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성국아, 반가워. 난 그레이스 최라고 해.”
“안녕하세요. 전성국입니다.”
나는 배꼽 인사를 했다.
그레이스 최는 이 바닥에서 유명한 컨설턴트 중 한 명이었다.
재벌가를 비롯한 주요 집안의 자녀들의 유학 코스를 설계하고 명문대 입시까지 책임지는 조건으로 어마어마한 비용을 받아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이 많긴 하지만, 그레이스 최가 유명한 것은 사생활까지 완벽하게 책임지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과 부모와 떨어진 상황. 국내에선 허용되지 않는 각종 마약을 손쉽게 접할 수 있어서 종종 탈선의 길로 빠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레이스 최는 그런 부분까지 완벽하게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그녀의 명성 때문에 그레이스 최의 선택을 받은 것만으로도 그 아이는 이미 유명 대학 입학이 확정된 것이라 여길 정도였다.
물론 예외도 있다.
구수영 회장의 딸들인 예정과 예리 자매이다.
“성국아, 잘 지냈어? 언니랑 면세점 구경 갈 건데, 성국이도 갈래?”
“전 여기서 책 볼래요.”
“여사님, 우리 성국이 잘 부탁드려요.”
“다녀오세요, 아가씨들.”
그레이스 최는 죽은 구수영 회장의 아들인 준호를 담당했었다. 그 인연으로 성적은 모자라지만 성격은 밝은 구수영 회장의 두 딸들도 맡았다.
물론 나는 예외였다.
철저히 성적!
철저히 가능성! 만으로 당당히 그레이스 최의 선택을 받았다.
“성국아, 무슨 책 읽니?”
[이제 책부터 감시하게, 그레이스?]
“이 책 읽어요.”
나는 책 표지를 보여줬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네.”
순간 그레이스 최의 눈이 커졌다.
“성국아, 이거 독일어 원서 아니니?”
“네. 독일어가 어려워서 좀 공부하고 싶어서요.”
“성국아, 독일어도 공부했어?”
“잘은 못해요.”
진심이었다.
영어와 일어, 프랑스어는 거의 원어민급으로 구사했지만 독일어는 조금 어려웠고, 나중에 배운 중국어는 간단한 대화 정도만 가능했다. 그래서 몇 개 국어 할 줄 아냐는 질문에 항상 중국어는 뺐다.
“성국이가 언어 욕심이 대단하구나.”
[저번 생에서 마스터 못 했으니, 이번 생에서 해보게.]
“성국이는 그럼 인문학 쪽으로 관심이 많은 거니?”
“네. 특히 엔터테인먼트 사업이요.”
“엔터테인먼트?”
“네!”
이때만 해도 대한민국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인식은 미비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삼전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들이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이라면, 엔터테인먼트 업계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업이다.
“미국만큼 공부하기 좋은 곳도 없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미국 유학을 선택한 이유기도 하다.
그레이스 최는 나에게 스케줄을 건네줬다.
“오늘 비행기 타면 내일 아침에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할 거야. 예정, 예리 자매랑 같이 지내면서 2주 정도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나면 바로 컬럼비아에서 어학연수를 받을 거야.”
[어학연수 필요 없지만, 우선은 오케이.]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이가 어린 나이에 만점으로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한 학력이 인정돼 9월 가을 학기에 맞춰서 입학 가능한 보딩스쿨 알아볼 거야.”
“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성국아, 다른 아이들도 너만 할 때 유학 많이 가는데, 너처럼 안 떠는 아이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당연하지. 뉴욕이며 보스턴이며 내 집처럼 드나들던 곳이야, 그레이스.]
“질문은 없니?”
“우선은 책 좀 보고 싶어요.”
“그래. 참, 나는 편하게 그레이스라고 부르렴.”
“네, 그레이스.”
나는 빙긋 웃고는 <데미안>을 읽기 시작했다.
<데미안>에 유명한 문구가 있다.
- 누구든지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지금 나는 제2의 전성국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한다. 그러려면 이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세계의 알을 깨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 * *
미국 사립 고등학교 입학시험인 SSAT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딱 하나가 헷갈렸는데, 그게 그만 발목을 잡아서 만점은 아니었다.
