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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77화 (77/231)

제77화

- 형아! 형아! 나 밍구기. 밍구기도 미국 갈게!

산통을 깬 것은 역시 평생의 혹, 전민국이었다.

- 형아, 디즈니랜드. 디즈니랜드.

“응. 알았어.”

전민국 때문에 나의 감동의 전화는 디즈니랜드로 마무리하게 됐다.

그레이스가 우아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성국이 언제나 나이보다 의젓해서 부모님 안 그립나 했는데, 아니었구나. 성국아, 부모님 보고 싶으면 편하게 보고 싶다고 말 해. 방학 때는 언제나 편하게 부모님 봐야지.”

“네. 그럴게요.”

[나도 엄마, 아빠 목소리 듣고 울 줄은 몰랐다고.]

나는 방으로 걸어갔다.

이제 곧 내가 그토록 원하는 필립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흠…. 엄마, 아빠 오는데 플렉스 좀 해볼까.]

효진 그룹에서 지원해주긴 했지만, 그동안 번 돈으로 부모님께 진짜 미국과 뉴욕을 구경시켜 주고 싶었다.

우선 코스피 바닥일 때 산 삼전의 주식이 4만 원에서 20만 원을 돌파했다. 정확히 5배가 올랐다.

이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큰맘 먹고 주식 일부를 처분하기로 했다. 또 사고 싶은 주식도 있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는 뉴욕이 처음이니까 우선 자유의 여신상도 보여주고, 센트럴파크도 가고… 스테이크도 먹어야겠지. 아빠는 요식업자니까 맛집을 좀 찾아봐야겠네. 디즈니랜드는 너무 먼데….]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면서 구예정이 들어왔다.

“성국아, 오늘 합격 축하하러 저녁 먹으러 가자.”

“네.”

“근데 이게 다 뭐야?”

“아빠, 엄마 오면 같이 가고픈 데 계획 짜는 거예요.”

구예정은 주식 시세가 뜬 화면을 가리켰다.

“그게 아니라 이거 주식 아니야?”

“네, 엄마, 아빠 제대로 구경시켜 주고 싶어서요. 주식 좀 팔려고요.”

“성국아, 준호 재단에서 다 제공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민국이가 디즈니랜드도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 이런 건 제 돈으로 하려고요. 준호 재단에서 너무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그건 사실이었다.

뉴욕의 아파트와 과외 공부. 거기다 그레이스 최라는 최고의 교육 컨설턴트까지.

[디즈니랜드 가는 비용까지 대달라고 하기엔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어.]

구예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얼른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선 이건 오늘 저녁 먹고 고민해보자. 성국아, 어서 준비해.”

“네.”

* * *

구예정이 데리고 간 곳은 당연히 미슐랭 스타를 받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구예정과 구예리도 평소 편안한 복장을 벗고 나름 드레시한 옷으로 멋을 냈다.

“아가씨들 덕분에 저도 좋은 곳 많이 오네요.”

그레이스도 동행한 자리였다.

“저희 때문에도 고생하시고, 성국이 이번에 입시 때문에 정말 고생하셨잖아요. 맛있는 건 같이 먹어야죠.”

역시 구씨 자매는 친절했다.

예약한 자리로 직원이 자연스레 안내했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분위기.

[나도 즐겨 오던 곳인데…. 캬아.]

와인 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나는 이제 고작 열 살이었다.

“언니, 우리 와인 한잔 하자. 축배를 들어야지. 성국이는 뭐 마실래?”

“사과 주스요.”

내가 주문할 수 있는 유일한 주스였다.

“성국이 언제 커서 우리랑 와인 마시지.”

“예리야, 성국이 크면 우리랑 안 논다니까.”

“언니도 너무해. 성국아, 커도 우리랑 놀아줄 거지?”

“당연하죠.”

입에 발린 말이다.

이때, 구예정이 구예리의 어깨를 톡톡 치며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머, ‘저스트’ 범선 아니야?”

[범선이라고?]

나는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범선이었다.

“어머, 언니! 언니 완전 범선 팬이잖아.”

[알지, 알지. 해체한 ‘저스트’ 음악 밤마다 매일 듣잖아.]

“성국아, 너 범선 씨 알지?”

