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나는 재차 추궁했다.
“지희야, 너 다시 태어난 거지?”
그 순간, 지희의 맑은 두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울음을 터트렸다.
“엉마! 엉마! 엉마!”
엄마에게 아장아장 걸어가면서 손가락으로 나를 막 가리켰다.
[흠… 다시 태어난 건 아닌가 보군.]
엄마는 지희를 안고는 나에게 걸어왔다.
나는 괜히 창밖을 보며 딴청을 부렸다.
“성국아, 지희 왜 울어?”
“내가 뭐 물어봤는데, 답을 못 하더라고.”
“지희 아직 아기잖아.”
[난 세 살에 카메라 앞에서 뒹굴어가며 돈을 벌었다고, 엄마.]
나는 토라진 척 창밖을 바라봤다.
울산바위가 나를 내려다봤다.
“성국아, 곧 저녁 준비되니까 부르면 나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내 안의 나는 세 살이었던 적이 없다.
언제나 저번 생의 전성국의 나이 마흔에서 시작했다.
[나도 엄마한테 세 살이고 싶다고! 히잉.]
괜히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달칵.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살금살금 들어오는 게 민국이인 게 분명하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전민국, 형 장난칠 기분 아니야.”
“깜짝이야. 형아, 난 줄 어떻게 알았어.”
[네 발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
민국이가 짧고 통통한 팔로 나를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형아, 화 풀어. 나가서 밥 먹자.”
[내가 이런 거에 풀릴 줄 알아?]
“형아. 응? 형아.”
민국이의 짧고 통통한 팔이 나를 자꾸 자극했다.
“형아, 내가 이따가 아이스크림 줄게. 내 거.”
아이스크림?
갑자기 침샘이 폭발했다.
[전성국, 왜 이래. 그깟 아이스크림에.]
민국이는 연신 나를 안고 흔들었다.
“형아, 형아. 화 풀어. 맛난 거 먹자.”
[그래, 이 정도면 됐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국이가 환한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형아, 화 풀린 거야?”
“배고파서 그래.”
“알았어.”
민국이가 내 등을 도닥였다.
몇 년 민국이를 안 본 사이에 의젓해진 건 나만 느끼는 건가?
아니면 내가 어려진 건가?
문을 열고 나가자 엄마와 아빠가 테이블에 회와 각종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자기야, 내가 지희 밥 먹일게, 자기가 성국이랑 민국이 밥 좀 챙겨줘.”
“응. 성국아, 민국아, 이리 와.”
동시에 문이 열리면서 김미영 대표와 곽 감독도 같이 들어왔다.
“성국아!”
곽 감독이 내 이름을 반갑게 불렀다.
[아까 서로 차에 탄 거 다 봤잖아.]
내가 새침하게 굴자, 곽 감독이 오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 벌써 사춘기야?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닌다며?”
“네, 감독님.”
“야, 목소리도 이제 조금 굵어진 것 같은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곽 감독.]
곽 감독은 김미영이랑 같이 나타난 게 괜히 쑥스러워서 오버를 했다.
“준해 씨, 성국이 그만 놀려.”
“알았어, 김 대표.”
곽 감독의 이름이 준해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어쨌든 곽 감독이야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 중이 CF 감독이었다.
“성국아, 아저씨한테 미국 이야기 좀 들려줘. 학교는 재미있어?”
“네.”
“성국이 성적도 좋다며? 이러다가 하버드 가는 거 아니야?”
“가능하면 가려고요.”
곽 감독은 내 머리를 또 쓰다듬었다.
“미국은 언제 들어가?”
“이번 주예요. 다음 주부터 방학 특강이 있어서요.”
겨울방학 동안 진행되는 특강은 주로 상위권 학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다.
“감독님, 가셔서 식사하세요. 저는 얼른 애들 먹이고 갈게요.”
“성국아, 밥 잘 먹어.”
“네!”
나는 배꼽 인사를 하고 엄마가 내민 대게를 집어 들었다.
엄마는 먹기 좋게 살을 쏙쏙 발라준 상태였다.
나는 먹기만 하면 됐다.
엄마는 내 곁으로 와서 계속 대게 살을 쏙쏙 빼줬다.
