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방무혁은 반색을 했다.
“그래, 방학 때 한국 들어올 거지?”
“되도록이면 그러려고요. 부모님이랑 동생이랑 같이 지내게요.”
“내가 회사에 말해둘게.”
방무혁은 들뜬 얼굴이었다.
원석을 발견할 때의 기쁨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다.
“선생님, 요즘 고민 있으세요?”
“이 녀석 보게나. 너 이제 좀 컸다고… 이제 내 고민도 들어주게?”
방무혁은 허허 웃더니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냥 그러신 것 같아서요. 메일 보니까요.”
“사실은 좀 고민이 많긴 해. 프로듀서 생활 오래 했는데, 나도 이대로 지낼 게 아니라 가수를 키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방무혁이 독립을 고민하고 있을 때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무혁의 고민을 들었다.
“작곡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거든.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센스라는 게 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프로듀서는 경력도 중요하지만, 트렌드를 읽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거든. 나이가 든다는 게 이 업계에서는 좀 슬픈 일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그럼 어떤 가수를 키우실 거예요?”
“흠…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 못 했는데… 아무래도 우선은 친한 발라드 가수랑 독립을 먼저 해보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해.”
[그건 아니지… K-POP은 아이돌이라고.]
쪼오옥.
나는 딸기 스무디를 빨아들였다.
“선생님, 해체됐지만 엔싱크 같은 가수가 대한민국에 있어도 좋을 것 같아요.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외모도 훈훈하고요.”
“남자 아이돌 그룹 말하는 거야?”
“네.”
“나도 생각해 봤는데, 아이돌 그룹 만드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초기 자본도 많이 투자해야 하고, 솔직히 사춘기 아이들 모아놓으니 어떤 사건이 터져서 묻힐지도 모르고….”
방무혁은 분명 이 부분까지 다 고민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성국아, 너 노래도 잘하지?”
“음악 시간 때 무리 없이 성적 받았어요.”
“그 정도 실력이면 아이돌 가수로는 합격이지. 타고나는 애들도 많지만, 여기서 보컬 트레이닝 받고 하면 음치도 다 개선돼.”
[역시 대한민국은 안 되는 게 없는 나라야.]
저번 생에서 삼전 그룹을 이끌면서 반도체나 주력했지, 엔터테인먼트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형제 그룹인 CV에서는 나름 영화 산업이나 케이블TV에도 진출해서 괄목할 성장을 이끌기도 했다.
미국이 앞으로 ‘페이스 페이퍼’와 일론 머스트의 테슬카로 세계시장을 선도한다면, 대한민국은 이제 엔터테인먼트이다.
거기다 공부도 못하는 민국이 녀석은 아무래도 연예계에 재능이 다분했다.
내가 먼저 연습생으로 들어가 체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때, 누군가 우리 테이블에 다가와서 케이크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JP 연습생이세요?”
“저요?”
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네. 그쪽이요.”
“아닌데요. 그럼, 혹시 연습생 되실 거예요?”
“그건… 왜 그러세요?”
“너무 잘생겨서요. 괜찮으시면 저 미리 사인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나중에 유명해지시면 자랑하려고요.”
분명한 건 나는 나중에 진짜 유명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방무혁이 가로막았다.
“저기요. 이분 그냥 학생이에요. 그리고 아직 열세 살이에요.”
“네에?”
여자가 깜짝 놀랐다.
그 바람에 카페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쏠렸다.
“진짜 열세 살 맞아요?”
“네….”
“어머, 내가 지금 미성년자한테 무슨 추태를 부린 거야… 죄송합니다. 미안해요. 케이크는 사과의 의미로 드세요. 정말 미안해요.”
여자는 얼른 인사를 하고는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방무혁이 숨죽여 웃었다.
“성국아, 내가 보기엔 넌 아이돌이야. 정말.”
“전 제가 가지고 태어난 것 말고 다른 걸로 성공하고 싶어요.”
“정말… 너도 대단하다.”
“참, 선생님. 다음 방학 때 들어올 때 꼭 이 회사에 계셔야 해요.”
“나보고 독립할 생각 말라고?”
“그건 아니고요. 저 좀 키워주시고 독립하시라고요.”
