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야금야금.
전지희는 내가 아끼는 <마법사 해리>의 첫 페이지를 반 이상 씹어 먹었다. 물론 다 바닥에 뱉었지만.
“책은 먹는 게 아니고, 읽는 거야.”
나는 오빠답게 의젓하게 허리에 손을 얹고 지희를 혼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으아앙. 으아앙. 으아앙.”
지희는 울면서 아장아장 부엌에 있는 엄마에게 달려갈 뿐이었다.
“형 받아!”
동시에 민국이의 공이 내게 날아왔으나, 평사시라면 민첩한 움직임으로 공을 한 손으로 탁 받아내는 나의 운동신경이 지희의 공격에 마비된 상태라….
그렇다. 공에 맞고 말았다.
“혀어엉!”
민국이가 달려와서 나를 살폈다.
다행히 공은 관자놀이 부근을 지나갔지만, 얼굴보다 무거운 건 내 마음이었다.
[이 녀석들 대체 뭐 먹고 살려고, 아무 생각도 없는 거야!]
“성국아, 괜찮아?”
엄마가 얼른 지희를 안아 들고 다가왔다.
“엄마, 내가 공을 잘못 던졌어.”
“민국아, 집에서는 공놀이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민국이는 울상을 지었고, 나는 아픈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형 입학식 가야 하는데, 멍들면 어떡해.”
이때, 지희가 침 가득 묻은 손을 뻗더니 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야. 호. 호. 효. 효.”
지희는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열심히도 불어냈다.
[좀 귀엽네. 전지희, 너는 좀 더 크면 오빠랑 인생 상담 진하게 하자.]
“소영아, 애들 데리고 식탁으로 와. 밥 다 됐어.”
“응. 성국아, 밥 먹으러 가자.”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뒤에서 민국이가 내 허리를 붙잡더니 아장아장 걸어왔다.
“형아, 미안해.”
[알면 됐다, 이놈아.]
저번 생이었다면, 분명 민국이, 지희 모두 일렬로 세워놓고 화를 냈겠지만 왠진 모르게 민국이랑 지희를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 * *
된장찌개와 김치찌개. 그리고 아빠의 전매특허인 보쌈.
아빠는 직접 비닐에 꽁꽁 싸온 김치까지 꺼내서 식탁에 올렸다.
그레이스가 센스 있게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전 얻어먹기 뭐해서요, 와인 한 병 가져왔어요. 피곤하실 텐데, 한 잔씩 하고 푹 주무세요.”
“성국이 너무 잘 돌봐주셔서, 저희가 오히려 뭐라도 드려야 하는데요.”
[엄마, 아빠, 그레이스 돈 엄청 받아. 걱정 넣어둬.]
그레이스는 흐뭇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와, 정말 이런 밥 오랜만이에요.”
“선생님은 한국에 잘 안 계시죠?”
“네. 아이들 따라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2, 3년씩 같이하니까요. 아이들 방학 때나 휴가 때 잠깐 들어가긴 해도. 전 가족이 없어서요.”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레이스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가족이 없으시다뇨?”
아빠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선 결혼을 안 했고, 부모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나이도 있다 보니까요. 형제도 없고… 고아나 다름없어요.”
[안 돼!]
그 순간 나는 손을 쭉 뻗고 싶었다.
“어머, 저희는 진짜 고아예요.”
[엄마…. 사연 또 나오는 건가.]
그레이스가 눈을 반짝였다.
“저도 성국이네 사정은 조금 알아요.”
[모를 리가 없지. 효진 그룹에서 다 말했을 텐데.]
엄마는 지희에게 이유식을 계속 먹이면서 말했다.
“저랑 남편이랑 같은 보육원 출신이거든요.”
[나, 저 이야기 또 들으면 천 번째인 거 같아.]
절레절레.
“부모님 돌아가시고는 서울에 집이 있긴 한데, 차라리 미국에 아이들이랑 같이 있는 게 좋더라고요. 왠지 제가 진짜 부모가 된 느낌도 들거든요.”
“진짜, 그래서 저희 성국이 너무 잘 돌봐주셨나 봐요.”
