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나는 방무혁의 손을 꼭 잡고 데미안 허스키의 전시가 열리는 첼시의 갤러리로 향했다.
“성국아, 난 네가 데미안 허스키도 알 줄 몰랐어.”
[재벌들은 원래 미술에 관심 많아. 근데 방무혁, 생각보다 말이 참 많네. 손에 땀도 많고.]
방무혁은 들뜬 얼굴로 택시에서 내려서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름 데미안 허스키의 초창기 설치미술 작품들과 판화가 한쪽에 전시됐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죽음과 부활’이었다.
카탈로그에는 홍콩 아트페어에서 만난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의미를 깨닫고, 작품에 매진했다는 데미안 허스키의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방무혁은 그 카탈로그를 열심히 읽었다.
“성국아, 홍콩 아트페어 때 데미안 허스키가 이번 전시의 주제를 어떤 아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떠올렸다고 하네.”
[그 아이가 난데 말이야.]
나는 데미안 허스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오늘 안 나왔나.]
이때, 갤러리 안쪽에 밝은 금발에 검은 셔츠, 검은 바지를 입은 데미안 허스키가 보였다.
나는 방무혁의 손을 잡고 끌었다.
“성국아, 전시는 여기서부터 보자.”
“그럼, 전 인사만 하고 올게요.”
“누구한테?”
“데미안 허스키한테요.”
나는 방무혁의 축축한 손을 놓고 데미안 허스키에게 걸어갔다. 데미안 허스키는 몇몇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인터뷰 중이었다.
[설마 몇 년 지났다고 나 잊은 건 아니겠지?]
나는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데미안 허스키에게 걸어가서 영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인터뷰 도중에 성인이 끼어든다면 무례한 일이지만, 아이라 애교로 봐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데미안 허스키는 처음엔 몇 번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기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 아이가 홍콩에서 저에게 영감을 준 그 아이예요.”
[잊지 않고 있었구나, 데미안.]
데미안 허스키는 달려와서 나를 안았다.
“성국. 성국이 맞지?”
“네.”
“혼자 온 거야?”
“아니요, 아는 아저씨랑 왔어요.”
나는 자연스레 방무혁을 소개했다.
방무혁은 얼떨떨한 얼굴로 데미안 허스키와 악수를 했다.
“성국, 안 그래도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막 물어보던 참이었어.”
“죄송한데, 이 아이랑 같이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을까요? 참, 전 타임지의 제이미 조넌입니다.”
“성국아, 사진 괜찮겠어?”
[타임지라면 괜찮지.]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기자들이 나와 데미안 허스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방무혁은 뒤에서 이 모습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었다.
“성국아, 갤러리 보고 있어. 인터뷰 마치자마자 갈게.”
“네에!”
나는 다시 방무혁 곁으로 갔다.
“성국아, 이 카탈로그에 나온 아이가 너였어?”
“네에.”
방무혁은 신기한 듯 나를 계속 쳐다봤다.
[그만 봐, 방무혁. 남자가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 부담스러워.]
* * *
데미안 허스키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방무혁에게 갤러리의 작품 하나하나를 모두 설명해줬다.
역시 데미안 허스키는 작품보다 해설이 멋진 부분이 있었다.
“성국아, 내 작품 잘 가지고 있지?”
“당연하죠. 한국에 있는 내 방에 걸어뒀어요.”
“미국에는 무슨 일이야?”
“유학 왔어요. 다음 학기에 필립 아카데미에 입학해요. 참, 이분도 소개해 드릴게요.”
난 쭈뼛거리고 선 방무혁을 앞으로 밀었다.
“방무혁 씨라고요, 대한민국의 유명한 작곡가세요.”
슬쩍 띄워 주기까지 했다.
방무혁은 수줍은 얼굴로 데미안 허스키와 짧은 대화도 나눴다.
뭐, 작품이 심오하다거나 하는 그런 내용을 주고받았다.
데미안 허스키는 짧은 만남 이후에 내게 연락처를 물어봤다.
“성국아, 연락할 수 있는 메일이나 핸드폰 번호 알려주겠니?”
“메일 알려 드릴게요.”
“성국아, 미국에 전시 있을 때마다 초대할게. 기회 되면 영국에도 놀러 오고.”
“네, 시간 되면 방무혁 작곡가님이랑도 같이 갈게요.”
“그래.”
데미안 허스키와의 만남은 짧게 끝났다.
