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아빠의 차가 바뀌어 있었다.
낡고 오래된 중고차가 아닌 얼마 전에 새로 뽑은 국산 SUV였다.
“와우! 아빠!”
나는 얼른 차 이곳저곳을 살폈다.
[전성국, 진정해. 겨우 국산 SUV에 감격하는 거야?]
속마음과 달리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녔다.
“아빠, 완전 멋져.”
“그치? 아빠가 큰맘 먹고 뽑았어. 우리 가족이 이제 다섯 명이잖아. 여행 가면 이 차에 다 타야지.”
오랜만에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아빠, 근데 오늘 어디 가?”
트렁크에 아빠가 상자를 잔뜩 싣고 있었다.
“어, 아빠 고향. 엄마는 민국이랑 지희 봐야 해서 성국이랑 아빠만 얼른 다녀오자.”
아빠 고향이라고?
그럼, 그곳은 바로.
* * *
<서촌보육원>이라는 표지판이 저 멀리 보였다.
아빠의 고향은 바로 보육원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동안도 보육원에 조금씩 기부를 해오고 계셨다. 하지만 매일 가게 문을 열어야 해서 그동안 직접 찾아오지는 못하셨다.
“성국아, 아빠 가게에서 이제 일하는 사람도 많다.”
“아빠, 몇 명이야?”
“두 명이나 계셔. 그러니까 아빠가 이제 오늘 같은 날 고향 갈 수도 있고. 참, 마음이 좋아.”
아빠의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분명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무시도 많이 당해서 상처도 많을 텐데, 그래도 고향이라고 좋은 모양이었다.
“성국아, 아빠랑 엄마가 자란 곳이니까 너도 잊으면 안 돼. 나중에 네가 커서도 좋은 일 생기면 여기 사람들 많이 도와줘야 해.”
“응, 아빠!”
나는 크게 대답했다.
[아빠, 당연하지. 난 기부 많이 할 거야. 돈 엄청 많이 벌 거야. 기부하면 세금 공제야.]
아빠는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정말 네가 우리 집에 태어나면서 아빠도 엄마도 인생이 바뀐 거 같아.”
[아빠, 또 사연 팔려는 거야?]
아빠는 가장 큰 단점 중 하나가 감정이 복받쳐오를 때마다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또 꺼낸다는 거였다.
그 첫 시작은 보통 나의 탄생이었다.
물론 나의 탄생은 특별했지만, 이걸 만날 때마다 들으니 좀 지겹기도 했다.
“성국아, 엄마랑 매번 정말 이런 이야기 한다니까. 만약 우리가 그 어린 나이에 성국이를 낳을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잠깐,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설마, 나 지우려고 했던 거야?]
이건 또 처음이라 새로웠다.
세포분열 단계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말이네.
“그때, 엄마랑 아빠랑 둘 다 너무 어리고 돈도 없어서 널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거든. 근데 엄마가 그러더라고. 우리 둘 다 버려져서 힘들게 자랐는데, 아이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끝까지 책임지고 싶다고. 아, 이런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거지.”
아빠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하며 말을 수습했다.
“성국아, 정말 네가 복덩이란 거야. 너 덕분에 엄마랑 아빠는 언제나 자랑스러워. 알지?”
“응! 아빠.”
[당연한 말을. 내가 안 자랑스러우면 누가 자랑스럽겠어!]
아빠의 차는 어느새 서촌보육원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나이 지긋한 원장님이 마중 나와 계셨다.
이미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빠 차가 보육원으로 들어서자, 손을 크게 흔드셨다.
“아버지가 마중 나오셨네.”
[아버지라고? 원래 보육원 원장님을 그렇게 부르나.]
아빠의 눈시울이 슬슬 붉어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아빠의 허벅지에 손을 딱 올렸다.
[아빠, 체통을 지키라고!]
크응.
아빠는 코를 들이켜곤 차를 세웠다.
“성국아,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자.”
“응!”
내가 차 문을 열고 내리자, 고아원 원장님이 환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지성아, 얘가 네 아들 성국이구나.”
“네, 아버지.”
“아이고, 진짜 어릴 적에 TV에서 보던 것처럼 잘생겼네. 엄마, 아빠도 어릴 적부터 이쁘고 잘생겼는데. 진짜 지성이랑 소영이 좋은 점만 빼다 닮았구나.”
“감사합니다.”
나는 예의 바르게 배꼽 인사를 했다.
