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달칵.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저스트’ 멤버들이 들어왔다.
여전히 친한지 리더인 태형과 근육돌 루카스, 꽃미남 재현이 같이 들어왔다.
“성국아! 성국이 맞아?”
“네! 전성국입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낯선 얼굴로 배꼽 인사를 했다.
두 돌 무렵 본 아이돌을 기억하는 건 오버이기 때문이다.
“와, 성국아! 우리 기억나?”
“잘은 안 나요.”
[안 나긴, 다 기억하고 있어. 근데 범선이는 왜 안 보여?]
달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범선이 긴 머리로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태형이 범선에게 인사를 했다.
루카스와 재현은 범선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해체 이후에 혼자만 다른 기획사와 계약을 한 범선이 때문에 다들 좀 감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저스트’의 인기는 범선이 끌고 간 부분도 많았다.
나는 얼른 범선에게 인사를 했다. 깍듯하게. 배꼽 인사.
“안녕하세요. 전성국입니다.”
“성국아, 와아-. 진짜 언제 이렇게 컸어? 지금 몇 살이지?”
“아홉 살 됐어요.”
“와아-.”
범선은 감탄사만 연신 내뱉었다.
“성국이가 아홉 살이라니. 우리 그만큼 늙은 거지?”
“아니에요. 다 젊어 보이세요.”
내 말에 멤버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도 조금씩 무르익었다.
범선도 그간 멤버들에게 인사를 했고, 준비 중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래도 우리 넷이 같이 활동할 때는 두렵거나 하진 않았는데, 혼자 다 하려니 어렵더라고. 외롭기도 하고….”
“형두. 그러게 왜 연기한다고 해서 사서 고생이야.”
루카스가 기분 나쁘지 않게 툴툴거렸다.
“참, 오늘 마이클도 오나.”
태형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네, 오실 것 같아요. 가게 일 잠시 보고 와야 한다고 좀 전에 조금 늦을 거라고 연락이 왔어요.”
구성 작가가 얼른 대답을 했다.
“마이클이 가게 해요?”
“이태원에서 수제 버거집 해요.”
“진짜 마이클 소식은 하나도 몰랐네요.”
태형은 꽤 미안한 얼굴이었다.
“성국아, 넌 마이클 형 기억나? 너랑 맨날 엄청 싸웠어.”
[당연히 기억하지. 마이클이 나 괴롭힌 건 하나도 안 빼먹고 다 기억하고 있다고.]
나는 속내와 다르게 고개를 저었다.
“잘 기억 안 나요.”
“그래, 기억 안 하는 것도 좋을 거야. 성국아, 근데 넌 자랄수록 어쩜 더 잘생겨지니?”
꽃미남인 재현이 눈웃음을 치며 이야기했다.
“작가님, 성국이 아역 배우나 이런 걸로 아직도 활동하나요?”
“오늘 그 이야기도 하려고요. 먼저 해드리면, 다음 달에 성국이가 미국으로 유학 가거든요.”
“전성국, 출세했네.”
근육돌 루카스가 내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이가 이번 효진 그룹 준호 재단의 첫 장학생이 됐거든요.”
다들 눈이 동그래져 나를 쳐다봤다.
[살면서 장학생 한 번쯤 되는 거 아니야? 다들 공부 못했나 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작가님, 성국이가 장학생으로 뽑힌 거면 공부를 엄청 잘한 거 아니에요?”
“네. 성국이가 영어, 프랑스어는 거의 모국어처럼 하고요. 다른 학업 성취도 뛰어나요. 삼전 그룹도 엄청 탐냈다고 들었어요.”
모두들 나를 다시 쳐다봤다.
[다들 그렇게 쳐다볼 필요 없어. 나 아이큐 고작 121이야. 평범한 편이라고.]
“성국아, 나중에 너 뭐가 될 거야? 박사? 교수?”
[그런 건 시시해서 안 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하고 싶어요.”
그 말에 다들 놀라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정말 남다르구나.”
범선이 놀라는 사이,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이클이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모습으로 들어섰다.
마이클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게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어, 마이클!”
태형이 리더답게 마이클을 먼저 반겼다.
“어… 형.”
마이클은 굳은 인상으로 어색하게 인사했다.
[자식.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구만.]
마이클은 나를 보더니 두툼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성국이구나. 많이 컸네.”
[누가 할 소리. 마이클, 사람은 좀 됐어?]
문이 열리면서 커피와 간단한 스낵을 들고 김미영이 들어왔다.
“이제 다 모이셨네요. 감독님이 사실 다들 인사 먼저 하고 이야기도 나누라고 좀 천천히 오신대요. 그래도 30분 안에는 오실 거예요. 커피 좀 드세요. 성국이는 우유.”
[나도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 한 잔 마시고 싶다고.]
하지만 내 손은 우유를 잡고 있었다.
마이클은 내 우유를 뺏더니 입구를 손으로 열어서 빨대까지 집어넣었다.
“마셔.”
[마이클, 방송 탈 거라고 착한 척 연기하는 거야?]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우유를 쭉 들이켰다.
“마이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이태원에서 수제 버거집 낸 거 맞아?”
리더인 태형이 대표로 마이클에서 물어봤다.
“네, 한 반년 됐어요. 장사도 그럭저럭 돼요. 다른 멤버들 소식은 간간이 연예 뉴스에서 봤어요.”
마이클은 생각 외로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놨다.
“팀 탈퇴하고… 뭐 쫓겨나다시피 한 거지만, 그땐 화도 많이 나고 열도 받고 그래서 나쁜 일도 좀 하고….”
