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엄마가 나를 말렸다.
“성국아, 가방은 왜?”
“엄마, 가방도 없잖아. 내가 살게. 엄마도 나 공부시키느라 힘들었잖아.”
“어머… 아드님이 정말 효자세요. 저 가방, 지금 저희 매장에서 제일 인기 있는 가방이에요. 아무 데나 편하게 드시기 정말 좋아요. 저도 하나 들고 있어요.”
매니저가 거들었다.
엄마는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학교 다니면서 입을 옷 보러 왔는데… 내 가방은 안 사도 돼.”
“엄마, 저 가방 들고 나 학교 입학식 오면 되잖아.”
“근데… 나이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네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시나요?”
“이번에 대학 들어가요. 얘가 뭐라고 해야 되죠. 월반 같은 것을 많이 해서 또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들어가요.”
“어머, 어느 학교요?”
“하버드요.”
게임 클리어.
끝판왕.
하버드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느낌이었다.
매니저는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하버드요? 미국 그 하버드요?”
“네… 제가 그래서 옷 좀 좋은 거 사주고 싶어서 데리고 온 거예요.”
“정말 너무 축하드려요.”
매니저는 연신 축하를 했고, 엄마도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난 가방을 샀다.
“그럼, 남자애들이 쓸 만한 지갑 하나 추천해 주세요. 성국아, 너도 지갑 하나는 있어야지.”
지갑까지는 마다하지 않았다.
“응. 엄마, 난 이거.”
“어머, 저희 매장에서 제일 고가 제품인데.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럼요, 제가 저번 생에 재벌이었거든요.]
* * *
“성국아, 청바지에 회색 후드 티만 다섯 개 산 거 알아?”
“엄마, 난 그거면 될 거 같아.”
“전재형 회장님 보러 갈 텐데, 뭐 입고 갈래?”
“오늘 산 거 입고 가지, 뭐. 짜장면 먹으러 갈 텐데.”
우리의 만남은 늘 그렇듯 삼전 호텔의 중식당이었다.
* * *
[이게 몇 년 만이지.]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저번 생의 아버지이자 동생이 몇 초 후 도착하는 삼전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 있을 것이다.
전태국은 나보다 여섯 살 많으니 마크와 동갑이었다.
[전태국도 대학에 들어갔겠군….]
전태국이 하버드에 들어올 일은 절대 없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스위트룸 객실이 있는 꼭대기 층에 멈춰 섰다.
그리고 드디어 스위트룸의 문이 열렸다.
나를 맞이한 건 양 비서였다.
“성국아….”
양 비서는 성장한 나의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성국아, 아니 이제 정말 다 컸구나….”
“안녕하세요. 전성국입니다.”
“나 기억하니?”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양 비서의 얼굴이 펴지면서 나를 안으로 인도했다.
“들어가자. 기다리고 계셔.”
“네.”
너무나도 익숙한 이곳.
바로 내가 죽은 곳이었다.
* * *
전재형 회장 역시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엄마와 같이 가서 샀던 청바지에 후드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좀 더 대학생 같아 보였지만, 겨우 열세 살에 불과했다.
“성국아, 정말 많이 컸구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나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전재형 회장의 왼편에는 전태국이 뭐 씹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일어나지도 않았다.
전재형 회장이 얼른 전태국을 소개했다.
“내 아들, 태국이는 기억하기 힘들지?”
“안녕하세요, 전성국입니다.”
[물론 다 기억하지. 저 재수 없는 얼굴과 태도 보게나. 여전하네….]
하지만 난 모른 척 인사를 했다.
“아, 네가 전성국이구나.”
“태국아,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그제야 전태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인사를 했다.
“반가워, 난 전태국이야.”
“자, 성국아. 편하게 앉으렴.”
나는 두 사람을 마주하고 앉았다. 마치 면접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도 우리 호텔 짜장면 좋아하니?”
“네… 엄청 좋아합니다.”
“성국아, 올해 네가 몇 살이지?”
“한국 나이로 열세 살이요.”
“키가 도대체 몇이니?”
“정확히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요. 170은 넘는 것 같아요.”
