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88화 (88/231)

제88화

- 가족 여행으로 2001년 1월 1, 2일은 문을 닫습니다.

<원아저씨 보쌈> 대표 전지성

아빠는 정직한 사람이다.

글씨만 봐도 알 수 있고, 굳이 개인 사정은 쓰지 않아도 되는데도 구체적으로 적고, 심지어 이름도 남겼다.

음식을 파는 사람에게 신뢰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덕목인지도 몰랐다.

아빠는 개인 사정이 적힌 종이를 붙이곤 얼른 차에 올라탔다.

뒤로 김미영의 차도 보였다. 그리고 김미영의 옆에는 익숙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

바로 나를 광고에 데뷔시킨 곽 감독이었다.

곽 감독은 한 번의 결혼 실패 후 김미영과 요즘 연애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다 엄마, 아빠의 대화 중에 캐치할 수 있었다.

어른들은 종종 애들이 TV에 빠져 있다고 여길 때도 아이들의 귀는 언제나 부모들의 대화에 꽂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아이들이 연기에 능숙하다는 사실도.

곽 감독과 김미영의 조합은 상당히 경제적인 조합이었다.

내가 삼전 전자 부회장이었다면 박수 칠 일이었다.

SKJ 엔터테인먼트와 훌륭한 감독의 만남이니 앞으로 일적으로 발전될 가능성도 많았다. 단점은 당연히 둘 사이의 균열이었다.

이번 여행에 잘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지도로 목적지를 살폈다.

아직 내비게이션이 상용화된 단계는 아니어서 다들 지도와 표지판에 의존해서 길을 찾을 때였다.

“성국이 아빠, 우리 목적지가 속초 한성 콘도지?”

“응.”

속초라….

정말 소박한 여행지였다.

민국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있었다.

“형아, 형아는 나랑 지희랑 누가 더 좋아?”

“그건 엄마와 아빠 둘 중에 누가 더 좋아랑 똑같은 질문이야, 전민국.”

나는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런가… 형아, 우리 속초 바닷가 가서 모래성 쌓자.”

“지금은 한겨울이라 그러다가 얼어 죽을 거야.”

“진짜? 그럼, 형아랑 뭐 하고 놀지.”

“민국아, 놀 생각 말고 공부할 생각을 하거나,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심도 깊게 고민해보는 건 어때?”

“심도 깊게가 무슨 말이야?”

“하아, 말을 말자.”

나는 눈을 감았다.

“형아, 잔다.”

“안 돼, 형아. 아, 형아. 책 읽어줘.”

민국이는 내 관심을 끌기 위해 평소에 읽지도 않는 책을 꺼내 내 눈앞에 내밀었다.

이건…

나는 놀란 눈으로 민국이를 바라봤다.

“형아, 읽어줘.”

“민국아, 진짜 읽어줘?”

“응. 형아 책장에서 봤어.”

민국이가 들고 온 책은 경제 전문서였다.

“민국아, 네가 진짜 읽고 싶은 책이야?”

“응! 형아.”

민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응! 형아.”

민국이는 몇 번의 물음에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란 말이지.

나는 얼른 경제 전문서의 첫 장을 펼쳤다.

[오랜만에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네.]

학교 공부를 떠나 간만에 보는 경제 서적이라 나는 이미 흥분 상태였다.

어서 고등학교 과정 같은 건 건너뛰고 내가 사랑하는 경영 공부나 실컷 하고 싶었다.

민국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형아, 어서.”

“알았어.”

민국이 녀석, 아이큐가 160도 넘는다더니 잘 키우면 연예인이 아니라 내 뒤를 이어 경영까지 참여할 수 있는 인재로 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경쟁자를 만들다니….]

나는 고개를 젓고는 책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나갔다.

[역시 재미있어. 흥미진진해. 어느 소설보다.]

내가 책에 빠져들 무렵,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엄마가 나를 돌아봤다.

“성국아, 이제 그만 읽어도 돼.”

이게 무슨 소리지?

“민국이 잠들었어.”

잠들었다고?

나는 얼른 옆 좌석의 민국이를 쳐다봤다.

민국이는 입까지 벌리고 잠이 든 상태였다.

