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자, 내가 직접 한 꼬꼬뱅이야. 다들 졸업 축하하고, 하버드 입학도 축하해.”
마이클 슈워츠만이 꼬꼬뱅이 든 그릇을 테이블 가운데에 놨다.
[얼핏 비슷하군. 마이클, 내 입맛에 맞추긴 힘들 텐데….]
대한민국의 전직 재벌로 전 세계 미슐랭 스타가 달린 레스토랑은 안 다녀본 곳이 없었다.
“성국, 마크. 접시를 줘봐.”
마이클 슈워츠만은 직접 접시에 꼬꼬뱅을 나눠줬다.
“이제 정말 다들 하버드생이 되다니 꿈만 같아.”
제시의 엄마는 빙긋 웃으며 나와 마크를 바라봤다.
“참, 다들 성국이가 이번 프롬 때 제시의 파트너지?”
“네.”
“마크는 누구랑 가니?”
“에이미요.”
졸업 파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이에 나는 마이클 슈워츠만이 만들었다는 꼬꼬뱅을 한 입 먹었다.
그 순간, 미간이 구겨졌다.
너무 익숙한 맛이었다.
나는 마이클 슈워츠만을 슬쩍 쳐다보다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성국아, 맛이 어때?”
“맛있어요. 정말로요.”
[마이클, 어디서 수작이야. 이거 미슐랭 프랑스 식당 ‘무슈’에서 사온 거잖아.]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클 슈워츠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작은 것에서 사람의 특징은 드러난다.
마이클 슈워츠만의 성공은 분명 가로채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아빠, 진짜 맛있는데. 저번에 한 것보다 훨씬 맛있어!”
딸조차 속이다니….
미안하지만 제시의 미래가 어두워 보였다.
나는 ‘무슈’의 꼬꼬뱅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접시를 싹 다 비웠다.
마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먹어본 꼬꼬뱅 중에 제일 맛있는 거 같아.”
마크는 감탄까지 했다.
“다들 맛있게 먹어주니 기분이 좋네. 여보, 우리 와인 한 병 딸까? 애들 졸업 기념으로 이제 한 잔씩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성국이는 안 되죠.”
[이럴 때만 꼭 나이 찾더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이클 슈워츠만은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와인을 따랐다.
내가 전직 재벌일 때 즐겨 마시던 레드 와인이었다.
마크는 와인 한 잔에 벌써 귀까지 빨개졌다.
“딱 한 잔씩만 해.”
마이클 슈워츠만은 엄한 아빠인 척하며 자신도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꼬꼬뱅 그릇을 다 비워갈 때쯤 제시 어머니가 제시를 불렀다.
“참, 제시야. 이번 프롬 파티 때 입을 드레스에 할 귀걸이를 안 챙겼네.”
“그걸 잊으면 어떡해, 엄마.”
“여보,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제시한테 줄 거 챙겨서 우리는 내려올게요.”
“응, 천천히 와.”
[뻔하게, 왜들 이러시나.]
보나 마나 마이클 슈워츠만의 계략이었다.
마크는 와인 한 잔에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두 눈만 끔뻑였다.
하지만 나는 멀쩡했다.
내가 먹은 거라고는 콜라밖에 없었다.
[자, 마이클 슈워츠만! 제안을 해보시지.]
마이클 슈워츠만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나를 쳐다봤다.
“성국, 마크. 이제 하버드생도 됐으니 ‘페이스 페이퍼’를 본격적으로 키워보는 게 어때? 우리 회사에서도 그동안 쭉 ‘페이스 페이퍼’를 지켜보면서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거든.”
“진짜요?”
마크는 벌써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마이클 슈워츠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페이스 페이퍼’에 투자하는 대신 우리에게 ‘페이스 페이퍼’의 지분 50%를 주는 조건이야.”
[이런 도둑놈을 봤나.]
마크는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차분하게 입을 닦았다.
지금 기분으로는 당장 이 테이블을 엎어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모든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기도.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는 판이 이곳이었다.
나는 마이클 슈워츠만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감사한데요 저희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2년 동안 갈고닦았잖아.”
