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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95화 (95/231)

제95화

“10시 땡 하자마자 기숙사에 들어온 프롬킹은 너밖에 없을 거야.”

“난 열한 살이잖아.”

“성국, 내가 열한 살에 너 정도 외모에 피지컬이었으면 정말 동네 여자들은 다 만나고 다녔을 거야. 네가 유교적인 한국에서 자란 건 알지만, 여긴 미국이야. 미국이라고.”

물론 나도 잘 안다.

다만 내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여자와 남자관계에 얽혀서 보낼 시간에 나는 재벌이 될 생각을 하는 게 생산적이라고 여겼다.

재벌이 되면 여자들은 절로 따른다.

나는 괜히 말을 돌렸다.

“마크, 너나 에이미랑 더 놀다 오지 그랬어?”

“에이미가 피곤하대. 그래도 다음 주에 같이 영화 보기로 했어. 에이미가 대학 가도 서로 친하게 지내재.”

“에이미 학교는 뉴욕 아니야?”

“뉴욕과 보스턴은 멀지 않잖아. 에이미가 나 좋아하는 거 같지?”

[그럼, 오늘 밤 들어와서는 안 되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국, 뭐 보는 거야?”

“졸업식에서 읽을 졸업사. 학생 대표로 내가 하잖아.”

마크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성국, 너란 사람으로 살면 도대체 어떤 기분이야?”

“마크, 술 마셨어?”

“조금.”

졸업 파티 강당 뒤에서 싸구려 술을 학생들이 돌려 마시곤 했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 성국. 너같이 잘생기고, 똑똑하고. 여자들한테 인기까지 많고. 그런데 세상 까칠해. 그게 또 여자애들이 목메는 매력이야.”

마크는 내 매력을 술술 읊어줬다.

“마크, 난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집에 태어났어. 엄마, 아빠는 고아야. 부모님도 안 계시고, 세상에 아무 의지할 곳 없어서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나를 낳은 거야. 정확히 말하면 나를 가져서 결혼한 거지만. 내가 맨 처음 태어난 곳은 세 식구가 한방에서 다 사는 그런 공간이었어. 아빠는 하루 종일 일하고도 한 달에 50만 원도 못 벌어왔어. 마크, 그래도 내가 부러워?”

“성국, 네가 모르는 게 있나 본데. 어쨌든 지금의 너는 정말 완벽해.”

[나 전직 재벌 전성국이야… 당연한 소리를.]

드르렁. 드르렁.

어느새 마크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졸업사를 한 번 더 읽었다.

아까 마크에게 말한 것은 내 졸업사의 일부분이었다.

* * *

잠시 후면 졸업식을 보기 위해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동생들이 JFK 공항에 도착한다.

지난 2년 동안은 공부 때문에 한국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많이 컸듯이 동생들도 많이 컸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성국아, 이렇게 큰 모습 보면 부모님이 정말 기뻐하실 거야.”

몇 번 인터넷으로 학생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내드리긴 했지만, 실물과 사진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민국이와 지희가 걸어 나왔다.

아빠가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성국아!”

엄마도 곧 나를 발견하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달려왔다.

“성국아!”

나도 얼른 엄마, 아빠에게 달려갔다.

“엄마, 아빠….”

와락.

아빠와 엄마가 나를 안았다.

아빠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언제 이렇게 큰 거야? 조금만 더 크면 이제 아빠만 하겠는데….”

“성국아, 이제는 엄마보다도 키가 크네.”

진짜 엄마보다도 이제는 키가 컸다.

“형아!”

“오빠!”

뒤에서 민국이와 지희가 나를 와락 안았다.

민국이 녀석은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고, 지희는 이제 잘도 걸어 다니는 다섯 살이 됐다.

“지희야, 오빠 기억해?”

“응!”

대답도 잘했다.

아빠가 우리를 모두 안았다.

“드디어 우리 가족 다 모였네.”

* * *

아빠는 뉴욕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삶은 보쌈에 한국에서 공수한 김치까지 꺼내서 아빠표 한 상을 차렸다.