“민국이 그 책만 읽어주면 집에서도 10초 안에 잠들거든. 그래서 가져온 것 같아. 성국아, 차에서 책 읽으면 눈도 나빠지고 멀미해. 엄마 주고 너도 창밖 구경해.”

엄마는 내 손에 들린 경제 서적을 가지고 갔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잠시나마 민국이를 내 경쟁자로 만들 생각에 들뜬 내가 한심했다.

나는 잠든 민국이를 내려다봤다.

[그럼, 그렇지…. 사람 안 변하지.]

그사이 아빠 차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 * *

숙소 창밖으로 울산바위가 보였다.

울산바위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번 생에서는 처음이었다.

나는 뒷짐을 지고 오랜만에 멋진 울산바위를 쳐다봤다.

“오빠!”

[하아, 민국이가 뻗으니 지희가 날 잡는구나.]

지희가 내 뒤에서 내 엉덩이를 팡팡 치고 있었다.

“오. 빠! 오. 빠!”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오빠밖에 없으면서, 연신 나를 잡고 늘어졌다.

그래, 할 일도 없는데 지희의 인생 계획이나 설계해 봐야겠다.

나는 얼른 지희의 손을 잡았다.

“지희야, 오빠 말 들리지?”

“녜에!”

“지희야, 오빠가 이제부터 간단한 테스트를 해볼 거야. 잘해보자.”

“녜에!”

지희는 뭣도 모르면서 대답만 잘했다.

아차, 이 시기에는 이 말밖에 할 줄 모르기도 했다.

나는 제일 먼저 지희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우리 집의 뛰어난 유전자로 못난 얼굴이 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나왔다.

“넌 도대체 누굴 닮은 거니?”

“오. 빠!”

[하아…. 그래, 못난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 집 유전자치고는 못났다는 말이야.]

지희는 히죽히죽 잘 웃었지만, 나와 민국이의 어린 시절 귀여움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했다.

[연기는 잘할까?]

나는 지희에게 연기를 주문했다.

“지희야, 웃어봐.”

히죽히죽.

웃긴 잘하지만, 광고 모델 같은 해맑은 미소는 아니었다.

웃을 땐 눈까지 작아져서 귀엽긴 했지만, 예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나는 지희에게 주문했다.

“지희, 굴러!”

뒹굴.

그게 끝이었다.

지희는 통통한 배에 가로막혀 천장을 본 채 대자로 뻗어버렸다.

[안 되겠군. 베이비 모델은 탈락.]

다음 테스트로 넘어갔다.

난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 각종 자료를 꺼내서 지희에게 보여줬다.

물론 두 돌을 앞둔, 한국 나이로는 겨우 세 살이 글을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빨리 습득하는지가 중요했다.

아이들의 뇌는 스펀지다.

한번 젖어들면 쭉 흡수한다.

다만, 물을 계속 공급해주지 않으면 말라비틀어지기도 한다.

나는 텍스트 파일을 열어 크게 이렇게 썼다.

- 나는 전지희 입니다.

그리고 소리 내 읽었다.

지희는 조금 반응을 했다.

“지희야, 읽어 볼까?”

“냐느응 저지희.”

[어쭈, 읽는데?]

만약 내 말을 기억했다가 읽은 거라면 학습 능력이 정말 뛰어난 것이었다.

이때, 지희가 텍스트 파일에 적힌 글자 하나를 가리켰다.

‘지’ 자였다.

“지희야, 이 글자 알아?”

“지!”

“뭐라고?”

“지!”

지희는 분명 ‘지’라고 발음했다.

나는 얼른 ‘희’ 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희야, 이건?”

“희!”

털썩.

난 주저앉고 말았다.

우리 집안에 천재가 태어났다.

* * *

“엄마, 지희가 자기 이름을 읽을 줄 알아.”

“지희가?”

“응.”

“지희 아직 세 살이야, 성국아. 아직 글 읽기에는 이르지.”

그러다 문득 엄마는 멈춰 서더니 다시 나를 쳐다봤다.

“맞다, 성국이는 그때 이미 한글 대충 알았지.”

[안 정도가 아니지. 엄마, 내가 수천 번도 더 말한 건데. 이미 그때 5개 국어 마스터했다고. 중국어는 양심상 뺀 거야.]

