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92화 (92/231)

제92화

와인이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있었다.

하지만 열 살.

이 나이로는 대한민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와인 근처에도 못 간다.

나는 바로 눈앞에 있는 콜라를 잡았다.

느끼한 고기를 잔뜩 먹어서인지 콜라가 당겼다.

마크는 여전히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마크, 걱정하지 마.”

“걱정이 안 되긴. 거짓말을 했잖아.”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도 동업자인 마크에게는 귀띔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마크, 빌 게이트는 우리를 따로 직접 만났어. 그렇지?”

“응. 근데 그게 왜?”

“마이크로 세이버사의 오너가 우리를 직접 따로 만났다는 것은 어떤 직원도 우리에게 제시한 금액이나 조건을 모를 수 있다는 거야. 거기다 너나 나나 마이크로 세이버사에 ‘페이스 페이퍼’를 팔지 않기로 했잖아. 심지어 거절을 당한 입장이니 마이크로 세이버사에서 자신들이 내건 조건은 대외적으로 비밀일 거야.”

“제시 아버지가 알아낼 수도 있잖아.”

“아마 못 알아낼 거야.”

나는 확신했다.

빌 게이트는 우리에게 각기 다른 제안을 할 때에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최측근이 아니라면 그 제안을 알 수 없다는 의미였다.

혹시 무산될 경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크도 콜라를 마셨는데,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자식, 순진하긴.]

아직 마크는 순진하다.

순진한 녀석이 어느 순간에 변할지, 그 부분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마크, 마이크로 세이버사에서 저번에 간단한 채팅 앱을 1억 달러에 사들였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야.”

“알았어, 성국. 네 말 들으니 좀 안심이 되긴 하는데.”

그때,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크에게 조용히 하란 눈짓을 했고, 마크는 콜라를 연신 마셔댔다.

마이클 슈워츠만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시도 제시의 어머니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미안. 주말에는, 특히 이렇게 가족들과 시간 보낼 때는 비즈니스 관련된 전화는 안 받는데. 좀 급한 건이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 미안함을 어떻게 갚지?”

“아빠, 오늘 저녁에 저희 영화 볼 건데 늦게 잔다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시끄러워도 이해해 달라는 말이지?”

“네!”

제시 어머니는 나와 마크를 쳐다봤다.

“간식으로 뭘 만들어줄까? 제시가 고른 영화라면 분명히 남학생들이 지루해할 텐데.”

“전 팝콘이요.”

내가 대답하자, 마크도 고개를 끄덕였다.

“팝콘이야 쉽지. 윙이랑 음료도 준비해야겠네.”

“제시야, <스타워즈> 보는 건 어때? 그럼, 아빠도 신나게 볼 거 같은데.”

마이클 슈워츠만의 제안에 나와 마크는 흥분했다.

<브링잇온>보다야 <스타워즈>지!

하지만 제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빠, 이 영화 못 본 사람은 우리 학교 여학생 중에 나밖에 없단 말이야.”

“알았어.”

역시 딸 이기는 아빠는 세상에 없었다.

* * *

제시가 엄마를 도와 간식을 준비하는 사이에 마이클 슈워츠만이 나와 마크를 찾아왔다.

“잠자리는 안 불편하겠어?”

처음 대화는 역시나 일상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난 마이클 슈워츠만 같은 사람을 잘 안다. 허투루 시간을 쓰거나 쓸데없는 대화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숙사 침대는 정말 엉망인데요. 이건 너무 좋아요.”

마크가 침대에 앉아 튕기며 대답했다.

“다행이구나. 참, 아까 너희가 말한 ‘페이스 페이퍼’ 말이야.”

드디어 본론인가?

나는 마이클 슈워츠만을 주시했다.

“난 그 SNS의 확장성이 좀 궁금하거든. 지금은 살펴보니 필립 아카데미 학생들이나 근처 비슷한 보딩스쿨 학생들끼리 이용하는 정도인데. 뉴햄프셔에 있는 필립 아카데미 학생들이 뉴욕의 학생들과도 교류할 수 있을까?”

