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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86화 (86/231)

제86화

나는 화장실 안에서 시간을 좀 끌곤 시원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마크가 개수대에 기댄 채 서 있는 게 아닌가.

“마크?”

“성국, 괜찮아?”

마크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마크, 제시는 어떻게 하고 여기 있는 거야!”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어떻게 마련한 자리인데, 멍청하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올 뻔은 했다.

“성국아, 너 혹시 나랑 제시랑 단둘이 밥 먹게 해주려고 일부러 아픈 척한 거야?”

“아니야. 배는 진짜 아팠어. 하지만 둘이 밥 먹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했어.”

나는 거짓 반, 진실 반으로 이야기했다.

마크는 거의 울 듯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나를 와락 안았다.

“성국, 진짜 너밖에 없어. 성국아, 나 절대 너 배신 안 해.”

하필 핸드폰이 주머니 안에 있다니.

[이런 말은 녹음이 필수인데….]

나는 마크의 앙상한 등을 손바닥으로 토닥이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크, 빌 게이트한테 다른 제안 받았구나?”

“어?”

놀란 마크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저 마크와 제시가 단둘이 식사를 하게 하려고 배가 아픈 척 연기를 한 거였다. 배신 안 한다는 말이 나올 이유가 없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둘만의 대화가 있었다.

“마크, 괜찮아. 난 뭐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물론 가슴은 찢어질 거야. 난 너랑 제시가 진짜 잘되기를 바랐거든.”

“그, 그게….”

마크는 말을 더듬었다.

이 녀석, 긴장한 게 틀림없다.

긴장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다.

“마크, 나 그냥 갈까?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고 싶어.”

“미안, 말할게. 빌 게이트가 성국이 설득해서 ‘페이스 페이퍼’ 팔게 하면, 날 그 회사 대표 자리에 앉혀 주겠다고 약속했어.”

“넌 날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었어?”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어. 그리고 빌 게이트한테 대답도 안 했어.”

마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마크, 대답을 안 했다는 거는 너도 그 제안에 혹했단 의미 아니야?”

“그게… 그렇긴 한데. 난 네 의견 듣고 싶었어.”

“무슨 소리야. 난 분명히 안 판다인데.”

“그냥,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대, 빌은.”

[어쭈, 어느새 빌.]

마크는 당황해서 자기가 무슨 말을 떠벌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무릎 꿇은 마크의 어깨를 나는 딱 잡았다.

“마크. 분명한 건, 나는 ‘페이스 페이퍼’를 어디에도 팔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 좀 더 키울 작정이야. 그러니까 날 지켜보면서 설득할 생각 따위는 버려.”

“…아, 알았어. 성국, 미안해. 내 생각이 짧았어.”

마크는 곱슬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군.]

마크가 같이 ‘페이스 페이퍼’ 창업한 동료와 친구 모두를 배신한 거야 유명한 이야기였다.

“성국, 저녁 먹자. 나 배고파.”

“제시랑 먹지.”

“잠시 그럴까 생각했지만, 너 걱정됐어. 이건 진심이야.”

“마크, 고마워. 내가 저녁 살게. 햄버거 어때?”

“좋지.”

마크는 해맑게 웃었다.

어찌 됐든 아직 마크는 고딩이었고, 순진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그렇게 밝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 * *

뉴욕의 작은 햄버거 가게.

제시가 드레시한 드레스를 입고 햄버거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 앞으로 나와 마크가 앉았다.

제시가 환한 얼굴로 나와 마크를 반겼다.

“두 사람 우정, 너무 보기 좋은데.”

제시는 햄버거를 한 입 크게 깨물었다.

우리의 사연을 들은 제시는 근처 카페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마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성국, 근데 진짜 한국 들어갈 거야?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인데, 우리랑 여기서 보내자. 너, 뉴욕에도 숙소 있잖아.”

“원래 한국 사람들은 연말 연초는 가족과 보내. 나도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들도 보고 싶고.”

설마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엄마, 아빠야 자주 생각났지만 민국이랑 지희도 종종 떠올랐다.

저번 생에서는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시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이거 무슨 의미지? 어리다고 막 만지고 그러면 못써, 제시.]