뭐 하나 정도는 틀려야 인간적인 것이라고 하지.
그레이스 최는 기쁜 얼굴로 나에게 성적표를 내밀었다.
“성국아, 이미 성적 알지만 확인해봐. 정말 잘했어. 이 성적이면 미국 내 어느 고등학교든 갈 수 있을 거야. 네 말대로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 본 거 잘한 것 같아.”
[당연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단기 어학연수를 마치고 사립 중학교에 가려는 방향을 틀어서 나는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치렀다. 이유는 꼭 가고 싶은 보딩스쿨. 그리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최가 미국 내 명문 보딩스쿨 목록을 내밀었다.
“성국아, 네 성적이면 여기 어디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전 여기요.”
내가 지목한 곳은 당연히 미국 내 보딩스쿨에서 1위를 차지하는 곳이었다.
[난 1등 아니면 안 한다고.]
“여기를?”
그레이스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워낙 입학 제도가 까다롭거든.”
[나도 잘 안다. 그레이스, 효진에서 돈 어마어마하게 받을 텐데 진가를 발휘해야지.]
원래 어느 나라에서든 1등 하는 곳들은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전 꼭 여기 가고 싶어요.”
내가 집은 미국의 보딩스쿨은 뉴햄프셔에 위치한 미국 내 1등 보딩스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꼭 만날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마크 주크버스.
* * *
그레이스 최는 자신이 아는 인맥을 모두 동원 중이었다.
성국이가 가고자 하는 보딩스쿨은 정말 한 해에 한 명 보내기도 힘든 곳으로 유명했다. 성국이의 성적이 최고이기는 했지만, 동양인. 거기다가 나이까지 어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SSAT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은 데다가, 효진 그룹이 죽은 아들 이름으로 세운 준호 재단의 첫 장학생인 성국이를 이 학교에 보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커리어에 큰 오점으로 남을 게 분명했다.
그레이스 최는 성국이에 대한 서류가 가득 든 봉투를 가지고 뉴햄프셔로 향했다.
* * *
입학 상담실장의 콧대는 하늘을 찔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은 IMF의 위기에 빠진 동양의 작은 나라일 뿐이었다.
그레이스 최는 성국의 뛰어난 성적표와 각종 활동이 요약된 포트폴리오를 내밀었다.
입학 상담실장은 우선 그레이스 최 같은 입학 대리인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뭐든 스스로 결정하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는 게 미국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최는 최대한 차분히 지금의 상황을 설명했다.
“성국이는 올해 미국 나이로 여덟 살이 된 아이입니다. 이 학교에 꼭 지원하고 싶다고 해서, 지금 머무는 뉴욕과 거리가 멀어서 제가 우선 상담을 하러 온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입학 상담실장은 콧방귀도 안 뀌고 서류를 훑었다.
학교에서 요구하는 각종 성적과 만점에 가까운 SSAT 성적표.
아역 모델부터 시작한 방송 커리어 등 호감 가는 요소가 많았다.
“집안 형편은 미국으로 유학 올 정도로 좋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효진 그룹에서 처음으로 선발한 장학생이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긴 미국 최고의 학교인 거 아시죠? 그 정도 브레인들은 세계 각국에서 몰려옵니다. 성적도 좋고, 스토리도 있지만… 솔직히 저희 학교가 찾는 인재상인지는 모르겠네요. 나이도 너무 어리고요. 기숙사 생활이 가능할까요?”
“미국에 적응하느라 작년부터 거의 1년 동안 뉴욕의 아파트에서 저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기숙사에 문제없이 적응 가능한 수준입니다. 이곳이 미국 최고의 보딩스쿨인 만큼 경쟁률도 높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성국이가 이 학교에 붙기 위해서 뭐가 더 필요할까요?”
그레이스 최는 대범하게 물어봤다.
내가 아쉽다고 저자세를 취하면 어디서든 무시받기 좋았다.
입학 상담실장은 그런 그레이스 최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론 성국이란 아이의 나이와 커리어, 거기다 성적만 본다면 어느 학교에서든 탐낼 아이이기도 했다.