“물론이죠. 저희 SNS의 특징은 인맥이에요. 내가 가입하면 내 연락처 혹은 내가 한 번이라도 연락했던 사람들이 동시에 뜨는 거죠. 가입자가 많아질수록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이 SNS를 사용하게 될 거예요.”

“흠… 아주 재미있네. 한번 앞으로 좀 더 지켜봐도 될까?”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 슈워츠만이 나가고 마크가 투덜거렸다.

“성국, 정말 빌이 1억 달러를 제시할 거였으면 그때 팔 걸 그랬어. 솔직히 우리 둘이 그 돈 나눠도 평생 놀고먹어도 될 돈이잖아. 제시 아버지가 좀 더 지켜보자고 하는 건, 아직은 투자 안 하겠다는 말 아니야? 이러다가 확장성도 별로 없고 투자도 안 되면 내 고생이나 네 고생이나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잖아.”

“마크, 너는 1억 달러로 만족해?”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마크를 똑바로 쳐다봤다.

“마크. 너랑 나랑 지금 겨우 10대야. 아직 20대도 안 됐다고. 지금 실패한다고 해도 우린 또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지만, 지금 1억 달러를 받는다면 너나 내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은 없을 거야.”

이건 당연히 미래를 알기에 할 수 있는 허세 섞인 이야기였다.

내가 만약 미래를 몰랐다면?

당연히 1억 달러 챙기고 마크와 반 쪼개서 남은 인생 유유자적하게 살았겠지.

하지만 지금 이걸 포기한다면 십 몇 년 후에는 삼전 그룹보다 시가총액이 더 나가는 회사를 포기하는 것이다.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도 그러셨어. 우선 하버드에 들어가면 다른 기회는 얼마든지 올 거라고.”

“그래, 마크.”

나는 마크의 어깨를 도닥였다.

어쩌면 미래는 크게 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페이스 페이퍼’가 태동하는 것은 마크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3년 후이다.

SNS가 조금 더 익숙해지고, 고등학생 때보다 대학생 때 인맥 관리가 더 활발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때 ‘페이스 페이퍼’에 대한 투자가 더 실질적으로 이뤄지고, 기업화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바로 ‘페이스 페이퍼’의 공동 창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 * *

2003년.

모든 대학 입시가 끝났다.

나와 마크 그리고 제시는 나란히 하버드에 입학했다.

나와 마크가 개발한 ‘페이스 페이퍼’에 대한 에세이는 분명 하버드에 합격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페이스 페이퍼’는 주변 보딩스쿨 학생들 위주로 활발하게 활성화가 되었지만 고딩들의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발자인 마크가 갑자기 사춘기가 와서 1학년 때 성적이 떨어지면서 ‘페이스 페이퍼’에 대한 개발은 뒷전으로 둔 채 공부에 매진하는 바람에 내 아이디어를 아직 다 구현하지도 못했다.

이제 고등학교도 졸업하니, 슬슬 마크를 채찍질해볼 요량이다.

“성국!”

제시가 긴 금발을 휘날리며 식당 가운데로 걸어왔다.

제시는 3학년이 되면서 더욱 미모가 빛났다.

매일 제시와 밥을 먹는 나와 마크를 부러워하는 남학생들의 시선이 언제나 강렬했다.

마크는 3년 내내 제시와 붙어 다녔지만, 여전히 그녀 앞에서 부끄러움을 탔다.

제시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둘 다 졸업 파티 갈 거지?”

솔직히 말하면 난 관심 없었다.

한국 나이로 열세 살이 되면서 키도 172cm가 됐다.

174cm인 마크와는 이제 별 차이도 나지 않았다.

얼굴은 역변 아니고 정변해서 지나갈 때마다 여학생들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들 내 나이를 들으면 뒷걸음질 쳤다.

나이가 아직까지 나에게는 엄청난 벽이었다.

“마크, 갈 거야?”