마크는 이것마저 부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성국, 너무 그리울 것 같아.”

“제시, 금방 와서 학교에서 방학 특강 들을 거야. 그때 보면 되지. 참! 마크, 넌 크리스마스 때 뭐 해?”

나는 슬그머니 제시가 잡은 손을 뺐다.

“나도 뭐, 가족들이랑 밥 먹고 그럴 것 같긴 해.”

하지만 제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이게 나의 한계였다.

제시에게 마크를 더 가져다 붙였다가는 괜히 역효과만 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내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페이스 페이퍼’의 앞날도 아니고, 바로 마크의 연애사였다.

[마크, 미안. 이건 나도 어떻게 못 하겠어.]

* * *

“형아! 형아! 형아!”

민국이의 목소리가 게이트 안까지 들렸다.

나는 구예정과 구예리와 함께 연말을 가족과 보내기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성국아, 동생들 다 나왔나 봐.”

“그런가 봐요.”

“요 녀석, 비행기 안에서는 내내 시무룩하더니 얼굴에 생기가 도네.”

예정과 예리는 나를 차례로 놀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어서 이 문을 나가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다.

카트를 끌고 밖으로 나가니 예상대로 민국이가 스케치북을 찢은 게 분명한 종이를 들고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스케치북 위에는 ‘Welcome 형아!’라고 적혀 있었다.

그 뒤로 지희를 안은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나를 보더니 환하게 미소 지었다.

[겨우 6개월 만에 보는데, 다들 또 뭉클하게 왜 그래. 촌스럽게.]

“성국아, 우는 거야?”

구예리가 주책없이 물었다.

[우는 거 아니야. 그냥 하품 나와서….]

나는 그대로 엄마, 아빠에게 뛰어갔다.

“엄마, 아빠!”

“성국아!”

와락.

드디어 엄마와 아빠에게 폭 안겼다.

* * *

부엌에선 아빠가 요리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랜만에 김미영도 참석한 자리였다.

[김 대표, 오랜만이야!]

김미영은 나를 보더니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이 안 본 사이 더 컸네. 성국아, 미국 생활 어때? 공부는 할 만해?”

“네. 김 대표님, 회사는 어때요?”

“그때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감독님이랑 제작한 음식 경연 프로그램이 괜찮아서 지금 시즌2 준비 중이야. 성국이 아이디어 덕분에 잘 돌아가서 나랑 엄마랑 요즘 엄청 바빠.”

엄마는 여전히 내 이름으로 설립한 SKJ 엔터테인먼트를 운영 중이었다.

어른들의 일을 너무 꼬치꼬치 캐물으면 어린애답지 않다고 욕먹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나는 적당한 선에서 질문을 마쳤다.

며칠 같이 보내다 보면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꽤 있을 것이다.

이때, 뒤에서 민국이가 티셔츠를 잡아끌었다.

“형아, 놀아줘.”

[형아, 김 대표랑 사업상 할 이야기 좀 아직 남았어. 저리 가, 전민국.]

“형아, 놀아줘. 형아랑 놀려고 게임기도 샀어.”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거야.]

엄마가 나를 안으며 통통 엉덩이를 두드렸다.

“성국아, 민국이가 형 온다니까 정말 손가락 꼽으며 기다렸어. 어젯밤에는 형 언제 오냐고, 형 오면 자기 방에서 재울 거라면서 난리도 아니었어.”

34평 서울 아파트는 보통 방 세 개 화장실이 두 개이다.

내 방은 이제 민국이의 방이 됐고, 나머지 하나는 이제 지희의 놀이방이 됐다.

왠지 쓸쓸했다.

이제 이곳에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아서….

엄마가 그걸 눈치채곤 얼른 내 볼을 어루만졌다.

“성국아, 성국이 방 민국이가 써서 섭섭해?”

“…….”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의젓하게.

이게 흙수저로 태어난 첫째의 삶이었다.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형아! 게임 같이 하자!”

민국이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그래. 하자, 게임.”

“우와아아아!”

민국이는 나를 와락 안았다.

“오빠. 오빠.”

거기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지희는 내 바지를 잡고 연신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침을 야무지게도 흘리며….

