성 작가는 마이클이 내민 수제 버거를 한 입 깨물었다.

육즙이 촉촉하게 배어 나오는 것이 맛이 꽤 괜찮았다.

“맛있네요.”

“그쵸?”

“저희 가게에 ‘저스트’ 멤버들 다 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대로 홍보되죠. 대충 저만 찍고 가는 거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요. 홍보하려고 나온 거요. 그렇게만 해주시면 전 좋아요.”

마이클은 막 타들어가는 패티를 뒤집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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