“아니에요. 마크랑 저랑 그동안 공부 때문에 ‘페이스 페이퍼’는 뒷전이었거든요. 둘 다 하버드 붙고 나서 하버드 입학 전까지 미친 듯이 놀고, 그다음에 이 문제를 생각하기로 했어요. 솔직히 창업을 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자신도 없어요. 마크, 그렇지?”
“응. 아저씨, 죄송해요. 성국이 말대로 저희가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마크는 내가 시킨 대로 말을 했다.
제시네로 오는 길에 나는 마크에게 마이클이 어떤 제안을 해도 내 말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마크는 약속을 지켰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우리는 이제 시작해 보려고 했는데….”
“아저씨, 저희 하버드 입학 전까지 신나게 놀고 그다음에 업데이트되는 대로 바로 보여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성국이가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마이클 슈워츠만은 와인을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마이클 슈워츠만은 내 말을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열세 살이 하는 말은 대부분 믿었다.
제시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이야기 다 끝났어? 엄마가 엄마 고등학교 졸업 파티 때 한 액세서리 다 빌려줬어.”
마이클 슈워츠만은 허허 웃었다.
“제시야, 엄마가 프롬퀸이었다는 건 알지?”
“당연하지.”
“아저씨는 프롬킹이셨어요?”
마크는 마이클 슈워츠만에게 물었다.
마이클 슈워츠만은 마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난 프롬킹의 친구였어, 마크.”
* * *
[하아, 이 나이에 하이틴 영화에서 하듯이 파티에 가야 하는 건가….]
나는 슈트를 차려입고는 한숨을 내시고 있었다.
마크는 나보다 먼저 슈트를 차려입고는 계속해서 거울 앞을 떠날 줄 몰랐다.
“성국, 나 좀 봐. 머리 올리는 게 나아? 아니면 내리는 게 나아?”
“반만 내리는 거.”
“오케이!”
마크는 다시 머리를 매만졌다.
나는 슈트의 단추를 채우고는 머리를 그냥 흔들었다.
“성국아, 넌 뭘 해도 그냥 잘생기고 멋있냐.”
마크가 옆에서 감탄했다.
“마크,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내가 잘생겼어?”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제 한국 나이로 열세 살이다.
키도 마크만 하고 얼굴이야 어릴 적 얼굴 그대로 자라 한국에서는 잘생겼단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지만, 미국에서는 상황이 다를 것 같았다.
조금씩 2차 성징의 징후들이 나타나서 곱상했던 얼굴이 뚜렷해지긴 했는데… 내가 보기엔 별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성국아,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니야. 난 진심으로 묻는 거야. 한국에선 워낙 어릴 적에만 있어서 다들 귀엽다고는 했는데… 지금은 어떨지 몰라서. 그리고 미국이랑 한국은 미남의 기준도 좀 다르잖아.”
“성국아, 난 정말 네 얼굴의 반만이라도 생겼으면 소원이 없겠어.”
[잘생겼단 얘기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넥타이를 마저 맸다.
“성국아, 너 넥타이 진짜 잘 맨다. 나도 좀 도와줘.”
[당연하지. 저번 생에서는 매일 넥타이를 맸다고.]
나는 얼른 마크의 넥타이를 매만지고 어깨를 토닥였다.
“마크, 이제 파트너들 데리러 가볼까?”
“좋지!”
* * *
제시와 에이미가 사는 기숙사 앞에서 나와 마크를 비롯한 수많은 남학생들이 슈트를 차려입고 파트너를 기다렸다.
문이 열릴 때마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학생이 나와 파트너를 찾아갔다.
드디어 제시와 에이미가 나왔다.
“와아!”
자신의 파트너를 기다리는 남학생들마저 감탄을 내뱉었다.
그만큼 제시와 에이미는 아름다웠다.
에이미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마크의 손을 잡았다.
“마크, 오늘 멋진데?”
“고마워.”
그리고 제시가 내 손을 잡았다.
“성국, 오늘 정말 멋지다.”
“제시도 오늘 정말 아름다워.”
[솔직히 제시, 미안한데 내 취향은 아니야.]