“인사성도 바르고.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며?”
“얼마 전에 미국에서 들어왔어요. 효진 그룹 장학재단 장학생으로 뽑혀서 미국에서 공부 중이거든요.”
아빠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 자랑에 열을 올렸다.
[아빠, 팔불출이야. 제발 그만해.]
원장 선생님은 기특한 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성이가 진짜 공부 잘했는데. 더 공부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나도 많이 속상했는데, 아들이 이렇게 똑똑하구나. 지성이 닮았구나.”
[나 아이큐 121이야, 원장 선생. 그렇게 안 똑똑하다고. 내 성적은 나의 피, 땀, 눈물의 결과물이야.]
“아버지, 선물이랑 좀 가져왔어요.”
아빠는 민망한지 트렁크를 열어서 준비한 선물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매년 장학금 주는 것으로도 고마운데.”
“돈으로 하는 게 제일 쉬운 거죠.”
“내 애들 좀 부를게.”
“네.”
곧 건장한 남학생 여러 명이 조르륵 뛰어나왔다.
그러곤 나를 보고 놀랐다.
“와, 얘 나 어디서 봤는데.”
[나 TV 리얼리티 주인공이었어. 삼전 전자 전속 모델에. 모를 리가 없지. 어때, 영광이지?]
원장 선생님이 내 어깨를 잡더니 아이들에게 소개시켰다.
“우리 보육원 출신인 지성이 아들이야. 지성이 잘 알지?”
“<원아저씨 보쌈>이요!”
“그래, 편의점에서 파는 그거 만든 선배 아들인데, 어릴 적에는 아역으로 활동하고 지금은 장학금 받고 미국 유학 중이래.”
“와.”
남학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뛰어난 사람이라 경외감 들고 그렇지?]
이런 시선, 너무 익숙했다.
이때, 남학생 한 명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너무 귀여워요. 형이랑 놀까?”
“그래, 성국아. 아빠가 보쌈 준비할 동안 형들이랑 놀아.”
나는 어느새 형들이라는 사람들에게 끌려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보육원은 난생처음 방문했다.
물론 저번 생에서 수많은 고아원과 각종 지원 센터에 기부는 많이 했지만, 사진 찍히는 일 아니면 직접 나가지는 않았다.
난 낯선 보육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기가 엄마랑 아빠가 자란 곳이구나.
내 또래 아이들부터 고등학생 형과 누나들도 보였다.
모두들 해맑은 얼굴로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그 유명한 성국이인가 봐.”
“와, 진짜 잘생겼다.”
“TV 나오는 사람 처음 봐.”
내 손을 잡은 형이 애들에게 주의를 줬다.
“성국이 피곤해. 얘들아, 저녁 전까지 각자 공부하고 이따 보자.”
“네, 형.”
아이들은 대답을 하곤 순식간에 흩어졌다.
내 손을 잡은 형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곤 빙긋 웃었다.
“성국아, 애들이 너 진짜 신기해한다. 다들 우리 만나러 와서는 금방 인사만 하고 가거든.”
나도 예전에는 그랬다.
“성국아,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형아 방 보고 싶어요.”
나는 아빠도 썼을 그 방이 보고 싶었다.
* * *
여섯 명이 한 방을 쓰는 구조의 방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옷장 여섯 개가 붙어 있었고, 나머지 공간에서 이불을 깔고 자야 했다.
옷장은 사물함 역할까지 해서 교과서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형아, 공부는 어디서 해?”
“독서실이 있어. 거기서 하거나, 여기서 작은 책상 펴놓고 해.”
열악한 환경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영어책을 꺼냈다.
뭐 나에게는 껌이었다.
“성국아, 너 미국에서 공부하면 영어 잘하지?”
[당연한 말을.]
남학생은 얼른 책을 펼쳤다.
“여기 읽어봐. 고등학교 책도 읽을 줄 알아?”
내가 지금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거든.
나는 내색 않고 교과서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발음 완전 좋아. 영어 테이프 같아.”
어느새 모여든 아이들이 날 신기하게 쳐다봤다.
남학생은 부러운 듯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어떻게 공부하면 영어 너처럼 잘할 수 있어?”
[다시 태어나야지.]
그 말 대신 나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형, 다른 나라 말을 배우는 건 암기밖에 답이 없어요. 교과서 영어가 기본이니까, 하루에 한 장이라도 암기해 보세요. 우선 영어를 읽고, 한국어로 해석하고, 다시 영어를 읽으면서 뜻까지 암기하는 거예요.”