“성국아, 많이 먹어.”
“엄마는 안 먹어?”
“엄마는 먹고 있으니까, 걱정 마.”
[거짓말. 아까는 지희 먹이고, 지금은 나랑 민국이 챙기느라 아무것도 못 먹으면서.]
나는 잘 발라진 대게 살을 엄마 입에 쏙 집어넣었다.
“성국이 먹으래도.”
“엄마, 나도 발라먹을 수 있어.”
“우리 성국이 다 큰 거야 엄마가 잘 알지. 성국아, 한국에 이제 일주일도 못 있잖아. 그동안 엄마가 많이 챙겨주고 싶어서 그래.”
엄마는 다시 발린 게살을 내 입에 쏙 밀어 넣었다.
[아, 한국 너무 좋아. 엄마 너무 좋아.]
저번 생의 전성국은 집이 싫었다.
가족과 함께 있는 게 불편했다.
“성국아, 더 먹을 거지?”
“응!”
나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응석을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 * *
삼전 호텔의 중식당.
구수영 회장과 부인, 그리고 방학을 맞아 들어온 구예정과 구예리도 함께한 자리였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삼전 호텔의 짜장면을 먹는 날이기도 했다.
꿀꺽.
목으로 침을 연신 삼키며 짜장면을 기다렸다.
엄마와 아빠도 흐뭇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혹덩이인 민국이와 지희는 집에서 이모님과 함께 동네 중국집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구수영 회장이 흐뭇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오늘은 저희가 특별히 주방장님 코스 요리를 부탁드렸어요.”
[짜장면이면 되는데….]
솔직히 어린이로 다시 되돌아가고 보니, 술도 마실 수 없는데 자잘한 코스 요리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저 달달한 짜장면이 최고였다.
“참, 성국이가요. 미국에서 SNS를 개발해서 빌 게이트의 초청도 받아서 마이크로 세이버사까지 다녀왔어요.”
구예정은 나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아빠가 멋쩍게 웃었다.
“저도 이야기는 들었는데, 믿기지도 않고. 솔직히 저나 집사람이나 그쪽은 전혀 몰라서요.”
“아버님, 진짜 대단한 거예요. 빌 게이트는 실제 만나기도 어렵고, 심지어 빌 게이트가 성국이가 개발한 SNS 사겠다고 정말 장난 아니게 로비했다고 들었어요.”
좀 부풀어진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 맞는 말이었다.
“성국아, 그 SNS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주겠니. 나도 잘 모르거든. 그 분야.”
구수영 회장은 역시 인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엄마, 아빠를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을 했다.
“‘페이스 페이퍼’라고 개인 블로그인데요. 대신 독특한 기능이 추가된 거예요. 예를 들면 예정이 누나랑 저랑 친구 사이이면 예정이 누나의 친구들도 저에게 친구 추천 기능으로 뜨는 거죠. 그렇게 되면 내가 IT 업계 일을 하는 사람이면, 그 분야의 새로운 친구들을 친구를 타고 타고 알게 되면서 인맥이 늘어나는 특징이 있어요. 그 기능을 마이크로 세이버사에서 굉장히 높게 평가했어요.”
“정말 대단하구나, 성국아.”
구수영 회장도 감탄했다.
엄마, 아빠도 이제는 대충 아는 것 같았다.
“성국아, 그걸 네가 생각해낸 거니?”
“네.”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 미래의 나에게서 가져온 아이디어지만, 지구상에서 내가 제일 먼저 만든 것은 사실이다.
구수영 회장의 질문은 계속됐다.
“그레이스 선생님 이야기 들으니 친구랑 같이 개발했다고?”
“네. 제가 아이디어를 내고 룸메이트인 마크가 프로그래밍해서 완성했어요.”
“그레이스 선생님 말로는 우리 법인 변호사에게 공증도 받았다고?”
“혹시 몰라서요. 뉴스 보면 종종 처음에는 같이 뜻을 합쳐서 개발했던 사람들끼리 싸움도 나고, 누군 이익도 못 가져가고 해서요. 저는 아이디어를 내고, 마크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정확히 50 대 50 지분을 가지는 계약을 했어요.”
