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필립 아카데미의 입학식이 시작됐다.
구수영 회장의 가족과 우리 가족까지 모두 총출동한 자리였다.
더군다나 필립 아카데미에서 동양인 입학생, 거기다 겨우 이제 열 살이 된 어린 나이의 나는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내 성적은 수백 명의 학생들 중에서도 3등이었다.
이것마저 1등 하면 너무 비인간적으로 보일까 봐 살짝 거리를 둔 성적이었다.
입학식은 간단히 끝났다.
그리고 이제 가족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엄마와 아빠는 이미 눈시울이 붉어졌다. 민국이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말이 없었다. 세상모르는 전지희만이 유모차에서 다리를 퉁퉁 튕기며 웃고 있었다.
아빠가 다가와서 나를 꼭 안았다.
“성국아, 아빠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 알았지?”
“응, 아빠.”
“성국아, 힘들면 우리가 있으니까 연락하고.”
“응, 엄마.”
대답은 이렇게 했지만, 이 정도 고난과 역경은 극복해야 대한민국을 이끄는 재벌이 되는 거라고!
근데 왜 자꾸 눈가가 뜨거워지지?
“으아앙. 형아! 형아!”
민국이가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민국아, 왜 울어?”
“형아, 나랑 한국 가자. 한국 가서 같이 놀자.”
[민국아, 같이 한국 갈 생각 하지 말고. 너도 미국으로 유학 올 만큼 공부를 좀 해라.]
엄마가 민국이를 말렸다.
“민국아, 그럼 형아 힘들어.”
“히이잉.”
민국이는 그 말에 울음을 뚝 그치고는 나를 쳐다봤다. 앙다문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혀엉, 방학마다 올 거지?”
“민국아, 공부 열심히 해서 너도 미국 유학 와. 알았지?”
“그럼, 형아랑 맨날 놀 수 있는 거야?”
“응, 그럼 형아랑 맨날 공부할 수 있는 거야.”
우리를 보고선 구수영 회장 가족은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구수영 회장의 부인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했다.
첫딸 예정이 엄마를 살폈다.
“엄마, 괜찮아?”
“니네 오빠 보딩스쿨 들어갈 때 생각나서….”
“여보, 성국이 입학식인데.”
“미안해요. 그냥 성국이가 저 어린 나이에 이 학교 들어가려고 얼마나 공부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나서 그래요. 엄마들은 그렇잖아요. 애가 공부 잘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내 아이가 행복했으면 하는 거요. 여보, 성국이는 행복한 거겠죠?”
이 말이 왜 내 귀에 들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얼른 구수영 가족에게 가서 인사를 드렸다.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구수영 회장의 부인이 무릎을 꿇더니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성국아, 건강 잘 챙기고.”
“네에!”
“성국아….”
“걱정 마세요. 저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요.”
그 말에 구수영 회장의 부인은 미소를 되찾았다.
* * *
가족들과 학교 탐방을 마치고 이제는 진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엄마는 내 손에 얼마 전에 찍은 가족사진을 들려줬다.
“성국아, 이거 책상에 놔.”
“응, 엄마.”
“성국이 여기 두고 가려니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아빠도 착잡한 기분인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엄마와 아빠에게 안겼다. 옆으로 민국이도 비집고 들어왔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우리 성국이 다 컸네.”
아빠가 내 등을 도닥였다.
저번 생에서 이런 이별이야 수없이 많았다.
방학마다 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바쁜 아빠와 엄마 대신 수행원을 거느리고 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땐 가족들과 헤어지는 게 이렇게 슬프지 않았는데….
아빠가 무릎을 꿇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성국아, 아빠도 성국이 많이 사랑해.”
그러곤 내 뺨에 뽀뽀를 퍼부었다.
[아빠, 이건 좀. 나 이제 열 살이야!]
아빠는 버둥거리는 나를 꼭 안고 눈물을 숨겼다.
촉촉한 아빠의 눈가를 보곤 나는 아빠 등을 도닥였다.
[정말, 아빠 언제 어른 될래.]
아빠도 내 등을 꼭 감쌌다.
“성국아, 아빠 돈 많이 벌어서 또 미국 올게.”
“응. 아빠 파이팅!”
* * *
나는 기숙사로 들어가면서도 주변을 계속 둘러봤다.
[마크 주크버스도 분명 입학했을 텐데….]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바로 마크 주크버스.
‘페이스 페이퍼’의 창업주였다.