매치면 그 이야기이다.
[방무혁, 회사는 나랑 같이해야지. 내가 미래의 K-POP 지형도를 꿰고 있다고.]
나는 딸기 스무디를 마저 마셨다.
* * *
하버드에 같이 입학하는 마크와 제시가 나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하자 방무혁은 저녁을 사겠다며 나섰다.
“하버드생을 세 명이나 오늘 만나는 거네.”
“그냥 다들 평범해요.”
“맛있는 거 사줘야 할 텐데.”
“한번 물어보세요.”
방무혁은 나를 흐뭇하게 쳐다봤다.
“성국아, 넌 어렸을 때도 정말 그 나이 같지 않았거든. 그런데 지금 이렇게 키도 크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정말 열세 살 같지 않아.”
[당연하지. 나 마흔 살이야.]
대답 대신 나는 빙긋 웃었다.
나를 발견한 마크와 제시가 손을 흔들었다.
방무혁은 놀라서 머뭇거렸다.
“성국, 저 미인이….”
“저희 학교 프롬퀸이었어요. 제시라고요.”
제시는 지루했던지 일어나서 우리를 반겼다.
나는 방무혁을 소개했다.
“대한민국의 굉장히 유명한 작곡가 겸 프로듀서셔. 한국 인기 그룹 노래를 많이 만드셨어.”
방무혁은 마크와 마찬가지로 제시를 보자 귀까지 빨개졌다.
“아, 안녕하세요.”
방무혁은 영어를 더듬더듬했다.
“오늘 저녁 사주신다고 해서….”
“뭐들 먹고 싶어요?”
마크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음식을 들이밀었다.
“떡볶이요. 이거 빨간 파스타 같은 거죠?”
“많이 매울 텐데. 괜찮겠어요?”
방무혁이 물었다.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요.”
“제시, 넌 어때?”
마크가 물었다.
“나도 도전해보고 싶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중에 나 원망하면 안 돼.”
* * *
다음 날 아침, 아빠는 양치도 못 하시고 칫솔을 들고 뛰어나갔다.
“난 가게 가서 씻을게. 성국아, 넌 괜찮지?”
“네.”
마크와 제시는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맵다고 했는데….]
엄마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성국아, 약 좀 사올까?”
“매운 거 처음 먹어봐서 저런 거 같아.”
“그러니까 걱정이지. 탈수 오는 거 아니야?”
나는 마크가 들어간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마크, 괜찮아?”
“어… 성국. 이제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아. 나갈게.”
마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얼굴이 반쪽이었다.
“형, 나 화장실!”
민국이가 잽싸게 들어갔다.
“마크, 병원 안 가봐도 될 거 같아?”
“나 그냥 오늘 집에서 쉬어도 되지?”
“당연하지.”
엄마가 안방 화장실을 가리켰다.
“성국아, 제시도 물어봐.”
[여자는 좀 그런데….]
때마침 제시도 얼굴이 반쪽이 된 채 나왔다.
“제시, 괜찮아?”
“으응. 나도 오늘은 집에서 쉴게.”
“알았어. 푹 쉬어.”
엄마가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도대체 애들 뭘 먹은 거야?”
“흠… 신당동 떡볶이랑 닭발이요.”
* * *
마크와 제시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경복궁도 보고, 아빠의 보쌈도 실컷 먹고 떠났다.
마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걱정했고, 제시는 불어난 체중을 걱정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동생들과의 대담을 시작했다.
전민국.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
성적은 우수하지 않지만 아이큐 160.
하지만 쉽게 질려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연예계 생활을 희망함.
나보다는 못하지만 꽤 귀염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고, 우리 집 유전자의 특성상 나쁘게 자라기 힘듦.
전지희. 다섯 살. 유치원생.
아이큐가 높고 학습 욕구가 굉장히 높음.
외모로는 대성할 가능성이 없는 우리 집안의 미스터리.
그래도 부푼 찐빵에서 진화 중.
나는 민국이를 앞에 앉혀두고, 성적표를 확인했다.
[아이고, 머리야.]
성적표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나는 민국이를 매서운 눈으로 쳐다봤다.