[하아, 내가 또 책임질 녀석이 한 명 더 늘었네.]

나는 지희를 안아 들었다.

고새 꽤 무거워졌다.

“지희야, 오빠랑 게임 하자.”

“녜에!”

지희는 손을 번쩍 들었다.

* * *

“윽!”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눈이 번쩍 떠졌다.

민국이 녀석의 발이 내 복부를 강타했다.

민국이는 여전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민국이 다리를 들어서 보내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열 살, 여덟 살이라 해도 싱글 침대는 좁았다.

화장실이나 다녀올까.

이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엄마와 아빠의 대화가 들렸다.

두 사람은 거실에 작은 테이블을 펴놓고 맥주를 한잔 하고 있었다.

“자기야, 성국이 성적표 봤어?”

[그걸 이제 봤어?]

나는 흐뭇한 얼굴로 아빠의 대답을 기다렸다.

고등학교 첫 학기 나의 성적은 상위 1% 안에 들었다.

아무리 저번 생에서 서울대를 자력으로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머리를 가진 나였다지만, 이번 생은 또 달랐다.

필립 아카데미의 아이들은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영재들이었고, 슬슬 나의 저번 생 버프도 줄어드는 타이밍이었다. 정말 이번 성적은 나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봤지…. 근데 성적표 보고 좀 우울했어.”

[아빠, 왜? 내가 1등 못 해서 아빠 우울한 거야? 다음 학기 때는 1등 해볼게.]

아빠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성국이가 미국에서도 가기 어렵다는 그 학교에서 이 성적 얻으려면 얼마나 공부한 거겠어. 저 어린 게 공부하느라 고생했을 거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나도 그랬어. 성국이가 또 워낙 욕심이 많잖아. 분명히 지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을 거야.”

“그냥 성국이도 우리처럼 편하게 살면 좋을 텐데. 이제 나나 자기나 못 버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웬만한 가정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아빠와 엄마의 수입은 좋았다.

<원아저씨 보쌈>의 매출은 점점 늘어났고, 아빠의 가게 또한 직원을 여러 명 둘 정도로 잘됐다.

엄마와 김미영 대표가 함께 만든 SKJ 엔터테인먼트도 제작사로 자리매김 중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맥주를 한 잔씩 나눠 마시고는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소영아, 근데 성국이는 아마 돌아오라고 해도 안 돌아올 거야. 욕심 많아서.”

“응. 우리 그냥 성국이가 하는 대로 하게 그냥 두자. 삼청동 이 선생님도 그 말씀 하셨잖아.”

“소영아, 너 아직도 재상의 어머니가 될 상이라는 말, 기억해두고 있는 거야?”

“들켰네.”

엄마는 해맑게 웃었다.

[엄마, 걱정 마. 재상의 어머니 꼭 될 거니까. 근데….]

일어난 김에 화장실 갈 생각이었는데, 진짜 마렵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가서 엄마, 아빠의 단란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은데….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때, 뒤에서 민국이 녀석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형아, 민국이 쉬야.”

마침 잘됐다.

나는 얼른 민국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민국이의 손을 잡고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성국아, 민국아, 깼어?”

엄마가 얼른 다가왔다.

“엄마, 민국이가 쉬야 마렵대.”

“어, 엄마가 할게. 성국이는 어서 들어가서 다시 자.”

“나도 쉬야.”

“알았어. 자, 성국이 먼저 다녀올래?”

나는 민국이의 등을 슬쩍 밀었다.

“민국이 먼저. 난 참을 만해.”

“형, 고마워.”

민국이가 얼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엄마는 내 얼굴에 뽀뽀를 해댔다.

[엄마, 술 냄새 나.]

“우리 성국이가 다 컸네. 이제 형 노릇 제대로 하고.”

[엄마. 엄마가 잊어버린 모양인데,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운 건 나라고!]

아빠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았다.

“소영아, 너도 들어가서 자. 성국이랑 민국이 재우고 여기 내가 치울게.”

“고마워, 성국아. 엄마 먼저 잘게.”

“응!”

엄마도 졸린 눈을 비비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빠가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성국아, 내일 아빠랑 데이트하자. 알았지?”

[단둘이는 곤란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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