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역시 내 안목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얼른 내가 좋아하던 명품 브랜드 매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성국아, 같이 가.”
뒤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 따위 들리지 않았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아동 라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흠, 역시 2000년대 초반 스타일이군.]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가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 브랜드만의 특징은 여전했다.
[평상복이랑 속옷이랑, 양말까지 좀 사볼까.]
내가 티셔츠 하나를 집어 들려는 순간, 아빠가 내 목덜미를 잡았다.
“전성국. 뭐 하는 거야?”
아빠의 목소리는 조금 엄하기도 했다.
왜 그러지?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 왜?”
“너 지금 여기 얼마짜리인 줄 알아?”
[당연히 알지. 양말 한 짝에 100달러 정도 하잖아. 별거 아니야.]
엄마가 얼른 내 손에서 카드를 빼앗아 들었다.
“엄마!”
“성국아, 구수영 회장님이 학교에서 필요한 용품 사라고 준 거지, 막 쓰라고 준 거 아니잖아.”
[양말이랑 속옷은 필수품이지. 데일리로 입을 옷이랑 주말 외출복. 가방과 지갑도 필수라고!]
엄마가 아빠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했다.
“자기야, 잡아.”
“어. 소영아.”
지금 뭐 하는 거지?
그 순간, 아빠가 내 오른손을. 엄마가 내 왼손을 탁 잡았다. 그러고는 나를 들다시피 해서 명품 매장에서 질질질 끌고 나왔다.
[안 돼!]
발버둥 쳤지만, 두 사람의 힘을 당해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소영아, 여기 너무 비싼 거 같은데. 다른 데 가볼까?”
“이 근처 우리가 전혀 모르잖아. 선생님이 여기서 쇼핑하라고 한 거 보면 여기서 살 만한 데 있을 거야.”
“소영아, 내 눈에는 다 너무 비싸 보여.”
“엄마, 손 좀 놔줘.”
나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봤다.
“전성국, 아무리 너 필요한 거 사라고 주신 거지만 그렇게 남의 돈 막 쓰는 거 아니야. 알았어?”
[하아….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엄마.]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매장 맨 구석에 있는 서민들이나 입는 의류 매장 하나를 가리켰다.
“엄마, 저기.”
“어, 폴라잖아.”
“소영아, 아는 브랜드야?”
“저기도 무지 비싼데. 백화점에 갔다가 구경만 했어.”
[엄마, 저기 서민 브랜드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폴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엄마는 망설였다.
“자기야, 우선에 여기 몇 군데 한번 들어가보고 저기는 마지막에 가보자.”
“그래.”
엄마와 아빠는 내 손을 양쪽으로 꼭 잡고 다른 매장으로 들어갔다.
[헛수고야. 여기서 폴라가 제일 싸다고.]
나는 투덜거렸지만, 내 투덜거림은 의류 매장 다섯 군데를 돌고 난 뒤에야 끝이 났다.
“소영아, 여기 다들 양말 하나에도 100달러씩 하네. 이게 명품이라는 건가 봐.”
“그런가 봐. 자기야, 폴라 한번 가보자. 한국에서도 폴라는 그 정도는 안 했던 것 같아.”
[서민 브랜드라니까.]
아빠가 내 손을 잡아당겼다.
“성국아, 가보자.”
“네에!”
* * *
“자기야, 다른 데 보다가 여기 보니까 폴라가 싸 보일 지경이야.”
“그니까. 소영아, 우리 여기서 사도 될까?”
아빠는 카드를 쥐고 망설였다.
“자기야, 자기 돈 환전한 거 남아 있지?”
“응. 500달러 정도 있어.”
“그럼, 우리 돈으로 여기서 성국이 옷 다 사자. 성국이가 그동안 공부하느라 고생했는데, 그 정도는 우리가 해줘야지. 만약에 500달러 넘으면 그때 카드 쓰는 거 어때?”
나는 입을 앙다물고 엄마의 손을 잡아당겼다.
왜 카드를 줘도 쓰질 못하니!
엄마는 내 눈을 보더니 슬며시 손을 놨다.
“성국아, 여기서 엄마, 아빠가 성국이 학교 가서 입을 옷이랑 다 사줄게. 필요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사. 알았지?”
“정말?”
“응.”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민적인 삶에 다시금 만족하기로 했다.
“소영아, 여기서 지희랑 민국이 옷도 한 벌씩 골라봐.”
“그럴까?”
“여기 또 우리가 언제 오겠어.”
“알았어.”
엄마는 신난 얼굴로 매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다면 나도 이제 골라볼까?
[뭐, 이건 무난하네.]