나를 바라보는 구예리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내가 나서줘야 할 때인가.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몸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의자를 빼고 일어나 범선에게 걸어갔다.

미국 오기 직전에 같이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어서 범선도 분명 나를 기억할 게 당연했다.

범선은 여러 사람들과 자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가 걸어가자 범선의 눈이 커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맞아, 나 전성국이야.]

“성국아? 성국이 맞지?”

“네에! 잘 지내셨어요?”

“아, 맞다. 성국이 미국 유학 간다고 했었지. 여기 가족들이랑 온 거야?”

[우리 집은 여기 올 형편은 안 된다고.]

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저 후원해 주시는 효진 그룹분들이랑 왔어요.”

이때, 구예정이 얼른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구예정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범선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예나 지금이나 범선은 낯을 좀 가렸다.

“혹시 지금 기다리시는 거예요?”

“아, 네. 예약을 했는데, 뭐가 잘 안 된 모양이에요.”

“일행이 몇 명이신데요?”

“저까지 해서 총 세 명이요.”

“제가 한번 말해볼게요.”

구예정은 매니저에게 다가가 범선 일행의 일을 이야기하더니, 곧 웃으면서 돌아왔다.

“저희 옆자리로 안내해 주신대요. 아마 예약이 안 되신 모양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범선은 얼른 인사를 했다.

[잠깐, 이게 아닌데. 내가 기억하는 사랑의 짝대기는 분명 범선과 예리인데….]

“성국이 덕분에 밥 먹게 생겼네. 안 그래도 배 엄청 고팠거든.”

곧 매니저가 범선 일행을 우리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그사이 예리는 화장을 고쳤는지, 얼굴이 한결 화사해져 있었다.

“언니, 범선 진짜 잘생겼다.”

“너 예전에 ‘저스트’ 콘서트 가서 사진 같이 찍었잖아.”

“그때보다 더 잘생긴 거 같아. 성국아, 다 너 덕분이야.”

[당연하지. 근데 자매들 간에 범선 놓고 싸우지만 마.]

나는 조금 걱정이 됐다.

아무래도 예리는 갓 스무 살에 철없는 이미지였다면 예정은 나름 성숙하고 안정적인 면이 있었다.

범선은 얼른 우리 테이블에 와서 인사를 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오랜만에 얼굴 본 김에 제가 2차 사도 될까요?”

[당연하지!]

“성국이랑 나랑은 먼저 집에 가 있을게요. 아가씨들은 만나고 오세요.”

[무슨 소리야? 나도 2차 가고 싶다고! 뉴욕의 밤이 얼마나 화려하고 예쁜데.]

내가 종알거리자 범선이 옆으로 다가왔다.

“성국아, 진짜 반갑다.”

[반가우면 2차!]

“성국아, 내일 점심 같이 먹을까?”

[2차는 물 건너갔단 이야기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누구랑 같이 오신 거예요?”

“이쪽은 ‘저스트’ 때부터 나랑 같이 일한 방무혁 작곡가시고요.”

[방무혁이라고?]

나는 얼른 어둑한 실내 속 묵직한 실루엣을 확인했다.

방무혁이 분명했다.

“그 옆에는 나랑 오래 일한 매니저.”

[내일 점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먹어야겠는걸.]

* * *

“성국아, 여기가 뉴욕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 맛집이래. 너랑 이태원 마이클 버거집 간 게 벌써 2년 전이야.”

범선은 정말 한 말은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와의 약속 따위 피곤하면 쉽게 취소할 수도 있는데, 범선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얼른 테이블에 앉아서 햄버거를 받아 들었다.

오늘은 매니저는 없고 방무혁은 함께였다.

“형, 내가 성국이 말했지? 천재라고.”

“세상 너무 불공평한 거 같은데. 천재인데, 얼굴도 완전 잘생겼잖아. 성국아, 앞에 두고 말해서 미안해.”

“괜찮아요.”

나는 태연한 척 햄버거를 먹었다.

“형, 우리 타이틀곡 <거짓이야> 그거 성국이가 선곡해준 거잖아. 성국아, 그 노래 만든 형이 이분이셔.”

“우와!”