나는 제시의 손을 잡고 프롬 파티가 열리는 강당으로 향했다.
* * *
[유치해. 유치해. 유치하다고!]
강당 안은 혈기를 주체 못 하는 10대들의 난장판이었다.
되도 않는 춤 실력으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바빴고. 어둠이 내린 곳곳에서는 진한 스킨십을 하는 커플도 보였다.
마크는 에이미와 몇 번 춤을 추고 들어와서는 음료수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성국, 왜 춤 안 춰?”
[너라면 힙합곡에 맞춰 춤추겠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취향인 노래가 없어.”
“제시가 기다리잖아.”
제시는 다른 남학생들의 제안도 모두 뿌리치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졸업 파티인데….]
때마침 귀를 울리는 힙합곡들의 메들리가 끝나고 달달한 팝 발라드가 나왔다.
나는 제시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제시, 나랑 춤출래?”
“물론이지.”
나와 제시가 무대에 나가자 모두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놈의 인기란….]
저번 생에서 잠시 왈츠와 같은 춤을 배운 적이 있었다.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세계 각지의 파티에 초대받다 보면 예기치 않게 춤을 춰야만 할 때가 있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제시를 리드하자, 제시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어디서 왈츠는 배운 거야?”
“인터넷.”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어느새 제시는 얼굴을 붉히며 나의 리드에 맞춰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커플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춤추기에 바쁜 것에 반해 우리 커플의 팝 발라드에 맞춘 왈츠는 단연 눈에 띄었다.
제시는 자꾸만 내 눈을 바라봤다.
[부담스러워, 제시.]
나는 속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이때였다.
제시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제시, 그러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성국아, 하버드 가면 나랑 사귈래?”
결국, 제시의 입에서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제시, 미안한데 나 겨우 열한 살이야.”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미국 나이로는 열한 살이었다.
한마디로 정신 차리란 이야기였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한 말이야…. 성국아, 잊어줘.”
제시는 얼른 수습했지만,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럴 때 여자를 그냥 당혹스럽게 두는 것도 남자가 아니지.
나는 맞닿은 제시의 손에 힘을 주고 제시를 쳐다봤다.
“제시, 내가 좀 더 큰 다음에 이 이야기 하자.”
“그래, 성국….”
그제야 제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자, 2003년 필립 아카데미의 프롬퀸과 프롬킹의 결과 발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는 무대에서 마이크에다 대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 귀 안 먹었어. 조용히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고.]
졸업생들은 모두 발표에 귀를 기울였다.
제시는 이미 프롬퀸이 된 듯 한껏 자세를 바로 하고 서 있었다.
어느새 마크와 친해진 에이미도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마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프롬퀸은 제시가 되겠지?”
“글쎄.”
“성국, 넌 누구 이름 적었어?”
“난 안 했는데….”
마크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제시가 프롬퀸이 되고 싶어 한다는 거야 누구보다 나와 마크가 잘 알았다.
나는 얼른 마크를 진정시켰다.
“마크, 난 열한 살이잖아.”
“성국, 너 외모랑 말하는 거 보면 절대 열한 살로 안 보여. 암튼, 매번 놀란다니까.”
마크는 실실 웃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마크가 적은 사람이야 당연히 제시일 것이다.
“자, 2003년 필립 아카데미의 프롬퀸은! 제시 슈워츠만!”
제시는 파트너인 내게 다가와 얼른 나를 안았다.
“제시, 축하해. 어서 무대로 올라가.”
나는 얼른 제시에게 예의상 축하를 건넸다.
제시에게는 프롬퀸의 왕관이 쓰였다.
여학생들은 시기 어린 눈으로 제시를 쳐다봤고, 남학생들은 넋 놓고 제시를 쳐다봤다.
“자, 이제 프롬킹만 남았는데요. 이 아름다운 프롬퀸을 차지할 오늘 밤 최고의 남자 프롬킹을 발표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에 맞춰 뒤에서 북 두드리는 음향효과도 났다.
사회자는 쪽지를 펼쳐보더니 누군가를 찾듯 무대 아래를 훑었다.
“자, 올 2003년 필립 아카데미의 프롬킹은! 성. 국.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