“저희 학교에 지원하실 것 같으니… 우선 인터뷰 전에 에세이를 하나 보고 싶은데요. 가능할까요?”
그레이스 최의 미간이 구겨졌다.
불과 열 살밖에 안 된 아이와 평범한 고등학교 입학 단계의 아이 사이에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에세이였다.
성국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레이스 최도 장담할 수 없었다.
* * *
[에세이라고? 그건 껌이지.]
나는 그레이스가 왜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걱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국 교육 특성상 에세이를 누가 써주거나 하면 안 된다.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지면 퇴학까지 각오해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에세이는 꼭 내가 써야 했다.
나는 팔뚝을 걷어 올렸다.
[그레이스, 내가 말 안 했나 본데. 나 이래봬도 저번 생에서 삼전 그룹 사보에 글도 기고하고 했어. 유명한 소설가 이문석 선생님한테 직접 사사한 실력이라고.]
그레이스가 나를 보더니 빙긋 웃었다.
“성국아, 자신 있어?”
“네에!”
“성국아, 만약 이번 보딩스쿨 떨어지면 다른 데 알아보자.”
“흠….”
나는 잠시 턱을 매만졌다. 고민하고 있단 포즈이다.
[그레이스, 떨어질 일은 없겠지만… 세상에 100프로는 없으니까. 그렇게 하지.]
나는 그레이스를 올려다봤다.
“네, 다른 학교도 원서 넣을게요.”
“고맙다, 성국아. 여기가 최고이긴 하지만, 다른 학교도 여기 못지않게 좋아.”
[그건 나도 안다고. 다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뿐이야, 그레이스.]
나는 얼른 종이를 펴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에세이의 주제는 간단했다.
내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한민국은 계급이 없는 나라입니다.
조선 시대 양반, 중인, 상민이라는 계급이 있긴 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 계급 체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이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뤘지만, 그 때문에 돈이 곧 계급이 되는 사회가 됐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계급을 매긴다면 저희 부모님은 최하위층이 분명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어릴 적에 고아원에 버려지다시피 하셨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잘했지만, 고아가 대학 가기 힘드니 기술이나 배우라는 선생님의 말에 결국, 공부를 포기하고 요리를 배우신 아버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도 10년 후쯤에는 방 두 칸 되는 집에 살기를 꿈꿨던 어머니.
그분들이 제 부모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어려운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돌도 안 된 나이에 광고 모델을 하며….
울컥.
나는 내 인생 이야기를 적으면서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대한민국에서 가장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전직 재벌이라니….
크응.
나는 콧물을 들이켰다.
그레이스 최가 곁으로 오더니 내 어깨를 토닥였다.
“성국아, 힘들어?”
“괜찮아요.”
“그럼, 왜? 엄마, 아빠 보고 싶어?”
“…….”
나는 대답 대신 입을 꼭 다물었다.
아마 그레이스 최는 아무리 설명해도 모를 것이다.
전직 재벌이었다가, 이건 뭐, 지상도 아닌 지하로 추락한 내 인생.
지하층에서 해 뜨는 지상으로 올라오기까지 한 내 개고생.
[하아, 전성국. 정말 고생 많았어.]
이때, 그레이스가 내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아, 내가 에세이 잠시 읽었는데… 다 좋은데 말이야.”
[반전 있는 끝말은 뭐야. 내 에세이에 흠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레이스?]
“여기까지는 완벽하거든….”
[당연한 말을. 어서 다음 말을 해봐,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잠시 고민 끝에 말을 이었다.
“성국아, 이건 염려인데 말이야. 미국이라는 나라가 겸손이라는 문화가 없지만, 열 살이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는 이야기 같은 건 좀 오버 같아서. 그렇게 안 쓸 거지?”
뜨끔.
나는 정곡을 찔렸다.
[그레이스, 그건 오버 아니고 사실인데…. 그레이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인가 본데. 이 집안, 진짜 내가 일으켜 세웠어.]
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에세이를 쓱쓱 지웠다.
그레이스는 내 어깨를 도닥였다.
10년 동안의 내 개고생을 언젠가 인정받는 날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