엄마가 아빠의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이가 아빠가 한 보쌈이 제일 먹고 싶다고 해서 한국 떠나기 전에 김치도 새로 담아서 진공포장 하느라고 정신없었어요. 참, 성국아! 아빠 가게 확장했는데, 보여줄까?”

“응!”

엄마는 디지털카메라에 담긴 아빠의 가게를 보여줬다.

“원래 아빠 가게 옆에 있던 치킨집까지 아빠가 사서 확장했어. 테이블도 엄청 많아지고, 손님도 많아.”

편의점 상품이 효자가 되면서 아빠의 가게까지 덩달아 잘됐다.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은 IMF 외환 위기 상황을 완전히 극복하고 다시 호황기에 접어들었다.

“참, 성국아. 우리 집 이사 갔어. 너 이제 대학 가고 한국 자주 들어오면 성국이가 지낼 방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건 나랑 상의했어야지. 내가 전문가인데.]

“민국이 학교 때문에 같은 단지 안에서 제일 큰 평수로 이사 갔어.”

“형아, 우리 집 엄청 넓어. 운동장만 해.”

[그래봤자, 60평일 텐데. 그게 뭐가 넓어.]

“성국아, 네 방도 따로 만들었어.”

엄마는 새로 이사 간 집 사진도 구석구석 보여줬다.

여전히 알뜰한 엄마였다.

집만 커졌지 예전에 쓰던 가전과 가구들도 모두 가져왔다. 하지만 내 방과 민국이, 지희 방은 새 가구로 맞췄다.

“자기야, 우리 성국이 방 침대 큰 거 할 걸 그랬어. 성국이가 이렇게 클 줄 몰랐네.”

“돈 더 열심히 벌어서 바꿔주지.”

아빠는 해맑게 대답했다.

“참, 성국이 어머님, 아버님. 성국이가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서 남자 중에서 인기투표 1등을 했어요.”

“어머, 미국은 그런 것도 해요?”

엄마, 아빠가 미국의 고등학교 생활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네, 졸업 파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 남자를 뽑아서 그 해의 프롬퀸, 프롬킹이라고 하거든요. 성국이가 거기에 뽑힌 거예요.”

“전성국, 왜 아빠랑 전화할 때 얘기 안 했어?”

“별거 아냐.”

진짜 나에게는 별거 아니었다.

“이 녀석 여전하네. 너 이렇게 까칠하게 구는데도 그렇게 인기가 많다는 거야?”

“당연하지.”

이젠 속마음으로 하던 말들이 입 밖으로 술술 나왔다.

오랜만에 한국말을 쓰니 세상 편하기도 했다.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성국이 여자 친구는 있어? 아빠가 미국 고등학교 생활은 모르지만, 미국 영화 보면 고등학생들도 다 연애하던데, 어때?”

“아빠, 난 연애는 관심 없어.”

“제시라고 프롬퀸에 뽑힌 아이가 성국이를 좀 좋아하는 거 같아요. 성국이랑 룸메이트인 마크를 매번 집으로 초대하고, 이번 졸업 파티에도 파트너 되어달라고 성국이한테 말했거든요.”

“역시 우리 성국이 인기 많네. 근데 제시라면 미국 여자지?”

“아빠, 당연한 말을 왜 해. 금발에 파란 눈이야.”

내 말에 아빠는 헛기침을 해댔다.

“이러다 우리 금발 며느리 보는 거 아니야.”

“아빠, 너무 앞서가지 마. 나 겨우 열세 살이고, 제시는 친구일 뿐이야.”

“이 녀석 봐라. 선 제대로 긋나. 제시라는 친구가 섭섭하겠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졸업 파티 사진 보여줄게.”

나는 얼른 디지털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그날 찍은 사진을 엄마와 아빠에게 보여줬다.

“자기야, 성국이 양복 입으니까 이제 어른 같아.”

“이 녀석 겉늙었어.”

아빠는 나를 놀렸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머, 얘가 제시인가 봐. 너무 이쁘게 생겼다.”

“미국 영화배우 같아.”

“그 정도는 아니야.”

그레이스가 옆에서 흐뭇하게 우리 가족을 바라봤다.

