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2003년 09월 12일.
나의 ‘페이스 페이퍼’는 터져 나가기 직전이었다.
얼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생일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다.
물론 다들 어떻게든 나와 연결된 인맥들을 가진 사람들이긴 했다.
수업 중 마크가 내 노트북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국, 내가 얼른 데니스가 말한 연애 중인지 아닌지 알리는 거 만들게.”
“난 미성년자야, 마크.”
“성국, 네가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왔어도 미국은 언제나 연애 중이라고.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물론 네가 연애 중이든 아니든 대시하는 여자들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을 테니까, 그냥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해.”
옆에 앉아 있던 데니스도 끼어들었다.
“성국, 오늘 라이언 통과의례 치르는 날이지?”
“응.”
“나랑 마크는 기숙사 방에서 맥주 마시며 기다릴게. 꼭 성공해!”
[괜히 긴장되네….]
그래도 전혀 긴장 안 한 척 마크와 데니스에게 차갑게 말했다.
“수업에 집중해.”
마크와 데니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번 생에서 하버드를 다니긴 했지만, 그땐 대학원이었다.
거기다 MBA 과정이었고, 내가 대한민국의 삼전 그룹의 후계자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별로 불편함 없이 학교를 다녔다.
MBA 과정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이 이미 각 나라에서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만큼 삼전의 기업 가치가 올라간 이후기도 했다.
그런데 진짜 ‘라이언’이라는 사교 클럽의 초대장은 당혹스러웠다.
서울대학교에서야 그냥 친구들이랑 막걸리나 마셔도 삼전 그룹 아들이 막걸리도 마신다며 소박하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나에게 세렝게티 초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있다가는 잡아먹히는 곳이다.
* * *
수업이 끝나자 제시가 강의실 끝에서 달려왔다.
“성국아, 오늘 생일이지?”
“응. ‘페이스 페이퍼’에서 봤어?”
“고등학교 3년 같이 다녔는데, 내가 네 생일을 모를 수가 없지. 오늘 저녁에 우리 기숙사에서 파티 할 건데, 다들 올 거지?”
제시는 나를 비롯해서 마크와 데니스를 훑었다.
마크와 데니스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마크의 옆구리를 슬쩍 치며 속삭였다.
“마크, 오늘 기숙사 방에서 데니스랑 맥주나 마신다며?”
“그건 제시의 파티가 있는 줄 몰랐을 때의 이야기지. 제시의 기숙사 파티는 지금 신입생들 사이에서 가장 핫해. 제시 ‘페이스 페이퍼’에 제발 파티에 초대해 달라는 학생이 줄을 잇고 있어. 저 파티에 초대된다는 건 우리가 제시만큼 핫하다는 거 아니겠어?”
“마크, 제시 ‘페이스 페이퍼’ 염탐 좀 그만해.”
마크는 모른 척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아, 너도 올 거지?”
“난 오늘 라이언 가입식 날이라서…. 제시, 너도 여자 클럽에서 초대장 받지 않았어?”
“받긴 했는데… 난 사촌 언니가 거기 이미 회원이라서 특별히 통과의례 같은 건 없어. 그리고 난 사실 그런 데 크게 흥미도 없어.”
제시가 금발을 뒤로 넘기자, 마크와 데니스는 이미 넋을 잃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시, 다음에는 우리 기숙사에서 파티 하자고 할게.”
내 제안에 마크와 데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니스가 놀라 나에게 속삭였다.
“성국, 가능할까?”
“니들이 모르는 게 있는데, 제시만 오면 우리 기숙사도 오케이지.”
“맞지!”
마크와 데니스는 그제야 손뼉을 쳤다.
물론 제시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전성국뿐이었다.
띠링.
이때,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 라이언 클럽입니다. 초대장을 받은 신입생들은 모두 7시까지 슈트를 입고 존 하버드 상 앞으로 집합 바랍니다.
* * *
오랜만에 슈트를 꺼내 입었다.
졸업 파티 때 입으려고 산 명품 슈트였다.