폴라의 시그니처인 티셔츠 몇 장과 치노팬츠와 데님을 몇 개 담았다. 뉴햄프셔는 추운 곳이라 겉옷도 좀 몇 개 담았다.
그사이 엄마는 연신 점퍼를 가지고 와서 내 얼굴에 대봤다.
“성국아, 이거 이쁘지?”
“응.”
“그래, 이것도 사자. 거기 춥다며? 겉옷 몇 개 사야 하는데… 왜 이렇게 비싼 거야. 자기야, 500달러로는 감당 안 될 거 같은데.”
“소영아, 내가 그레이스 선생님한테 환전하는 것 좀 물어보고 올게.”
“응. 자기야, 넉넉하게 뽑아.”
“알았어.”
아빠는 내 핸드폰을 들고 매장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엄마는 연신 내 옷을 주워 담았다.
“성국아, 여기 이쁜 거 너무 많다. 우리 성국이 다 사주고 싶네.”
“엄마, 엄마 옷도 사.”
“아니야. 엄마는 옷 많아.”
거짓말.
누가 봐도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뉴욕에 온 2주 동안 엄마는 원피스 두 개와 겉옷 하나를 돌려 입고 있었고, 아빠는 청바지 두 개에 티셔츠 두 개로 견디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주머니에 숨겨둔 비상금을 슬며시 세어봤다.
저번 날 아빠에게 주지 못한 500달러가 그대로 있었고, 검소한 엄마, 아빠가 돈 쓰는 것을 겁낼 것 같아서 챙겨둔 200달러가 더 있었다.
이미 내 옷은 충분했다.
나는 슬그머니 남성복과 여성복 라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재계의 패셔니스타였던 나의 안목을 믿어보라고.
나는 엄마가 즐겨 입을 만한 원피스 한 벌과 티셔츠, 데님을 골랐다. 그리고 아빠는 데님과 티셔츠. 거기에 어울리는 면 재킷을 선택했다.
[이 정도면 서민 브랜드에서 봐줄 만하네.]
나는 얼른 이 옷들을 들고 데스크로 향했다.
“성국아, 그게 다 뭐야?”
“엄마, 아빠 선물이니까 나 말리지 마.”
“여기 너무 비싸. 어머, 이게 도대체 얼마야. 원피스가 300달러이야?”
엄마는 가격표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국아, 안 되겠어. 이거 엄마 필요 없어.”
“엄마, 이거 선물이야.”
나는 원피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걸 입은 엄마만 봐도 행복할 것 같았다.
“성국아, 차라리 이 돈으로 너 입을 거 더 사자.”
“난 이미 충분히 많아.”
나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성국이 맞구나.”
뒤돌아보니 범선과 방무혁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머, 범선 씨.”
엄마는 또 범선을 보더니 화색이 돌았다.
이게 팬심이지.
“어머니, 쇼핑 오셨어요?”
“성국이 학교 들어가잖아요. 필요한 거 사러 왔는데, 성국이가 자꾸 저희 옷 사준다고 난리예요.”
“아, 맞다. 성국이 이번에 학교 들어간다고 했죠.”
[범선, 저번에 말했잖아. 예정이 누나랑 데이트한다고 정신없지?]
나는 범선을 질책의 눈으로 쳐다봤다.
“어머니, 안 그래도 저희 내일 출국이라 쇼핑하러 온 거거든요. 성국이 입학 선물로 제가 옷 좀 사줄게요.”
[그래?]
나는 엄마 손을 뿌리치고, 범선의 손을 얼른 잡았다.
[범선, 우리 프라도 좀 가볼까.]
“성국아, 이리 와.”
엄마가 다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머니, 두세요. 혹시 고르신 옷 있으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엄마는 사양하고, 범선은 사주겠다는 골치 아픈 실랑이가 시작됐다.
이때, 방무혁이 뒤로 슬며시 오더니 내게 카드를 건넸다.
“성국아, 네 옷 이걸로 결제하고 와.”
“진짜요?”
“당연하지. 아저씨가 사주는 거야.”
[방무혁, 센스 좀 있는데?]
나와 방무혁은 엄마와 범선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옷들을 들고 데스크로 갔다.
“이거는 이 카드로 계산해 주시고요. 나머지는 현금으로 할게요.”
여직원은 재빨리 계산을 했다.
그리고 방무혁은 누구보다 빠르게 쇼핑백을 들고 나에게 건넸다.
“성국아, 미션 성공!”
“아저씨,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방무혁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 같았다.
뒤늦게 우리가 계산하는 것을 안 범선과 엄마가 뛰어왔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나는 방무혁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 * *
그레이스가 쇼핑한 옷들을 구경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 성국이한테 잘 어울리겠는데요. 근데 왜 저희 카드 안 쓰셨어요?”