하지만 나는 이 짧은 만남을 통해 방무혁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을 만들었다.
방무혁은 들뜬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덕분에 진짜 데미안 허스키도 보고. 고마워.”
“별말씀을요. 다음에 미국 오시면 또 전시회 같이 가요.”
“나야 좋지. 성국아, 나한테도 연락처 줄 거지?”
“네!”
이렇게 나는 대한민국 연예계를 뒤집어놓은 내 계획의 첫 단추를 잘 끼웠다.
* * *
“언니, 범선이랑 데이트한 거야? 둘이 사귀기로 한 거야?”
“아직 아니야. 그냥 호감 가는 정도.”
“언니가 내 이상형이랑 사귀는 거야? 말도 안 돼.”
구예리의 징징거리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도 들렸다.
이상하게 연애 관계는 내가 겪은 것과 좀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방무혁의 미래나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얼른 주식 시세를 확인했다.
대한민국은 정말 IMF 외환 위기에서 벗어나는 느낌이었다.
삼전 전자의 주식이 많이 올랐고, 앞으로도 더 오르겠지만 오늘 좀 투자해보고 싶은 곳이 생겼다.
방무혁과 데미안 허스키를 만나고 걸어가는 길, 모퉁이에 놓인 미국의 대형 서점 체인인 노블스를 우연히 지나쳤다.
내가 저번 생에서 뉴욕에서 있을 때도 종종 갔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종이책 시장이 줄어들면서 사양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는 기업이 있다.
아마조네스였다.
인터넷 상거래 사이트 아마조네스는 미국 내 제일 큰 인터넷 상거래 사이트로 성장한다. 물론 아직은 미비하다.
[삼전 주식 좀 팔아서 민국이 디즈니랜드 구경도 시켜주고, 아마조네스 주식 좀 사야겠네.]
물론 지금 20만 원을 호가하는 삼전 전자의 주식은 6년 후쯤이면 60만 원을 돌파한다. 5만 원에 산 주식이 10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지점이다.
2억이 20억이 넘게 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저번 생을 경험하면서 느낀 게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재벌 상속자라 솔직히 부족한 것도 없이 살았지만, 경제적 만족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 만족과 부를 위해서 현재의 행복은 저당 잡힌 삶이 저번 생이었다.
이번 생은 분명 저번 생과 다르게 살고 싶었다.
* * *
그레이스 최와 함께 공항에 가족들을 마중하러 나갔다.
미국에 온 지 1년이 넘었는데, 처음으로 가족들을 보는 거였다.
이제 지희는 돌도 지났으니 아장아장 걸어 다닐 게 분명했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인파가 쏟아져 나왔고, 드디어 저 멀리서 엄마, 아빠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 손에 달린 두 혹 덩어리도!
“형아!”
민국이가 나를 보자 달려왔다.
“민국아….”
[뭐야, 내가 왜 민국이를 먼저 찾지.]
“형아!”
와락.
민국이가 내 품에 와서 안겼다.
“형아, 보고팠어. 형아도 민국이 보고팠어?”
“…당연하지.”
나는 민국이를 꼭 안았다.
아빠가 지희를 번쩍 안아 들고는 나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성국아, 지희 백일 때 보고 처음 보는 거지?”
“응.”
“지희 이만큼 컸어. 이제 걸어도 다녀. 지희야, 여기 성국이 오빠. 성국이 오빠 기억나?”
백일 된 녀석이 기억할 리가 없었다.
지희는 배시시 웃으며 침 잔뜩 묻은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만져댔다.
백일 때는 부풀어 오른 찐빵 같더니 슬슬 사람의 형상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좀 귀엽기도 했다.
“오. 빠!”
[뭐야, 왜 감동스럽지? 지금 이 상황이 왜 감동스러운 건데.]
정말 이놈의 눈시울은 시도 때도 없이 붉어져서 곤란했다.
“성국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어.”
엄마가 나를 와락 안았다.
“엄…마.”
엄마를 부르는 목이 살짝 멨다.
아빠도 우리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 순간 내 눈물 꼭지가 터지고 말았다.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
“형아, 나두.”
“오빠아.”
온 가족이 JFK 공항 한복판에서 얼싸안았다.
* * *
“엄마, 오늘은 푹 쉬고 내가 내일 갈 레스토랑 예약했어.”
준호 장학재단에서 가족들이 머물 숙소까지 다 제공해준 상태였다.