내가 마크에게 먼저 물었다.

“난 파트너도 없는데, 뭐.”

마크도 시큰둥했다.

학교 제일의 인기녀 제시와 친구이지만, 마크의 그간 연애사는 전무했다.

존재감이 아예 없다는 말이 딱 맞을 것이다.

“성국, 갈 거야?”

“나도 파트너도 없고….”

대충 둘러대자는 심상이었다.

마흔 넘으니 싸구려 술이나 마시고 음악 시끄러운 데는 딱 질색이었다.

그런데 날 보는 제시의 왜 눈빛이 반짝이지?

설마?

“성국, 잘됐다. 나랑 같이 가자. 마크, 너는 내 친구 에이미 알지? 에이미도 지금 파트너가 없거든. 어때?”

나는 얼른 마크의 눈치를 살폈다.

마크는 조금 당황했지만, 어쨌든 졸업 파티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에 들뜬 얼굴이었다.

제시가 말한 에이미가 식판을 들고 우리 자리로 왔다.

유유상종. 끼리끼리라는 말이 딱 어울리듯 에이미도 제시 못지않은 미인이었다.

제시가 화려한 금발 미인이라면 에이미는 검은 머리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둘 중에 이번 졸업 파티의 프롬퀸이 나올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제시와 에이미는 ‘페이스 페이퍼’에서 가장 친구가 많은 여학생들이기도 했다.

“안녕.”

에이미가 자리에 앉자 마크는 또 괜히 딴청을 부렸다.

나는 얼른 마크의 팔을 잡곤 속삭였다.

“마크, 이번이 네가 졸업 파티에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니까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해. 알았지?”

“어, 성국.”

마크는 고개를 끄덕이곤 우유를 쭉 빨아 마셨다.

에이미가 빙긋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성국, 3년 전에 너 우리 학교 입학할 때만 해도 이렇게 크지 않았잖아. 지금은 마크 옆에 있어도 같은 나이 같아 보여.”

[뭐라고? 내가 그렇게 노안이라고!]

속은 버럭 했지만, 꾹 눌렀다.

제시가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미, 성국이는 그래도 아직 어려 보이지 않아?”

“당연하지. 성국, 너 눈이 너무 예뻐. 난 이렇게 반짝이는 눈은 처음이야.”

[에이미, 정신 차려. 네 파트너는 내가 아니라 마크라고.]

에이미의 태도는 사람을 조금 헷갈리게 했다.

설마 나한테 관심 있는 건가.

이때, 제시가 끼어들었다.

“에이미가 항상 우리 모임에 자기도 끼어달라고 했거든. 마크, 에이미 어때?”

“나야… 좋지.”

에이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제시에게 뭐라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크가 내게 속삭였다.

“성국, 저 둘이 널 두고 신경전을 펼치는 것 같은데.”

[이놈의 인기란….]

곧 제시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에이미랑 얘기했는데, 나랑 성국이랑 파트너로 가고 마크랑 에이미가 가는 걸로 하자. 어때?”

“어… 그래.”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아, 너는 어때?”

“제시, 에이미도 동의한 거야?”

뭔가 제시가 밀어붙이는 눈치였다.

에이미가 얼른 손사래를 쳤다.

“성국, 걱정 마. 내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

[뭔가 수상한데?]

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제시는 승리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미소를 지었다.

* * *

여자화장실.

에이미가 립스틱을 바르는 제시를 쳐다봤다.

“제시, 성국이 잘생기고 귀엽긴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잖아. 그런데도 성국이가 진짜로 좋아?”

“아직 연애 감정은 없어. 하지만 우리 학교에 성국이만큼 잘생긴 애도 없잖아. 그리고 나이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먹는 거잖아.”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은데. 암튼 네가 하버드 가서 소개팅 많이 해준다고 해서 마크 짝 하는 거 알지?”

“당연하지. 마크 잘 부탁해.”

제시는 립스틱을 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성국과 당장 연애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성국이의 성장을 계속 지켜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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