아빠와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야기를 다 전해 듣긴 했는데, 성국이한테 들으니 또 놀랍네요.”
아빠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정말 성국이 같은 아들은 둔 두 분이 너무 부럽네요.”
구수영 회장의 부인도 흐뭇한 얼굴이었다.
“성국아, 마이크로 세이버사에 그 프로그램을 안 팔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니?”
“미국은 벤처의 나라잖아요. 투자를 받아서 회사를 일으켜보고 싶어요.”
“그래, 내가 뉴욕 법인에 말해둘 테니, 자문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감사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리가 들어왔다.
“성국이는 짜장면 먼저 먹고 싶지?”
“네, 회장님.”
나는 얼른 대답했다.
“여기 짜장면 한 그릇 먼저 내주시겠어요. 아이가 있어서요.”
구수영 회장이 직원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곧 직원이 짜장면을 들고 와서 잘 비벼 주기까지 했다.
“맛있게 드세요.”
직원이 짜장면을 내 앞으로 내미는 순간, 나는 게 눈 감추듯 짜장면을 흡입했다.
[역시 이 맛이야!]
한인타운에서도 절대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 * *
전재형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양 비서에게 성국이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성국 군이 ‘페이스 페이퍼’란 SNS를 룸메이트와 개발해서 마이크로 세이버사로부터 판매 제안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알아본 결과, 마이크로 세이버사의 빌 게이트가 성국 군에게 앞으로 성국 군이 내는 아이디어 모두를 사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성국이가 내는 아이디어를 모두 산다고?”
“네….”
“성국이의 대답은?”
“물론 거절입니다. 회장님도 잘 아시다시피 성국 군이 그런 푼돈에 움직이는 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전재형 회장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성국이를 놓친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성국이의 선택이었지만, 그런 인재가 삼전에 있었다면….
양 비서의 보고는 계속됐다.
“미국에서 공부 중이신 전태국 군과 전미진 양은 순조롭게 학교에 적응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됐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평범함이 아니었다.
성국이처럼, 남들과 다른 비범함이었다.
“효진 그룹에서는 다른 움직임은 없고?”
“성국 군이 준호 재단의 후원을 받는 것에 어떤 조건도 없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인재를 보조해 준다는 입장에서 성국 군을 후원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혹 다른 접촉이 있나 확인하고, 양 비서는 다시 성국이네 아버지나 어머니가 하는 SKJ 엔터테인먼트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게.”
“저희가 푸드 쪽은 없지만, 광고나 홍보 쪽으로 SKJ 엔터테인먼트와는 접촉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접촉하고 보고하게.”
“네, 회장님.”
전재형 회장은 답답한 마음에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성국이를 놓친 것은 정말 후회되는 일 중에 하나였다.
* * *
“우리 성국이가 좋아하는 김. 우리 성국이가 좋아하는 짜장라면. 우리 성국이가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잠옷….”
엄마는 큰 가방 가득 새로 산 물건을 담고 있었다.
“엄마, 이거 다 언제 샀어?”
“너 들어온다고 해서 엄마랑 아빠랑 시간 날 때마다 마트 가서 사놨지. 그레이스 선생님께 부탁해서 옮겨주실 분도 같이 나오신다니, 너무 걱정 마.”
엄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가방을 가득 채웠다.
나는 엄마의 허리를 꼭 안았다.
“엄마….”
엄마는 허리를 안은 내 손을 꼭 잡았다.
“성국아, 공부 많이 힘들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힘들면 언제든 한국 들어와도 된다는 거 알지?”
[알지. 하지만 안 들어올 거란 것도 엄마 알지?]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뽀뽀를 쪽 했다.
“성국아, 엄마랑 아빠는 어서 성국이가 공부 마치고 돌아와서 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저번 생에서 이런 말은 해주지 않았다.
다들 나를 몰아세우기 바빴다.
전교 1등.
그다음엔 서울대.
그리고 그다음엔 MBA.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민국이와 지희가 꼭 껴안은 우리를 발견했다.
“형아!”
“오. 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엄마, 꼬리잡기하는 거야?”
[하아, 이 감동 파괴범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