마이클은 ‘저스트’ 탈퇴 후 다른 그룹을 만들었지만, 곧 대마초를 피우는 바람에 그 팀마저 해체됐다.
“암튼 다시 미국 가서 이 일 저 일 기웃거려 봤는데, 하고 싶은 것도 뭐, 그렇더라고요. 그 와중에 동네 수제 버거집에서 아르바이트했는데, 요리가 재미있어서 이것저것 하다가 이 길로 들어서게 됐어요.”
“네 길 잘 찾았구나.”
태형이 마이클을 도닥였다.
“우리도 우여곡절 많았어. 잘나갈 때야 서로 정신없었고, 해체하기 전에는 서로 의견도 갈리고 싸우기도 많이 하고… 성국이 있는데 이런 이야기 해도 되나 몰라.”
나는 괜히 손바닥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이 녀석, 완전 여우네.”
태형은 유쾌하게 웃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나랑 루카스, 재현이는 지금 소속사에 계속 남아서 개인 음반이나 활동 할 거 같아. 범선이는 이번에 영화 들어가.”
“다들 제 갈 길 잘 가시네요. 성국아, 넌 초등학생이지?”
“성국이 효진 그룹 장학재단에서 후원해서 미국에 유학 간대. 성국이 알고 보니까 천재였더라고.”
“그래서 너, 나 쫓겨나게 만들었구나?”
마이클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회의실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실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이클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앙숙으로 관계 설정이 된 마이클과 나는 꽤 인기 있는 조합이었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았고, 감독과 작가도 계속해서 우리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그 시절 마이클은 싸가지 없기로는 내 전생에 비할 수가 없었고,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마이클의 실수를 부각시켜 그대로 아웃시켜 버렸다.
범선이 마이클을 말렸다.
“야, 두 살짜리가 뭘 알았겠어. 그만해.”
“아니. 난 얘가 두 살이 아니라 꼭 마흔쯤 먹은 아저씨 같았다니까. 암튼 그랬다고.”
“다 네가 그 일로 안 풀려서 그런 거지, 애가 뭘 안다고 그래.”
“암튼 나도 다 잊었어요.”
나는 모른 척 우유를 쪽 마셨다.
* * *
첫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가 나를 쫓아다니며 하루를 찍는 거였다.
나는 평소대로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는 엄마가 따라주는 우유를 가지고 방으로 가서 노트북으로 증시 상황과 세계 뉴스를 검색했다.
옆에 있던 작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성국아, 다 영어고 간혹 프랑스어 독일어도 있는데 다 해석 가능해?”
“네.”
나는 기사 몇 개를 클릭해서 내용을 전반적으로 알려줬다.
오전 내내 카메라는 효진 그룹에서 제공하는 영재교육을 받는 내 모습을 담았고 담당 선생님들의 인터뷰를 땄다.
대부분 이 나이의 아이에게 있어서 굉장히 특별한 재능이고, 성국이가 일반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이유가 이거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엔 카메라가 나를 메인으로 잡았다.
질문은 간단했다.
“성국아, 미국 가서 공부해서 뭐가 되고 싶어?”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이끌어 나가고 싶어요.”
“다시 배우 할 생각이야?”
“아니요. 좋은 가수와 배우들을 키우고 싶어요.”
나는 배시시 웃었다.
“컷!”
감독님의 사인 소리가 크게 울렸다.
* * *
[여기가 마이클이 하는 햄버거 가게구나.]
마이클이 하는 가게는 생각보다 협소했다.
대형 철판이 전면부에 있었고,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는 네 군데뿐이었다. 대부분 포장 손님들인 것 같았다.
나는 마이클에게 사온 금전수 화분을 내밀었다.
“돈 많이 버는 나무래요.”
“네가 산 거야, 성국아?”
“네!”
마이클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자막에는 ‘앙숙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친구가 되려고 합니다.’ 뭐 이렇게 나갈 것 같았다.
곧이어 ‘저스트’ 멤버들이 도착했다.
모두들 선물 하나씩 챙겨온 모습이었다.
“마이클, 우리 브로마이드에 사인해서 걸어둘까?”
루카스가 마이클까지 있는 1집 대형 브로마이드를 꺼냈다.
“야, 우리 이제 한물갔잖아.”
재현이 농담조로 말했다.
“한물갔어도 ‘저스트’는 ‘저스트’지. 다들 사인해줘.”
마이클이 오히려 흔쾌히 찬성하자 모두들 브로마이드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성국이도 사인해야지.”
구성 작가가 슬그머니 예전 방송국에 걸려 있었던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브로마이드를 내밀었다.
“와, 이거 완전 유물이잖아.”
태형이 반갑게 브로마이드를 들었다.
“야, 다들 여기에도 사인해. 성국아, 너두 사인해야지.”
“네!”
나는 얼른 펜을 들고 내 얼굴 위로 세 글자를 또박또박 썼다.
-전성국. 1999년 1월 23일.
모두 사인한 대형 브로마이드 두 장이 마이클의 수제 버거집에 걸렸다.
마이클이 정성껏 구운 수제 버거를 들고 나왔다.
“자, 이게 내가 미국에서 3년간 알바하며 비법 배워온 수제 버거야. 맛들 봐요.”
나는 큼지막한 수제 버거 하나를 한 입에 깨물었다.
순간 육즙이 미친 듯이 입속으로 돌진했다.
[허, 이거 진짜 맛있잖아.]
마이클이 내 표정을 보더니얼른 내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속삭였다.
“성국아, 예전에 네가 나 망하게 했으니까 살리는 것도 네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