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빌 게이트와 만난 장소는 마이크로 세이버의 정원이 훤히 보이는 큰 회의실이었다.
햇살이 잘 들어왔고, 40대의 빌 게이트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는 동안이었다.
나와 마크가 들어가자 빌 게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영했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와 마크는 차례로 인사를 했다.
“이렇게 어린 천재들을 보다니… 내가 오래 살긴 살았나 봐요.”
[아직 팔팔할 40대에 늙은이 같은 소리는. 빌 게이트.]
빌 게이트는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음료는 뭐 마실래요?”
‘시원한 맥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마음을 꾹 눌렀다.
“시원한 우유요.”
“마크는?”
빌 게이트는 이미 우리 이름까지 외운 상태였다.
“저도 성국이랑 같은 걸로요.”
“제임스, 부탁해도 될까?”
“네, 얘기 나누고 계세요.”
제임스가 회의실을 나가고 나와 마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삼전은 정말 다닥다닥 붙은 책상에 앉아서 일해야 하는데, 이렇게 쾌적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부러웠다.
빌 게이트는 나와 마크를 번갈아 봤다.
“두 사람 나이를 듣고는 놀라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놀랍네요. 성국 군은 진짜 아홉 살 맞죠?”
“네, 한국에서는 한 살 더 많은 열 살이긴 해요.”
생일이 지난 지는 좀 됐다.
“정말 놀랍네요.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마크에게 주고, 마크는 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페이스 페이퍼’라는 새로운 SNS를 만든 거죠? 두 사람이서.”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도 옆에서 내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끄덕였다.
“정말 놀랍고 대단해요.”
빌 게이트는 연신 찬사를 늘어놨다.
오랜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인 삼전 그룹의 전주신 초대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칭찬만 하는 놈의 제안은 웬만하면 거절해라.
당연히 칭찬 뒤에는 비수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직원 한 명이 차가운 우유 두 잔과 커피를 가지고 왔다.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호텔도 근처로 잡았는데, 가봤어요?”
“비행기에서 내려서 바로 여기로 왔어요.”
내가 얼른 대답했다.
“마크 군은 생각보다 말수가 적네요.”
[설마. 마크가 입 한번 열면 잠을 못 자. 낯가릴 때가 좋을 때야, 빌 게이트.]
마크는 수줍게 웃었다.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요.”
“마크 군을 보니 꼭 내 고등학교 시절을 보는 것 같네요.”
빌 게이트와 마크 주크버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부유한 가정 출신이라는 점.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미쳐 있었다는 점.
지금으로서는 나만 아는 점이지만 하버드에 진학한다는 점. 그리고 둘 다 하버드를 중퇴하고 기업가로 성공해서 하버드로부터 명예 학사를 받는다는 점까지.
약간 너드 기운 가득한 외모도 비슷했다.
빌 게이트의 눈길이 내게로 향했다.
“성국 군은 정말 특별한 학생이네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유학 왔다고 들었는데, 맞죠?”
“네.”
“정말 어린 나이에 대단해요.”
[궁금하면 다시 태어나면 돼, 빌 게이트. 다만, 당신이 가진 복을 그대로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건 장담 못 하지.]
나는 우유를 쪽 마셨다. 어린아이답게. 귀엽게. 조금은 천진난만하게.
협상에서 가장 유리한 것은 상대가 마음을 놓게 만드는 것이었다.
빌 게이트는 나를 보며 아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여전히 어린이였고, 외모는 역변하지 않고 정변 중이었다.
“성국 군은 정말 장래가 너무 궁금하네요.”
“감사합니다.”
“자…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혹시 이 ‘페이스 페이퍼’ 만들면서 두 사람이 정확한 계약서 같은 거 썼나요?”
“네, 성국이가 제안해서 썼어요.”
역시.
빌 게이트는 우리의 계약관계가 궁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마크와 나는 계약서에 계약에 대한 내용은 비밀에 부친다고 했다.
빌 게이트가 나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겨우 열 살짜리가 지금 계약서까지 작성한 거 보고 놀란 거지? 빌 게이트.]
“계약 내용은 물론 비밀이겠죠?”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빌 게이트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곧 브리트니라는 여직원을 호출했다.
곧 문이 열리면서 한눈에 봐도 미인인 브리트니가 들어섰다.
마크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나는 빌 게이트의 꿍꿍이가 궁금했다.
“브리트니, 성국 군에게 우리 회사 좀 더 구경시켜 줄래요?”
“네, 대표님.”