옆에서 영화를 보던 데니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성국, 진짜 네 나이로 안 보이는 거 알지?”
“키만 컸을 뿐이야.”
“진짜 내가 나중에 영화감독 되면 너 꼭 캐스팅할 테니까, 다음 학기에 연기 수업 꼭 들어.”
“나 방학 때 한국 가서 연습생 할 거야.”
“연습생? 그게 뭐야?”
“엔싱크나 그런 보이 그룹을 대한민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트레이닝 시켜서 데뷔시키거든. 그 데뷔를 위해서 트레이닝 하는 아이들을 연습생이라고 불러.”
데니스의 눈이 커졌다.
“모두들 꿈을 향해 모여드는 거네?”
“그렇지.”
“대한민국에서 꿈을 향해 모여드는 곳이 서울이거든. 미국에서는 아마 할리우드가 있는 LA겠지?”
“그렇지… LA.”
데니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국, LA에 꿈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쓰면 어떨까?”
[당연히 좋지. 난 이미 네 시나리오를 다 안다고….]
하지만 최대한 태연하게.
“재미있겠는걸?”
“그치?”
“성국, 우리 같이 시나리오 써볼래? LA에 각자 꿈을 찾아 모여드는 청춘들의 이야기 말이야.”
“뮤지컬이면 어떨까?”
“대박. 지금 나랑 똑같은 생각 한 거 알아? 마치 1930년대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들처럼 말이야. 주디 갈랜드가 나온 <오즈의 마법사>처럼!”
“좋은데. 데니스, 그 이야기는 이따 더 하자. 오늘은 나 ‘라이언’ 클럽의 허들을 꼭 넘어야 하니까, 행운을 빌어줘.”
“당연하지!”
데니스가 빙긋 웃었다.
* * *
저녁 7시.
존 하버드 상 앞에 슈트를 빼입은 열 명의 남학생이 서성였다.
이 중에 몇 명은 수업에서 본 사람도 있었고, 몇 명은 낯선 얼굴이기도 했다.
모두들 키가 크고, 백인이었다.
열 명 중 동양인은 내가 유일했다.
하버드의 사교 클럽은 폐쇄적이기로 유명했다.
윙클 형제가 왜 날 여기에 초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는 ‘라이언’에 꼭 들어가야 했다.
바로 ‘페이스 페이퍼’를 사업화하기 위해서는 ‘라이언’의 인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 수없이 많은 핸드폰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학생들은 일제히 핸드폰을 꺼내서 봤다.
거기엔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
- 오늘 밤, 하버드 어느 곳에서나 열리는 파티를 돌며 제일 많은 여학생 연락처를 받아오는 사람 순서대로 ‘라이언’ 클럽 신입생을 선발합니다. 합격은 7등까지. 시간은 밤 10시까지입니다.
남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는 학생들도 몇 있었고, 몇 명은 자신만만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슈트의 깃을 매만졌다.
이건 나를 위한 게임이었다.
[자, 이제 가볼까….]
* * *
마크와 데니스는 맥주병을 든 채 구석에 서 있었다.
“데니스, 난 원래 학창 시절 내내 월플라워였어. 너라도 가서 마음에 드는 여자들한테 번호라도 물어봐. 우리 이제 대학생이잖아!”
월플라워는 파티에서 파트너 없이 벽에 붙어 서 있는 인기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크, 하버드에 오려고 공부하는 애들 중에 인기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나도 중고등학교 때는 너랑 비슷한 처지였어.”
“성국이는 예외였어. 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는 귀엽다고 여자들이 난리였고, 졸업할 때 되니까 멋있다고 난리고.”
“성국이는 여자한테 관심도 없잖아.”
“그게 신기해. 얼른 ‘페이스 페이퍼’에 연애 중 만들어야겠어.”
이때, 기숙사 문이 열리면서 슈트를 제대로 차려입은 성국이 들어섰다.
마크와 데니스는 또 기가 죽었다.
“오늘 파티도, 우린 번호 따기 글렀네.”