나는 최대한 아이답게 신기한 듯 리액션을 해줬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라고. 내가 방무혁의 미래에 대해서 좀 아는데, 굳이 말하진 않겠어. 대한민국의 K-POP이 세계를 평정하는 날이 온다는 정도만 말할게. 그래서 나 지금 방무혁이랑 아주 긴밀히 가까워질 계획이라고.]

방무혁은 햄버거를 연신 먹으며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진짜 이쪽으로 나갈 생각 없어?”

“형, 성국이 캐스팅하는 거야?”

“나도 언제까지 작곡이나 할 수는 없잖아. 돈 좀 더 벌면 아이돌 그룹 제작해 보려고. 성국이 같은 애가 있으면 딱 센터감인데. 성국아, 진짜 관심 없어?”

“전 아이돌보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관심 많아요.”

“뭐어?”

방무혁은 꽤 놀란 눈치였다.

그에 반해 범선은 태연했다.

“형, 성국이 보통 애 아니라고 했잖아.”

“난 네가 그냥 그렇게 말할 때, 뭐 그런가 보다 했지. 엔터테인먼트 사업이면 어떤 분야에 관심이 많아?”

“영화나 아이돌 그룹 제작, 저도 해보고 싶거든요.”

나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건 일종이 테스트이기도 했다.

나같이 어린애의 말이라고 무시한다면 방무혁은 더는 상종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나랑 비슷하네. 성국아, 그럼 넌 여기서 그쪽으로 공부해볼 생각이야?”

“네. 엔터테인먼트 사업 쪽으로 공부해서 한국 가고 싶어요.”

“성국아, 우선 네가 이쪽 사업에 관심 있다는 건 잘 알겠고. 진짜 이 일을 하고 싶으면 이 일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해. 책만 보던 애들이 갑자기 영화 한다고 하거나, 음악 한다고 하는 거 나 안 믿거든. 어릴 적부터 음악이든 영화든 꾸준히 보고 즐겨야지 보는 눈도 생기는 거야.”

“명심할게요.”

방무혁이 입가에 묻은 햄버거 소스를 닦으며 빙긋 웃었다.

“성국아, 미국에서 돌아오면 꼭 나 찾아와.”

“어떻게 찾아가요?”

“성국아, 핸드폰 있지?”

“네.”

나는 얼른 핸드폰을 내밀었다.

방무혁은 내 핸드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성국아, 내 번호도.”

범선도 곧 번호를 건넸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이 둘은 아마 내가 몇 년 후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때, 구예정이 나타났다.

“성국아!”

부르긴 나를 부르고는 범선과 눈을 맞췄다.

[뭐야, 둘이 어젯밤에 눈 맞은 거야? 예리는 어쩌고!]

구예정은 범선 옆으로 자연스레 앉았다.

“성국아, 오늘 내가 범선이 오빠 일행 가이드해 주기로 했거든.”

[얼씨구, 오빠? 어제 봤는데, 오빠!]

갑자기 유교 마인드가 발동됐다.

구예정과 구예리는 지난 2년 동안 나와 함께 지내 가족 같기도 했지만, 저번 생에서부터 내 친구의 동생들이기도 했다.

방무혁이 나를 슬쩍 봤다.

“성국아, 너랑 나랑은 미술관 갈래?”

[두 사람 데이트에 빠져주라는 거지?]

나는 햄버거를 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관 좋아요.”

범선과 구예정은 다정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더니, 바로 자리를 떴다.

“성국아, 집에서 봐.”

[제발 집에나 들어와라.]

방무혁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성국아, 우린 미술관 돌면서 비즈니스 이야기 좀 더 해볼까?”

“좋아요. 참, 저 아는 화가 있어요.”

“누구?”

“데미안 허스키요.”

방무혁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데미안 허스키? 진짜?”

데미안 허스키는 홍콩 아트페어 이후로 일약 세계적인 미술가가 됐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데미안 허스키의 전시가 뉴욕에서 열리고 있어서, 시험 끝나고 가볼 생각이었다.

“아저씨도 같이 가요.”

“그, 그래. 나도 정말 보고 싶었어, 그 전시. 성국아, 너랑 나랑은 정말 통하는 게 있나 봐.”

[통하긴. 방무혁. 나 당신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

방무혁의 관심사 중에는 미술도 있었다.

나는 이 기회에 방무혁을 단단히 내 편으로 만들 계획이다.

[방무혁, 세상에 공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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