하지만 영 마크 주크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번 학년 아닌가? 내가 착각했나….]
나는 하는 수 없이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이때,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의 남학생이 나를 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안녕, 와- 네가 최연소 입학생이구나. 내 이름은 마크 주크버스야.”
[드디어 만났군, 마크 주크버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그토록 찾던 마크 주크버스가 내 룸메이트였다.
[곱슬머리에 주근깨며. 생김새가 어릴 때나 커서나 그대로이네.]
나는 얼른 손을 내밀었다.
“난 성국. 전성국. 전이 성이야.”
“발음이 어렵네. 미국 이름은 없어?”
“응.”
“동양 친구들 미국 이름 잘 만들던데, 넌 왜 안 만들어?”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어서. 발음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이 이름을 부를 거니 너도 익숙해져야지, 마크.]
나는 속으로 장담했다.
마크는 내민 내 손을 잡고 흔들곤 어느새 시선이 내 책상으로 향했다.
“반가워. 근데 너 이게 다 뭐야?”
마크는 또래의 남학생답게 내가 가진 효진 그룹의 각종 장비를 부러워했다. 효진 그룹에서는 특별히 최신 노트북을 비롯해서 방에서 쓸 간단한 가전 도구까지 완비해줬다.
“마크, 컴퓨터 잘해?”
“당연하지.”
마크의 얼굴엔 자부심이 엿보였다.
사실 나와 마크는 악연이 있다. 물론 마크는 모를 악연이다.
마크는 몇 년 후 하버드에 들어가서 ‘페이스 페이퍼’란 다음 세기를 평정하는 SNS를 만든다.
이 일로 전 세계 손꼽히는 부호가 되고, 심지어 삼전 그룹의 시가총액을 몇 배나 앞서는 그룹으로 만든다.
그때 개인적으로 마크에게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취했지만, 마크는 바쁘다는 핑계로 삼전 그룹의 부회장인 나와의 미팅을 무시했다.
심지어 2차 산업이나 하는 그룹이 왜 자신을 만나려고 드는지 모르겠단 이야기가 뒤로 들렸다.
그때, 내 자존심이 제대로 구겨졌었다.
그 일 이후로 4차 산업의 시대에 새로운 콘텐츠 산업을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나는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번 생에서는 제대로 이 녀석의 등골을 빼먹을 작정이다.
마크는 나에게 ‘페이스 페이퍼’를 내밀었다.
“성국, 이거 봐. 신입생들 얼굴이랑 소개, 들어 있는 거야. 서로 친해지라고 학교에서 나눠주는 거래.”
“고마워.”
필립 아카데미의 신입생 소개서인 ‘페이스 페이퍼’에서 이름을 딴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성국, 근데 너, 어리지만 되게 잘생겼다. 사진도 엄청 잘 나왔어.”
마크는 생각보다 말이 꽤 많은 놈이었다.
“마크, 너도 엄청 귀여워.”
“위로하지 마. 나는 여자들한테 진짜 인기 없어.”
[응,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크는 ‘페이스 페이퍼’를 쭉 펼치더니 여자 사진을 가리켰다.
“성국, 얘 진짜 이쁘다. 그치?”
“이쁘네.”
마크의 여자 취향은 금발인가?
“와, 얘도 이쁘다. 뭔가 보이시해 보여.”
흑발에 쇼트커트?
“와, 빨간 머리도 이쁘다.”
[아하, 여자면 되는구나.]
마크는 누가 봐도 여자 한 번 만나본 적 없는 너드였다.
나는 마크의 장단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줬다. 어쨌든 이번 생에서 이 녀석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다줄 놈이다.
마크는 ‘페이스 페이퍼’를 다 보더니 이제는 내 책상과 물건에 눈독을 들였다.
“성국, 너 없는 게 없다? 니네 아버지 뭐 하셔?”
“우리 아빠 식당 하셔.”
“식당? 돈 잘 버시나 보다.”
“응.”
나는 대충 대답했다.
“우리 아빠는 의사인데, 정말 너무 짠돌이야. 내가 이번에 필립 아카데미 입학 기념으로 컴퓨터 좀 최신 사양으로 사달라고 했더니, 그냥 쓰던 거 들고 가래. 하버드 붙으면 사준대.”
“마크, 내 컴퓨터 같이 쓰자. 대신 이상한 동영상 다운은 하지 마.”
“와, 진짜?”
“응. 내가 프로그램 같은 건 잘 모르거든. 주말에 나 좀 가르쳐줘.”