“와, 대박. 성국이 따라서 한번 해봐야겠다. 고마워, 성국아.”
[별말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때, 밖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국아, 어디 있어?”
남학생이 얼른 문을 열고 대답했다.
“성국이, 여기 있어요.”
“다들 저녁 됐으니까, 어서 먹자.”
“네에!”
남학생은 나를 챙겨 방을 나섰다.
나는 나가면서도 끝까지 열악한 방을 훑었다.
“흠.”
* * *
크리스마스이브의 보육원 특별식은 아빠의 보쌈과 소고깃국이었다.
아빠가 미리 배송해둔 고기와 김치로 식판마다 보쌈 고기가 듬뿍 담겼다.
“성국아, 너도 형들이랑 같이 먹자.”
“응.”
나는 아빠가 건네준 식판을 들고 형들 사이에 앉았다.
배식을 마친 아빠는 원장님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남학생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니네 아빠 보쌈, 진짜 맛있어. 나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요리 배우고 싶어.”
“공부 열심히 하면 될 거예요.”
“성국아, 요리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아빠 엄청 연구하고 노력했어요.”
“그렇구나.”
남학생은 뭔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보쌈을 먹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성국아, 나도 공부 열심히 할게.”
“네, 형아. 근데 형아 이름이 뭐예요?”
“전수현.”
“수현이 형, 나중에 힘들면 우리 아빠 한번 찾아오세요. 제가 말해둘게요.”
전수현은 얼떨떨한 눈으로 나를 봤다.
“아, 알았어. 고마워.”
어린 게 되바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아빠를 안 찾을 거고, 그렇지 않고 어떻게든 성공의 기회를 잡고 싶다면 아빠를 찾을 것이다.
기회는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기회를 잡는 것은 자신밖에 할 수 없다.
* * *
저녁 식사를 다 마치고, 아빠는 원장 선생님에게 천만 원의 기부 증서와 케이크를 비롯한 과자 그리고 준비한 옷까지 건네고 다시 차에 올랐다.
사진은 찍지 않았다.
아빠가 원해서였다.
매번 기록만 원하는 정치인들, 사회단체에 아빠 역시 너무 오랫동안 당했기 때문이다.
원장님은 차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다음엔 소영이랑도 같이 와.”
“성국이 동생들 더 크면 같이 올게요.”
“그래.”
“아부지도 건강하세요. 검진도 꼭 가시고, 영양제 꼭 챙겨 드시고요.”
“그래. 내 잘 챙길게.”
원장님은 아빠 차가 보육원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쳐다보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아빠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진짜 아버지와 이별하듯이.
“음. 흠. 성국아, 오늘 어땠어?”
아빠는 괜히 어색해해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좋았어요. 수현이 형이 자기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요리 배우고 싶대.”
“그래?”
“그래서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아빠 한번 찾아오라고 했어.”
아빠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우리 성국이 말이니까 기억해 둬야겠다. 전수현. 아까 보육원 구경시켜준 형이지?”
“응. 까만 얼굴에 여드름 난 형.”
나는 전수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삼전 그룹 부회장으로 있을 때, 관상가를 끼고 면접을 많이 봐서 사람 관상쯤은 대충 볼 수 있었다.
“그 형, 사람이 참 착해 보였어. 일도 잘할 거 같고.”
“성국이가 그 형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아빠, 나 전성국이야. 친절에 흔들리는 게 아니라, 사람은 한 명을 써도 제대로 된 사람을 써야 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이 나의 깊은 뜻을 도대체 아빠는 언제쯤 알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참, 성국아. 우리도 집에 가서 케이크 자르자.”
“응. 아빠.”
“왜?”
“나도 보육원에 기부 좀 하고 싶어.”
“성국이도? 뭘 기부하고 싶은데?”
“보육원 리모델링하면 얼마나 들까?”
아빠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빠, 앞 봐. 아빠는 지금 운전 중이잖아.”
“아, 근데 갑자기 왜? 성국아?”
“아빠 후배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지내면 사회에 나와서도 더 잘될 거 같아서.”
아빠는 흐뭇한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다들, 나 엄청 쓰다듬네.]
“아빠도 그 생각 했는데, 돈이 꽤 들더라. 그럼, 내년에 아빠랑 돈 같이 모아서 기부해볼까?”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아빠 기 좀 살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