“참, 성국이가 이번 졸업생 대표로 졸업사 할 거거든요. 이렇게 멋진 아들 잘 키우셔서 정말 너무 부러워요.”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희도 안 믿겨요. 이런 애를 낳을 줄이야.”

[나도 이런 집안에서 다시 태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오빠.”

지희가 뒤에서 내 옷을 잡아당겼다.

“왜, 지희야?”

“오빠, 놀아줘.”

[하아, 민국이가 조금 큰 거 같더니, 이제 지희 차례인가.]

민국이도 덥석 내 손을 잡았다.

“형아, 내 장난감 싸왔어. 지희는 맨날 인형놀이야. 나랑 놀자.”

[이 녀석들은 여전히 유치하군.]

지희는 졸래졸래 걸어가더니 가방에서 인형 두 개를 꺼내왔다. 그러곤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오빠 거. 이건 지희 거. 오빠, 우리 소꿉놀이하자.”

“지희야, 저리 가. 형이랑 나랑은 칼싸움할 거야.”

두 명이 내 손을 하나씩 잡고 당겼다.

“오빠!”

“혀어엉!”

“자, 그럼 10분씩 하는 거야. 어때?”

“좋아, 형.”

“응. 오빠.”

민국이와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에는 장난감 칼과 인형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열세 살의 나이에 이미 50억이 넘는 재산을 일구고, 하버드 입학을 앞둔 나인데….

“형아, 칼!”

“전민국, 내 칼을 받아라!”

이 모습을 본 그레이스와 엄마, 아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성국이는 정말 좋은 형이고 오빠인 것 같아요.”

“성격 까칠한 척하지만, 착하다니까. 우리 성국이는.”

“자기야, 여자들도 그걸 아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성국이가 인기 있지.”

[내 얘기 하는 거 다 들려.]

하지만 다 맞는 말이었다.

* * *

필립 아카데미의 상징과도 같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대강당에서 졸업식은 진행됐다.

나와 학생 대표로 연설을 할 학생들 몇 명은 맨 앞자리에 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학부모석에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그레이스가 보였다.

나는 다시 앞을 봤다.

장중한 음악이 울리면서 졸업식이 시작됐다.

교장 선생님의 말과 다음으로 학생회장의 짧은 연설이 이어졌다.

사회를 맡은 역사 선생님이 드디어 나를 소개했다.

“필립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이자 대한민국에서 유학을 온 성국 군이 학생 대표로 연설을 하겠습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지?]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그 앞에서 연설을 한 일은 셀 수도 없었다.

그런데 유독 오늘 긴장이 됐다.

[가족들이 와서 그런가.]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단상에 올라갔다.

그리고 마이크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필립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성국 전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라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어릴 적에 부모님에게 모두 버림받은 고아셨습니다.”

내 말에 강당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마크 정도이다.

제시도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영어를 모르는 엄마, 아빠에게 그레이스가 통역을 해주는 모습이 보였다.

곧 엄마, 아빠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하지만 부모님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저를 열심히 키우셨고, 저도 그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미국 유학을 결심한 이유도 엄마, 아빠에게 좀 더 나은 아들이 되고 싶어서였습니다. 이제 저는 두 달 후면 하버드 학생이 됩니다. 하버드는 대한민국에서도 누구나 다 아는 명문대입니다. 제가 하버드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부모님이 아시는 유일한 대학이어서였습니다.”

이제 엄마, 아빠는 거의 오열하고 있었다.

내 눈시울도 뜨거워졌지만, 침을 넘기고 꾹 참았다.

“아마 부모님은 한국에 돌아가셔서 아들이 하버드에 다닌다는 말을 하실 겁니다.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수 있게 저에게 기회를 준 곳이 바로 필립 아카데미였습니다. 3년 전 입학 면접을 보러 왔을 때 나이도 어리고 동양인인 저에게 입학 기회를 준 필립 아카데미의 모든 분께 감사드리고, 필립 아카데미에서 보낸 3년이란 시간은 제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첫 단추였다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가 터졌다.

엄마, 아빠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박수를 쳤다.

나는 인사를 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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