전태국은 여전히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열아홉 살이면 이제 성장도 다 멈췄을 텐데, 키도 나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거기다 외모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
전태국은 전재형과 철의 여인의 단점만 아주 쏙 빼닮았다.
“성국아, 늦었지만 하버드 입학한 거 축하한다.”
그 말에 전태국의 미간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감사합니다.”
전재형 회장은 전태국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태국아, 성국이도 이번에 대학생이 됐어. 필립 아카데미 알지? 거기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하는구나. 너랑 같은 대학생이야.”
“뭐라고요? 대학생이라고요? 저 꼬맹이가요?”
[꼬맹이 아니지. 나 너랑 키 차이 별로 안 나, 전태국.]
전태국에게 내 정보는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 성국이는 효진 그룹에서 후원하는 장학생이거든. 필립 아카데미도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하버드까지 한 번에 가다니, 정말 구수영 회장님께서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셨어.”
“아직 공부할 게 많습니다.”
나는 최대한 겸손한 척을 했다.
전재형 부회장의 전태국 소개가 이어졌다.
“태국이는 이번에 유타주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 멀지만, 종종 서로 연락하고 지내렴. 태국이가 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성국이한테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잘 부탁드려요. 참, 제가 개발한 SNS가 있는데 가입하실래요?”
슬슬 ‘페이스 페이퍼’를 소개할 타이밍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아마 이 소식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빌 게이트가 사려고 했다는 SNS가 그거니?”
“네. 뉴욕에 있는 사모펀드에서도 관심을 보였는데, 조건이 열악해서 거부했어요. 대학 들어가서 좀 더 활성화시킨 다음에 사업화 진행하려고요.”
“나도 가입할 수 있니?”
전재형 회장은 분명한 관심을 보였다.
“회장님은 다음에 일반인들 상대로 베타서비스 진행할 때 가입해 주세요. 삼전 그룹 회장님이 가입했다면 한국에서도 엄청 홍보될 거 같아요.”
“그러지. 태국아, 너라도 가입하렴. 양 비서, 노트북 좀 가져다줘.”
“네, 회장님.”
곧 양 비서가 노트북을 가지고 왔다.
나는 ‘페이스 페이퍼’ 사이트를 불러와서 전태국에게 가입 절차를 알려줬다.
그때, 전태국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어, 이거. 우리 학교에서도 가입한 애들 좀 있던데….”
‘페이스 페이퍼’는 필립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동부 보딩스쿨 학생들이 꽤 많이 가입했다.
“태국아, 너도 들어봤어?”
“우리 학교 애들도 해요. 근데… 이거 진짜 니가 개발한 거야?”
“저랑 마크라고 제 룸메이트랑 둘이서 개발했어요. 저는 아이디어를 내고, 마크가 프로그램을 짰어요. 태국이 형, 여기 가입 절차에 따라서 가입해 보세요.”
전태국은 ‘페이스 페이퍼’에 가입을 하고는 제일 먼저 나에게 친구 신청을 했다.
“너 친구 진짜 많다.”
“제가 개발자잖아요.”
“대박. 너 프롬킹이었어?”
“네.”
전태국의 태도가 조금씩 호의적으로 변했다.
전재형 회장이 흥미롭게 우리 둘을 살폈다.
“성국이가 미국에서도 인기 많았구나.”
“전 공부만 해서 잘 몰라요. 그냥 운 좋게 된 거 같아요.”
“와, 이 여자애 진짜 이쁘다. 성국아, 네 친구야?”
전태국은 제시를 가리켰다.
“네.”
“나 얘 좀 소개시켜 주면 안 돼?”
[이런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대체 머릿속에 뭐만 차 있는 거야?]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미소를 지었다.
“말은 해볼게요.”
“얘 학교 어디 갔어?”
“저랑 같은 하버드요.”
“집은 잘살아?”
“아버지가 유명한 사모펀드 대표세요.”
[이런 수준 낮은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
피로감이 쏟아졌다.
“식사 다 준비됐습니다.”
“태국아, 가입했지?”
“네, 아빠.”
“집에 가서 천천히 보고, 오늘은 성국이랑 이런저런 이야기 하자꾸나.”