“너무 비싸서요.”
“괜찮아요. 그럼, 영수증 다 주세요. 저희가 비용 처리해서 입금해 드릴게요.”
“아니에요. 그리고 방무혁이라고 작곡가분이 성국이 옷은 선물해 주셨어요. 저희가 말릴 사이도 없이 다 계산하셨어요.”
“그러시구나. 그럼, 이거 민국이랑 지희 옷 산 거랑 부모님들 옷 산 거 영수증 주세요.”
이건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건 제가 살게요.”
“성국이가?”
“네,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 선물이에요.”
“진짜 못 말리겠네.”
그레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뭘 모르죠.”
“아니요. 성국이 부모님이나 성국이나 다들 너무 좋으신 분들이라 그래요. 돈 있는 집안 자식들 많이 케어했거든요. 물론 돈도 많지만, 부모가 주는 돈이나 카드 정말 물 쓰듯 쓰는 애들 많아요. 그것도 부족하다고 맨날 전화해서 우는소리 하기도 하고요. 근데 성국이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그레이스도 나처럼 없는 집에서 살아봐. 물 쓰듯 돈을 쓰게 되나.]
나는 지희 원피스를 들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지희에게 가서 이리저리 대봤다.
[얘는 도대체 누구 닮아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어울리는 거야?]
“형아, 내 건 없어?”
“이건 민국이 거.”
나는 민국이 옷을 내밀었다.
내 안목으로 고른 것이니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었다.
“혀엉….”
“왜? 마음에 너무 들어?”
“이게 뭐야…. 으아앙.”
민국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얼른 달려왔다.
“민국아, 왜 그래?”
“엄마, 민국이 옷 아저씨 옷 같아. 으아앙!”
쩍- 머리가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아저씨 옷 같다니? 이 전성국이 고른 옷을!
엄마가 얼른 민국이를 달랬다.
“민국아, 이게 왜 아저씨 옷이야. 이것 봐. 아빠랑 형아랑 다 똑같은 거 하나씩 샀잖아.”
“으응?”
민국이는 그제야 좀 인상을 풀었다.
하지만 한여름 수박처럼 쩍 갈라진 나의 자존심은 이어 붙여지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중얼거리며 내 방으로 걸어갔다.
[동생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내가 얼마나 신중히 고른 옷인데. 아저씨 옷이라니…. 내 다시는 옷 사주나 봐라.]
이때, 뒤에서 민국이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형아, 형아랑 나랑 옷이 똑같아.”
[안다고. 저리 가. 나보다 아이큐는 높지만, 멍청한 것아.]
“형아, 형아랑 똑같은 옷 입으니 기부니가 좋아.”
민국이는 내 허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형아, 화났어?”
“형아 화났어.”
“형아, 난 형아랑 똑같은 건 뭐든 좋아. 미안해잉.”
민국이는 내 등에다 얼굴을 비벼댔다.
[이 멍충아. 내가 지금 입은 셔츠. 프라도라고!]
* * *
그레이스는 우리를 뉴욕의 사진 스튜디오로 안내했다.
“구수영 회장님이 카드도 안 쓰셨는데, 뭐 해드릴 게 없나 고민하다가 가족사진 한 장 찍어드리고 싶다고 해서요.”
역시 구수영 회장은 마음 씀씀이가 남달랐다.
나도 이 부분은 효진 그룹을 부러워했었다.
삼전 그룹 사람들은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옆을 보지 않는 경주마처럼 길러졌다. 당연히 커서도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것보다는 그룹의 이익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그에 반해 효진가 사람들은 조금 여유로운 면이 있었다.
곱슬머리에 둔탁한 안경을 쓴 포토그래퍼가 우리를 반겼다.
영어로 대충, 이런 멋진 가족을 봤나, 왜 이렇게 다들 잘생긴 거예요 등 늘 듣던 찬사를 쏟아냈다.
엄마는 지희와 같은 폴라의 원피스를 입었고, 아빠와 나 그리고 민국이는 같은 폴라의 티셔츠에 데님을 입었다.
예전 같으면 촌스럽게 맞췄다고 난리를 쳤겠지만, 오늘은 가만히 있었다.
사실 조금 좋기도 했다.
[전성국, 점점 촌스러워지는 거야? 촌스러우면 뭐 어때. 좋으면 됐지.]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자, 사진 찍을게요. 아버지가 막내따님 안으시고요, 다들 손잡아 보세요.”
내가 영어를 번역해주자 아빠는 얼른 지희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민국이는 엄마 손을, 나는 아빠 손을 꼭 잡았다.
“좋아요, 이제 찍을게요. 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