“당연하지. 니 컴퓨터 안 그래도 너무 해보고 싶었어. 이상한 동영상은 내 컴에만 다운받아 놓을게.”
마크는 신이 나서 내 컴퓨터를 이리저리 훑었다.
구수영 회장에게 내가 특별히 부탁한 건 이 컴퓨터 한 대였다.
입학 선물로 카드까지 줬지만,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은 부모님.
구수영 회장은 조용히 내게 선물 하나를 말하라고 했고, 난 기숙사에 놓고 쓸 최신, 최고급 사양의 컴퓨터를 부탁했다.
그건 마크 주크버스를 포섭하기 위한 나의 큰 그림이었다.
마크는 이미 컴퓨터에 푹 빠져 있었다.
“성국, 이거 속도 장난 아니야. 대한민국 제품이야?”
“응. 대한민국이 가전제품은 잘 만들어.”
“대박. 나 좀 더 가지고 놀게.”
“얼마든지.”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말에게 당근을 준 기분이었다.
* * *
“성국아, 아침 수업 가자.”
“성국아, 점심 먹자.”
“성국아, 컴퓨터 나 좀 써도 돼?”
마크는 그 뒤로 나를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필립 아카데미의 수업은 생각보다 힘들긴 했다.
토론식 수업이 많아서 다들 테이블 같은 데 둘러앉아 수업을 진행했다.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자료도 열심히 준비해야 했고, 대화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괜히 학교 다닌다고 했나. 자퇴하고 검정고시 봐서 서울대나 갈까.
그 생각이 매번 미친 듯이 일었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성국, 이번 주말에 네 컴퓨터 써도 되지?”
“응, 마크. 근데 나 부탁할 일이 하나 있어.”
“뭔데?”
“그건 주말에 이야기 할게. 근데, 나 주말 오전에 근처 마트 가서 먹을 것 좀 사올 거거든. 마크는 뭐 필요한 거 없어?”
“나? 그냥 과자나 사다줘. 아, 내 과자는 돈 줄게.”
“아니야. 내가 부탁할 게 있으니 과자는 내가 살게.”
“그래.”
공짜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에.
* * *
그레이스의 차가 기숙사 앞에 서 있었다.
그레이스는 주말마다 학교로 찾아와서 같이 점심을 먹으며 학교에 잘 적응은 하는지에 대해서 확인했다. 그리고 간단히 마트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사고 나를 다시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레이스!”
“성국아! 잘 지냈어?”
“네, 그레이스.”
“학교 수업은 따라갈 만해?”
“어렵긴 한데, 따라갈 만은 해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근처 스테이크집으로 가볼까 하는데, 어때?”
“좋아요. 저, 마트도 가볼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 뭐 필요한 거 있어?”
“공부할 때 먹을 과자 좀 사고 싶어서요.”
나는 마크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레이스가 예약한 스테이크집은 맛과 분위기 모두 완벽했다.
“성국아, 이번 겨울방학 때부터는 네가 어느 대학을 목표로 할지 정하고 학점 관리와 특별활동 관리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생각해둔 대학 있어?”
“사실은 고민 중에 있어요.”
“뭐가 고민이야?”
“하버드에 갈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가서 서울대를 들어갈지요.”
그레이스가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레이스는 내가 한국에 있는 서울대를 고려 중이라는 사실을 놓고 신기해했다.
“성국아, 서울대도 좋지. 하지만 미국에 유학을 왔는데, 그냥 서울대를 가기에는 좀 아깝지 않을까? 서울대는 대한민국 최고지만 하버드를 비롯한 미국의 대학은 세계 최고잖아.”
알지만 서울대의 인맥이라는 것이 있다.
정재계에 뻗어 있어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검은 머리 외국인 취급당하기 쉬운 하버드 출신보다 서울대 출신이 좀 더 신뢰를 줬다.
“고민해 볼게요.”
“그래, 그러자. 네 성적으로는 하버드나 서울대 모두 가능할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테이크를 먹었다.
하버드냐 서울대냐, 이것이 문제라니.
[너무 잘난 것도 힘드네.]
* * *
“마크 과자 사왔어.”
나는 컴퓨터에 빠져 있는 마크에게 과자를 내밀었다.
“어, 잘 먹을게. 아, 성국아. 부탁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마크는 과자 봉지를 뜯더니 나를 올려다봤다.
“뭔데?”
“마크, 나랑 동업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