“민국아, 너 커서 뭐 될래?”
“형! 나는 가수가 되고 싶어.”
민국이는 좋은 머리를 공부 쪽으로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민국아, 그럼 넌 영어 공부만 해.”
“영어 공부만?”
“응. 앞으로 대한민국 가수는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활동할 거야. 그러니까 넌 영어는 꼭 공부해야 해.”
“응! 형아!”
그리고 지희는….
지희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희야, 요즘 가장 재미있는 게 뭐야?”
“오빠, 이거.”
지희가 책을 내밀었다.
이건!
우주에 관한 책이었다.
내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민국이는 머리는 좋지만 공부에는 관심 없다. 연예계 쪽으로 나가고 싶어 하니 내가 충분히 이끌어줄 수 있었다.
지희는 머리는 좋은 것 같았지만, 특별히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책을 가지고 오다니!
“지희야, 이게 재미있어?”
“응, 오빠. 나도 오빠처럼 미국 가서 공부하고 싶어.”
“지희야. 오빠처럼 미국 가서 공부하려면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알지?”
“응! 열심히 하께. 밍구기 오빠랑.”
나는 지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넌 공부다!]
이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구지?
방무혁이었다.
“여보세요.”
- 성국아, 너 미국 언제 가지?
“다음 주 월요일이요.”
- 요번 주에 시간 되는 날 있어?
“왜요, 선생님?”
- 박진수 대표가 너 보고 싶어 하거든.
박진수.
바로 방무혁이 있는 JP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였다.
대한민국의 SKJ적인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자, 가수 출신이다.
[박진수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나는 차분히 물었다.
“왜 저를 보고 싶어 하시는데요?”
- 내가 이번에 꼭 연습생으로 데리고 오고 싶은 친구인데. 심지어 열세 살에 하버드 합격한 친구라고 술 마시면서 엄청 자랑했거든. 그러니까 너 꼭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이번 주에 시간 돼, 성국아?
“네! 내일 시간 괜찮아요.”
- 11시까지 올 수 있어?
“네!”
드디어 박진수를 보는 건가….
* * *
나는 JP 엔터테인먼트가 있는 압구정으로 향했다.
방무혁이 회사 입구에서 나를 맞았다.
“성국아, 바쁜데 미안.”
“아니에요.”
“내가 네 이야기를 했더니, 박진수 대표가 너 보자고 난리야. 내가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에 나온 그 애라고 했더니, 더 보고 싶어 하더라고. 거기다 이번에 하버드에 입학한 천재라고 했거든.”
나는 방무혁의 안내에 따라서 JP 엔터테인먼트 안으로 들어갔다.
“연습생들이 연습하는 곳은 보통 3층이고, 데뷔조는 4층에서 연습해.”
“박진수 대표는 어디 계세요?”
“제일 위층에 있지.”
방무혁은 엘리베이터의 가장 위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는 순간, 여자 아이돌 연습생들이 뛰어 들어왔다.
내가 아무리 공부만 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룹이었다.
“안녕하세요!”
“응, 안녕. 연습 가?”
“네, 선생님!”
여자 연습생들은 우르르 4층에서 내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준비 중인 데뷔조인데, 아직 이름을 결정하지 못했어.”
“원더우먼 어때요?”
“원더우먼?”
“네. 다들 뭔가 엄청 에너지가 굉장하신 것 같아요. 원더우먼처럼요.”
“좋은데… 내가 한번 박진수 대표한테 말해볼게.”
띵.
드디어 맨 위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진수 대표가 있는 대표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무혁이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저예요.”
“어, 들어와.”
안에서 익숙한 박진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진수.
대한민국 엔터테인먼트계의 거장.
향후 20년 동안 대한민국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인물이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박진수에게 인사를 했다.
이번 생의 아버지는 항상 그러셨다.
인사만 잘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안녕하세요, 전성국입니다.”
“네가 성국이구나.”
박진수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부담스럽게 왜 이래, 박진수.]
박진수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너 정말 잘생겼구나. 나이가 열세 살에 키가 170이 넘는다고? 이거 뭐 아이돌로 태어난 애 아니야?”
박진수를 나를 보더니 연신 감탄했다.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