* * *
제시의 파티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페이스 페이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시가 주최하는 파티였기 때문이다.
나는 ‘페이스 페이퍼’의 확장성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만남에 굶주려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친구가 될 수 없는 제시 같은 인기녀와 온라인에서는 친구가 되거나, 적어도 제시가 뭘 하는지 정도는 알 수도 있었다.
제시가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성국, 오늘 라이언 클럽 가는 거 아니었어?”
나는 꽉 매진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셔츠의 윗단추를 풀었다.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그러자 여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쏟아졌다.
라이언 클럽에서 낸 미션은 내가 통과를 할지 안 할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과연 1등을 할지 못 할지가 문제였다.
나는 맥주병 대신 생수병을 들고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나한테 연락처 줄 여학생 좀 찾는데요!”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걸 본 마크와 데니스는 서로 맥주병을 부딪쳤다.
“기숙사 방에서 맥주나 마실 걸 그랬나….”
제시가 어느새 인파에 밀려 마크와 데니스 곁으로 왔다.
동시에 계속 문이 열리면서 새로운 여학생들이 들어왔다.
“대체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누가 ‘페이스 페이퍼’에 올렸겠지.”
* * *
“99명?”
윙클 형제 중 캐머런의 미간이 구겨졌다.
“2등이랑 너무 차이 나잖아.”
“2등은 몇 명인데?”
“31명.”
타일러가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이가 우리 클럽에 들어오게 하는 게 우리 목표이긴 했잖아.”
“그렇긴 한데… 이렇게 인기 많을 줄 생각도 못 했어.”
캐머런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타일러, 아무래도 ‘페이스 페이퍼’를 먹기 위해서는 우리가 좀 관대해져야겠지?”
“‘페이스 페이퍼’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거 확실하지?”
“내부 정보인데, 마이크로 세이버사에서도 사들이려고 했었대. 근데 성국인가 하는 그 아이가 자신이 더 키우겠다고 마다했다고 들었어.”
“마크 쪽으로 접근할 걸 그랬나. 그 녀석 너드 같은 게, 조금만 잘해주면 우리 편으로 올 거 같은데.”
캐머런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결정은 성국이 내리는 거야. 마크는 그저 기술자일 뿐이야. 어떻게든 우리 아버지 사모펀드 쪽으로 투자하게 해야지.”
“알았어. 우선 결과 통보하고, 이번 주말에 자리 마련할게.”
* * *
드르륵.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책을 보다 흘깃 핸드폰을 봤지만, 잡지는 않았다.
외출한 데니스 책상에서 ‘페이스 페이퍼’ 업그레이드를 하던 마크가 나를 쳐다봤다.
“성국, 라이언 클럽 결과 나온 거 아니야?”
“결과야 뻔하지. 나보다 연락처 많이 따온 사람은 없어.”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니야? 그래도 한번 확인해 봐.”
“이따 확인하지, 뭐.”
마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라이언 클럽에 그렇게 관심도 없으면서 왜 초대장 받은 거야. 초대장 받아도 거절해도 되잖아.”
“라이언 클럽은 하버드 내에서도 끈끈한 선후배 관계로 유명하잖아. ‘페이스 페이퍼’가 지금 계속 커지고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해서 투자 컨택이 들어올 텐데, 그때 좀 더 미국 사회에서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라이언 클럽의 커넥션이 필요할 것 같아서. 눈여겨보는 투자자도 있고….”
“성국아, 너 정말 열두 살 맞아?”
[응, 아니. 나 마흔 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크가 업그레이드 중인 ‘페이스 페이퍼’를 살폈다.
“마크, 윙클 쌍둥이 말이야.”
“어, 그 키 크고 금발에 느끼한 녀석들.”
“그 녀석들 아버지가 사모펀드를 운영하더라고.”
“제시네 아버지가 하시는 게 사모펀드지?”
“응. 마크, 그 녀석들이 동양인인 나에게 왜 초대장을 보냈을까?”
“그거야….”
마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녀석들, 분명히 ‘페이스 페이퍼’를 노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