전태국은 아쉬운 듯 노트북을 덮었다.
“성국아, 저 ‘페이스 페이퍼’를 직접 창업할 생각이니? 아니면 키워서 팔 생각이니?”
“직접 창업하려고요.”
난 자신 있게 대답했다.
‘페이스 페이퍼’는 앞으로 삼전 그룹을 초월하는 회사가 된다.
삼전 그룹이야 대한민국의 재벌이지만, ‘페이스 페이퍼’는 세계의 재벌이다.
“창업, 어려울 텐데….”
“전 원래 가난하게 태어났잖아요. 원래 부자로 태어나면 조금의 결핍만 생겨도 힘들지만, 저는 어릴 적에 많이 단련했거든요.”
“가난이 자랑은 아니잖아?”
전태국이 비꼬듯 물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부끄러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게으른 사람이 가난한 거잖아.”
“재벌들은 부지런해서 재벌이 된 거 아니잖아요. 그렇게 태어난 거지.”
내 말에 전태국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더 할 말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전재형 회장이 화제를 돌렸다.
“성국아, 그럼 저 회사에 투자는 언제부터 받을 거니?”
“좀 더 키워보고요.”
“어려우면 나한테 연락해줘.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도와주고 싶구나.”
[어디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으려고.]
나는 최대한 아닌 척 미소 지었다.
“필요하면 연락드릴게요.”
“아빠, 우리도 저런 SNS 하나 개발하자. 성국이도 했는데, 삼전이 못 할 리가 없잖아.”
[아마 못 할 텐데…. 짜장면이나 먹어야겠다.]
전태국은 계속해서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가진 게 갖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때, 전재형 회장이 전태국을 차분한 목소리로 불렀다.
“태국아…. 넌 굳이 공부를 잘할 필요도 없고, 굳이 좋은 학교를 갈 필요도 없어.”
뭐지?
나는 짜장면을 먹으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빠, 무슨 말이야?”
“넌 사람을 잘 부리는 방법만 알면 되는 거야. 네가 가진 회사와 재산은 누구도 넘볼 수 없어. 삼전 그룹은 영원할 테니까. 그렇다면 너는 네가 가진 것을 지키면서 그 재산을 불릴 똑똑한 이들을 그저 잘 부리면 되는 거야. 그 사람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자본을 너는 가졌잖니….”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오늘 전재형 회장이 나를 초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그는 아들 전태국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생겼고, 성격도 더럽다. 하지만 그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이다.
전재형 회장의 말대로 그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그 자본으로 나처럼 똑똑한 사람을 잘 발탁해서 쓰면 된다는 말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짜장면을 흡입했다.
그리고 입을 닦았다.
“성국아, 다 먹었니?”
“네.”
“맛있지?”
“네, 역시 삼전 호텔 짜장면이 제일 맛있어요.”
“그렇지. 삼전 호텔 짜장면만큼 맛있는 건 없지. 주방장이 나간다고 해도, 삼전 호텔 짜장면은 언제나 똑같을 거야.”
나는 전재형 회장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이곳의 주방장은 언제나 대한민국 최고 연봉을 받고 있다. 주방장은 대부분 어렵게 나가서 개업을 할 생각조차 안 한다. 왜냐하면 개업해서 버는 돈보다 이곳의 연봉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주방장 곁에서 같이 일하던 젊은 다른 셰프가 주방장과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게 되면 주방장은 하루아침에 잘리고, 젊은 셰프로 교체가 된다.
주방장은 그제야 개업을 할 생각을 하지만, 그는 개업하기에는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 버렸다.
삼전이 사람을 쓰고 버리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 내가 삼전을 떠난 이유이기도 했다.
도구가 되느니, 내가 칼이 되겠어!
“성국아, 하버드 간 거 진심으로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태국은 나를 보더니 거만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성국아, 학교 열심히 다녀. 너 같은 애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야지 세상이 돌아가지.”
나는 이를 꽉 물었다.
[전태국, 네가 물려받을 자산보다 내가 이룰 자산이 더 많아지는 날에 또 보자. 딱 10년이야. 두고 보자고. 이번 생에서는 누가 더 재벌이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