빌 게이트가 나를 쳐다봤다.
“성국 군, 내가 마크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요?”
“그럴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빌 게이트의 꿍꿍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크를 공략하시겠다?]
빌 게이트는 나보다는 마크가 공략하기 쉽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같은 개발자라 그 부분을 공략할 게 뻔히 보였다.
* * *
브리트니는 미인일 뿐 아니라 대화도 잘 이끌었다.
“성국, 나도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어.”
“진짜요?”
“응. 대학 때 교환학생 기회가 있어서.”
“어땠어요?”
“무척 사람들이 바쁜 나라 같았어. 너무 다들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서 좀 무섭기도 했어. 저 사람들은 일만 하고, 놀진 않나.”
[물론 틈틈이 진짜 열심히 놀지. 다만, 일도 그만큼 많이 하지만.]
브리트니는 나에게 마이크로 세이버사의 기념품도 몇 개 챙겨줬다.
티셔츠와 연필 같은 거였다.
“성국, 근데 마크랑 같이 작업한 거 어땠어?”
멈칫.
[어라, 빌 게이트, 머리 좀 썼는데….]
이건 분명 빌 게이트의 지시이다.
나는 태연하게 웃으며 브리트니에게 대답했다.
“마크는 천재예요!”
* * *
마이크로 세이버사의 창문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으면서 마크가 호들갑을 떨었다.
“빌 게이트 대표가 글쎄 나보고 마이크로 세이버사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막 묻는 거야. 대박이지?”
“마크, 그것만 물었어? 뭐, 나랑 일한 게 어땠냐거나 하는 건 안 물었어?”
“물었나…. 아, 물었다.”
“뭐라고 대답했어?”
“성국이는 천재예요!”
마크와 내 대답은 결국, 똑같았다.
마크가 호텔 침대에 걸터앉더니 나를 물끄러미 봤다.
“성국, 근데 이상하긴 했어.”
“뭐가 이상해?”
“갑자기 나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찰리 잡스와 톰 워즈니악의 관계에서 개발자인 톰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데, 사람들은 컴퓨터도 모르는 찰리가 마치 세상을 바꾼 듯이 이야기한다고.”
찰리 잡스와 톰 워즈니악은 아플사를 설립한 두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찰리가 더 유명한 이유는 그가 아이디어맨이고, 프레젠테이션의 천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톰 워즈니악이 없었다면 찰리 잡스의 아이디어는 현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빌 게이트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뻔하다.
내가 낸 아이디어를 실현한 마크를 더 높게 산다고 슬쩍 치켜세워 놓고, 분명 ‘페이스 페이퍼’의 아이디어나 지분을 팔라고 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크, 넌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빌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페이스 페이퍼’가 물론 매력적인 SNS이긴 우리가 아플사처럼 될 거라 여기는 건가?”
[물론이지.]
나는 분명한 미래를 알고 있다.
“빌은 아마 과거에 자신의 아이디어로 성공해서 세계 최고 부자가 된 사람이라 멋진 아이디어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걸 거야. 마크, 다른 제안은 없었어?”
“아, 맞다. 마이크로 세이버사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재.”
마크의 눈이 반짝였다.
안 그래도 마크는 종종 마이크로 세이버나 아플사 같은 곳에 들어가서 일하고 싶단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우선 하버드를 가야 한다고 했어. 알잖아. 우리 부모님 보수적인 거. 고등학교 중퇴를 보고 계실 분들이 아니야.”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크가 마이크로 세이버사로 가버리면 ‘페이스 페이퍼’의 미래는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남은 방학 동안 ‘페이스 페이퍼’의 사업화를 구체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 같았다.
마크는 갑자기 들뜬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대박! 제시가 ‘페이스 페이퍼’ 친구 신청을 받아줬어! 대박! 대박! 성국아, 나 절대 고등학교 못 그만둬!”
마크는 기뻐서 방방 뛰었다.
[쯧쯧. 고딩들이란.]
그저 호르몬의 노예였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호텔로 연락이 왔다.
빌 게이트였다.
빌 게이트는 나만 따로 보고 싶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나는 의심 가득한 마음을 안고 빌 게이트와의 약속 장소로 나갔다.
빌 게이트와의 약속 장소는 마이크로 세이버 본사가 아니라 시애틀에 위치한 커피 전문점이었다.
지금 한국에도 들어와 있는 그 유명한 문벅스 본점이었다.
빌 게이트는 나에게 따뜻한 우유를 내밀었다.