숙소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종알종알 2주 동안의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아빠는 내 입학식을 보기 위해서 난생처음 2주라는 긴 시간의 휴가를 내기도 했다.
“민국아, 형아가 민국이 가고 싶다는 디즈니랜드 갈 비행기랑 호텔도 다 예약했어.”
“형아, 정말?”
“형이 언제 거짓말했어?”
“우리 형 쵝오!”
민국이가 나를 꼭 껴안고는 떨어지지 않았다.
“성국이가 부모님 엄청 보고 싶어 했어요. 저희가 도와준다고 했는데도, 오시기 일주일 전에는 주식 팔아서 호텔이랑 비행기도 혼자 다 예약하고 계획표 짜느라 엄청 고심했어요.”
“성국아, 주식 팔았어?”
아빠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조금 팔았어, 아빠. 다른 데 분산투자 하려고 판 거야.”
“암튼 이 녀석은. 내가 모르는 말도 잘해.”
“성국아, 엄마는 유명한 레스토랑 안 가도 돼. 성국이 미국 있으면서 맨날 사 먹었을 텐데, 엄마가 2주 동안 집밥 해주려고 고추장이며 다 싸들고 왔어.”
[엄마, 촌스럽게 뭘 그런 거 다 싸들고 왔어. 뉴욕에는 한인마트 많아.]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촌스럽긴 했지만, 또 이래서 난 엄마가 좋았다.
“성국아, 엄마가 너 집밥 해준다고 김치도 몇 번을 싸매서 챙겼는지 몰라. 그거, 아빠가 다 들고 왔다는 것만 알아둬.”
[서비스다.]
나는 아빠도 꼭 안았다.
아빠가 내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아빠가 즐겨 쓰는 세숫비누 냄새가 났다.
[아빠, 아직도 싸구려 비누 쓰는구나.]
하지만 이 싸구려 비누 냄새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그레이스가 빙긋이 웃으며 우리 가족을 바라봤다.
“다들 정말 행복해 보이시네요. 부럽네요.”
[그레이스, 왜 그래?]
“그동안 성국이 돌봐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있는 동안 저희가 한식 많이 해드릴 테니, 같이 드세요.”
“성국이 아버님 음식 유명하잖아요. 저야 감사하죠.”
그레이스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곧 쓸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스가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얼른 그레이스의 손을 잡았다.
“저녁 같이 먹어요.”
“가족들끼리 쉬고 싶지 않아?”
“그레이스도 가족이잖아요.”
그 순간, 그레이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 * *
보글보글 김치찌개 끓는 소리.
바글바글 된장찌개 졸여지는 소리.
엄마와 아빠는 부엌에서 요리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레이스는 그 옆에서 그동안 내가 이룬 성과를 말하며 연신 칭찬을 했다.
“형아, 이거 받아봐!”
민국이는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공을 던지며 나에게 잡아보라고 소리쳤고, 지희는 내 다리에 매달리며 침을 묻혀댔다.
[하아, 형의 삶이란 이런 거였지.]
내가 그동안 잊고 살았던 형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
“형아, 공 던져줘.”
“어, 알았어. 잘 받아!”
휙- 공을 던져줬더니, 지희가 엉금엉금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었다.
“지희야, 조심해. 거기 먼지 많아.”
말을 알아들으면 한 살이 아니지.
나는 얼른 달려가서 구석의 먼지구덩이와 하이파이브 하려는 지희를 안아 들었다. 그러자 지희가 온몸을 바둥거렸다.
“지희야. 지지야, 지지. 오빠가 책 읽어줄게.”
이렇게 된 거, 지희를 좀 테스트해 봐야겠다.
민국이는 적당한 얼굴에 멍청한 뇌인 줄 알았는데, 영재급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직 이목구비로는 아역 모델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머리는 좋을 수 있었다.
나는 얼른 내가 즐겨 읽는 영어로 된 소설책을 꺼냈다.
<마법사 해리>라는, 공존의 히트를 기록하는 소설이었다.
“지희야, 이거 읽어줄게.”
“녜에!”
지희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녀석, 똘똘하긴. 좀 기대가 되는데.]
내가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지희는 책을 입에 집어넣더니 씹어댔다.
나는 얼른 지희 입에 들어간 책을 빼냈다.
“먹지 마! 먹지 마! 전지희! 책 좀 먹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