“성국이는 신기하게 정말 열 살 같지가 않아요. 혼자 뭐든지 잘해요. 보통 열 살이면 제가 챙겨야 할 일이 너무 많거든요. 어떨 땐 유모를 필수로 신청하기도 하는데, 성국이는 혼자 너무 잘해서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지금 나 칭찬하는 건가. 훗.]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오랜만에 보는 쌀밥을 한 숟가락 푹 떴다.
“성국아, 깻잎 먹어봐.”
아빠가 깻잎을 떼서 내 숟가락 위에 살포시 얻었다.
깻잎을 한 장 한 장 떼는 저 섬세함이란. 역시 깻잎 떼어주는 건 사랑이다.
옆에서 민국이가 깻잎을 떼지 못해 내가 슬쩍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어줬다. 그러자 민국이가 수월하게 깻잎을 떼어갔다.
“형, 쵝오!”
“민국아, 공부 잘하고 있지?”
난 은근 민국이의 학교생활이 궁금했다.
이 녀석도 이제 여덟 살, 초등학교 1학년이다.
“응, 형아.”
[이 낙천적인 대답이 불길한 건 나뿐인가.]
아빠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
“성국아, 민국이는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아이큐 좋다고 엄마가 이것저것 시켰는데, 매번 뛰어나가서 놀기 바빠. 자긴 커서 ‘저스트’ 같은 가수 되고 싶대.”
[역시, 공부는 머리만으로 하는 게 아니었어.]
살짝 어깨가 으쓱했다.
공부하기 위한 끈기와 집중력. 그것도 아이큐 못지않게 중요했다.
“형아, 나 가수 할 거야. 노래 불러볼까?”
[그래, 한번 해 봐. 미래의 엔터 대표님이 지켜보신다는 것만 알고.]
민국이는 밥 먹다 말고 일어나서 숟가락을 쥐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반주로 만화 주제가를 아주 멋지게 불러냈다.
음악에 맞춰 다리도 흔들고, 춤사위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보다 못하지만 우리 집 유전자를 이어받은 괜찮은 외모.
거기다 주체할 수 없는 끼.
무엇보다 진짜 사람들 앞에서 관심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아이돌이 갖춰야 할 덕목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나는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하마터면 손을 내밀고 우리 집안을 같이 일으켜 세워보자고 말할 뻔했다.
노래를 마친 민국이는 마치 무대를 마친 아이돌처럼 숨을 헐떡이며 인사까지 정중히 했다.
[녀석, 키워볼 만하겠어.]
“형아, 어때? 어때?”
“성국아, 민국이가 너한테 보여준다고 일주일이나 연습한 거야.”
“잘했어, 전민국.”
나는 손을 들어 민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그레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성국이는 저럴 때보면 재벌 회장님들 같아요. 마치 부하 직원 칭찬하는 것 같다니까요.”
[역시… 전생의 습관은 숨길 수 없지.]
“엄마, 아빠. 내일은 우리 스테이크 먹으러 가요.”
나는 이미 유명한 뉴욕의 레스토랑을 모두 예약해둔 상태였다.
“근데 지희는 어쩌지? 지희는 이유식 먹어서 식당 가기 힘든데….”
[아차, 그 생각까지는 못 했다.]
그레이스가 웃으며 지희의 볼을 살짝 건드렸다.
“어머니, 지희는 제가 보살필게요. 가족들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선생님, 지희 혼자서 절대 못 보세요.”
“유모 요청할게요. 제가 매번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2주 동안 부를 테니, 걱정 마세요.”
나는 엄마의 손에 들린 지희의 이유식 숟가락을 슬쩍 뺏었다.
전지희 때문에 엄마가 밥 한 숟가락도 못 먹고 있었다.
“성국아, 왜?”
“엄마, 밥 먹어. 내가 지희 이유식 먹일게.”
“성국이가 할 수 있겠어?”
[뭐, 그냥 퍼서 입에 넣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숟가락을 가져다가 이유식을 푹 퍼서 지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
“자, 지희야. 이유식.”
“호. 호.”
[뭐라는 거야?]
“성국아, 뜨거우니까 살짝 불어서 줘.”
[아하.]
나는 엄마의 지시대로 이유식을 호호 불어서 지희의 입에 밀어 넣었다.
지희는 숟가락을 깨끗하게 먹더니 오물오물 몇 번 씹고 꿀떡 넘겨버렸다.
[귀여운 녀석.]
잠깐만!
[내가 지금 귀엽다고 한 거야? 설마, 이 전성국이?]