엄마는 막 준비하려던 음식을 그만두고,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성국아, 가보자. 엄마도 너 교육시켜 보니까, 조기교육이 정말 중요한 거 같아. 민국이는 엄마가 너무 방심했더니, 머리는 좋은데 공부에 영 관심이 없어.”

[엄마, 노력도 재능이야. 민국이는 그냥 재능이 없는 거야.]

지희는 내가 열어준 노트북의 키보드를 이리저리 치며 놀고 있었다.

엄마가 얼른 지희를 똑바로 앉혔다.

“지희야, 지희 이름 읽을 줄 알아?”

“녜에!”

지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자세히 보니 내 어릴 적 모습이 지희에게 얼핏 보였다. 물론 외모는 나를 못 따라왔지만, 영특함이 엿보였다.

엄마는 노트북에서 내가 쓴 텍스트 파일을 가리키며 지희에게 물었다.

“지희야, 여기 ‘지’가 어디 있어?”

지희는 거침없이 ‘지’ 자를 가리켰다.

“그럼, ‘희’ 자는?”

‘희’ 자도 거침없이 가리켰다.

“성국아, 다른 파일 없어?”

“내가 새로 쓸게, 엄마.”

나는 새로운 텍스트 파일에 엄마 이름과 아빠 이름 그리고 민국이와 내 이름까지 적었다.

엄마는 조심스레 물었다.

“지희야, 성국이 오빠 이름 어디 있어?”

“여. 기!”

지희는 또 한 번에 가리켰다.

이건 운이 아니었다.

분명 지희는 한글을 조금 아는 거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계속된 테스트에 지희는 거의 대부분을 맞혔다.

엄마와 난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성국아, 지희 너 닮아서 똑똑한가 봐.”

[그건 당연한 거고, 엄마.]

엄마는 얼른 지희를 안았다.

“지희야, 서울 가면 검사 한번 해보자.”

나는 턱을 매만졌다.

[지희가 나 같은 천재라….]

지희의 미래를 몇 가지 떠올렸다.

우선 머리가 좋은 거 같으니 공부 쪽으로 계속 밀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아직 언어 습득 능력 정도로 미래의 학습 능력까지 좋다고 확답할 순 없었지만, 분명 저 정도면 특별한 아이임에는 틀림없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빠가 횟감을 들고 들어왔다.

“소영아, 곽 감독님이랑 회 떠왔어. 이걸로 저녁 먹자. 애들 좋아할 튀김도 사왔어.”

“자기야, 우리 지희 말이야. 천재 같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성국이가 지희 이름을 한글로 알려줬더니, 단번에 자기 이름 아는 거야. 성국이가 노트북에 가족들 이름 적었는데, 그것도 탁탁 집었어.”

아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소영아, 지희 이제 겨우 세 살이야. 운이야, 운.”

“운 아니야. 진짜 다 맞혔다니까. 우리 한글도 가르쳐준 적도 없잖아.”

“소영아, 성국이도 마찬가지잖아. 촬영장 다니면서 콘티 보고 그래서 한글 혼자 깨쳤잖아. 심지어 성국이는 영어랑 프랑스어도 혼자 깨쳤어. 그 정도는 되어야 천재지. 지희는 천재 아니야.”

이런, 내가 천재의 기준을 너무 높게 올려놨군.

저번 생에서부터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교육만 받아온 내가 아무리 흙수저 가정에서 태어나 방바닥 구른 거 외에는 교육받은 게 없다고 해도, 저번 생의 지식이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희는 달랐다.

그러다 문득 등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나를 보고 히죽히죽 웃고 있는 지희에게 다가갔다.

지희는 오빠바라기인 만큼 내가 다가가자 안아달라고 팔을 짝 벌렸다.

나는 순순히 지희를 안았다.

이제 제법 무거웠다.

나는 지희를 안고 최대한 조용한 방으로 걸어갔다.

[전지희, 나랑 할 대화가 있을 것 같은데….]

어깨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났다.

전지희가 내 어깨에 침을 흘리는 거 분명했다.

어느새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여전히 밖에서는 지희가 천재일지 모른다는 엄마와 성국이만큼 천재가 아니면 천재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아빠가 대립하고 있었다.

나는 지희를 천천히 침대에 올려놓고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최대한 위협적으로 물었다.

거짓말 같은 것은 애초에 할 수도 없다는 듯이.

“전지희, 너… 다시 태어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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