[여기서도 우유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어쩔 수 없이 우유를 받아 들었다.
“잘 마시겠습니다.”
“성국, 여기 앉아서 이야기 좀 하면 어떨까?”
빌 게이트는 창가 쪽에 나란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잡았다.
[나랑 친한 척하고 싶은 거야, 빌 게이트? 그럼, 응해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빌 게이트 옆으로 앉았다.
“성국아, 여기도 정말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를 본 카페거든. 그만큼 아이디어라는 것은 중요한 거야. 앞으로는 더 그럴 거고.”
[하아… 미국도 꼰대는 있는 거구나.]
나는 최대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아, 너의 아이디어는 정말 너무 멋진 거 같아. ‘페이스 페이퍼’ 같은 게 내 생각에는 앞으로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거대한 플랫폼이 될 거 같거든.”
빌 게이트는 역시 사업가였다.
보는 눈이 있었다.
“성국아,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의 아이디어를 돈 주고 살 수 없을까?”
“‘페이스 페이퍼’를 사고 싶단 말씀이세요?”
“물론 ‘페이스 페이퍼’도 판다면 나는 기꺼이 얼마를 들여서라도 사고 싶어. 내 제안은 말이야. 앞으로 네가 낼 어떤 아이디어든 내가 사고 싶단 말이야.”
빌 게이트는 진지하게 나를 쳐다봤다.
[빌 게이트, 놀라지 마. 난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절대 당신과 거래하지 않아.]
나는 우유를 마시며 괜히 딴청을 부렸다.
“전 앞으로 공부하고 얌전히 살고 싶어요. ‘페이스 페이퍼’는 그냥 재미있어서 시작한 거고요.”
“앞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내 개인적으로든 회사 차원으로든 전폭적인 지지를 해줄게. 넌 좋은 생각이 나면 나에게 말해주면 되는 거고, 나는 그 아이디어를 돈으로 사는 거지.”
빌 게이트는 내 아이디어를 높게 평가했다.
나는 우유를 다 마시고는 컵을 내려놨다.
이제 대답을 해줘야 할 때였다.
“빌, 미안해요. 전 제 아이디어가 어느 개인이나 회사의 소유가 아니었으면 해요. 제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는 게 제 유일한 즐거움이거든요. 하지만 그걸 팔아버리면 제가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없잖아요.”
“그건 걱정 마. 개발 과정에서 네가 지켜볼 수 있게 조치를 취할게.”
“회사에서 제 아이디어를 사면 아마 제가 생각한 대로 나오지 않을 거예요. 회사에는 많은 사람들과 의결 기구가 있잖아요. 오랜 회의를 거치면 결국, 제 아이디어는 다 깎이고 말 거예요. 빌, 미안해요.”
빌 게이트는 낮게 웃었다.
“성국이한테 한 방 먹었구나. 공룡이 되어버린 마이크로 세이버에서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깎이고 말 거란 말이지?”
“그런 의미까지는 아니었어요. 회사라는 곳이 잘 보면 다 그렇더라고요.”
삼전 그룹 부회장으로 있을 때 늘 겪던 일이었다.
내게 최종적으로 올라오는 보고서의 아이디어들은 늘 그냥 그랬고, 어딘가 올드하기도 했다.
결제 시스템을 간소화하고, 내가 직접 회의에 들어가고 나서 그래도 좀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제대로 성장했다.
빌 게이트는 턱을 매만졌다.
“그래, 네 말이 맞지. 조직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하고…. 성국아, 내 제안은 앞으로도 유효할 거야.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연락 줘. 내 연락처 줄게.”
내가 핸드폰을 내밀자 빌 게이트가 번호를 입력했다.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번 생에서는 절대 가질 수 없었던 빌 게이트의 전화 번호였다.
* * *
“성국아, 어서 뛰어. 늦었어. 제시가 기다리겠어!”
비행기가 연착하는 바람에 제시와의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마크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고, 나는 일부러 배를 잡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얼른 화장실에 들어가서 마크에게 전화를 했다.
“마아크.”
- 성국, 목소리가 왜 그래?
“마크, 나 아무래도 배탈이야. 저녁 못 먹을 거 같아. 제시 기다리니까 어서 먼저 가. 난 그레이스 불러서 뉴욕 집으로 갈게. 미안해.”
- 성국, 괜찮아?
“윽. 안 괜찮아. 미안.”
탁.
나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크, 날 배신하지 않은 선물이야. 제시랑 맛있게 저녁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