나는 슬며시 어느새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고 엄한 표정으로 지희를 바라봤다.
지희가 잼잼을 하면서 이유식을 더 달라고 온몸을 바둥거렸다.
나는 다시 이유식을 퍼서 지희에게 먹였다.
오물오물. 꿀꺽.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엄마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성국아, 지희 너무 귀엽지?”
[아니라곤 말 못 하겠어.]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재벌들은 감정 같은 거 드러내는 거 아니었다.
내 표정 하나에 주식이 오르내렸다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이었다.
나는 다시 지희에게 이유식을 슬며시 줬다. 그러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희야, 기억해. 너한테 밥을 주는 사람은 이 오빠라는 것을. 알았지?]
지희는 토끼같이 나온 앞니를 내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하아, 너무 귀여워.]
나는 주먹으로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 * *
“성국아. 엄마, 아빠는 미국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 너 보러 온 거야. 너랑 시간만 지내도 좋아.”
내가 내민 스케줄을 본 엄마와 아빠는 난감한 얼굴이었다.
[MBTI 파워 ENTJ가 나라고. 그중에서도 J는 상상 초월이야. 분 단위로 짤까 하다가 30분 단위로 잤다는 것만 알아둬.]
아빠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성국아, 엄마 말처럼 우리 편하게 지내자. 자유의 여신상 TV에서 많이 봐서 안 봐도 돼.”
“아빠, 민국이랑 지희 보여줘야지.”
“지희 기억도 못 해.”
“사진 찍어두면 다 기억해.”
역시 남는 건 사진이다.
“그럼 성국아, 이 스케줄 표에서 꼭 필요한 것들만 우리 하나씩 하나씩 해보는 거 어때?”
[어쩔 수 없지. 내가 한발 양보하지.]
아빠는 고심하는 얼굴로 스케줄 표를 봤다.
“아침, 7시 기상해서 센트럴파크 조깅. 성국아, 이건 빼자.”
“오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아빠, 대신 이건 꼭 해야 해.”
“베이글 먹고, 자유의 여신상 투어. 그래, 민국이랑 지희도 미국 온 기념은 해야지. 점심은 피자 사서 먹고, 센트럴파크 공원에서 자유 시간. 좋네. 저녁은 스테이크네.”
“응. 100년 된 집이야. 아빠. 엄청 맛있어.”
“그래, 아빠도 이 집은 기대된다. 맛집이니까, 보쌈집 주인으로서 당연히 가봐야지.”
나는 조금 신이 났다.
스케줄 표를 보던 아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국아, 여긴 어디야?”
“엄마, 아빠를 위해 준비했어.”
아빠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자 뒤에서 스케줄 표를 같이 보던 그레이스가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성국이가 엄마, 아빠 단둘이 데이트할 시간 주고 싶다고 예약한 유명한 스카이라운지 바예요. 저녁 먹고 성국이랑 아이들은 유모랑 제가 볼 테니까, 두 분이서 데이트하고 오세요.”
“이런 것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돼요. 그리고 저, 미국 사람들 옆으로 지나가면 무서워서요. 밤엔 더 무서울 것 같은데….”
“그것도 걱정 마세요. 성국이가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올 차량까지 다 준비했어요.”
“성국아, 너 돈 너무 많이 쓴 거 아니야?”
[아빠, 이게 전직 재벌 클래스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 *
아빠는 정말 복 받은 남자였다.
그레이스가 준비해준 드레시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엄마는 애가 셋이나 있는 여자 같지 않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가장 복 받은 것은 바로 나, 전성국 때문이지.
나는 얼른 아빠 주머니에 100달러 다섯 장을 슬쩍 찔러줬다.
“성국아, 이게 뭐야?”
“아빠, 엄마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아빠는 얼른 나를 보더니 감동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아빠, 또 감동한 거야?]
아빠는 얼른 내게 다시 500달러를 돌려줬다.
“성국아, 너 덕분에 좋은 데 가는데, 엄마는 아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예상 밖의 시나리오인데.]
또각. 또각.
엄마의 하이힐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자기야, 어서 가자. 밑에서 기다리신대.”
“응.”
엄마는 얼른 내 뺨에 볼을 비볐다.
“성국아, 동생들 잘 돌봐줘야 해.”
[안다고. 대한민국 장남의 어깨는 무겁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