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탁.
난 책을 덮고서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 라이언 클럽에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신입생 환영회는 다음 주 금요일. 드레스 코드는 블랙 슈트입니다.
“성국아, 근데 나한테는 왜 초대장을 안 준 거지?”
[그거야, 저들도 실세가 누구인지 아니까 그랬겠지.]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아마 내가 학교에서 프롬킹도 하고 해서 알려져서 그렇겠지. 어쩌면 네가 개발자란 사실을 모를 수도 있어.”
“그래, 네가 비즈니스는 다 하니까. 솔직히 난 그런 데 가는 것보다는 컴퓨터 게임 하는 게 더 좋기도 해.”
이때, 마크가 눈을 반짝였다.
“성국, 드디어 성공했어!”
마크는 연애 중인지, 결혼을 했는지 같은 개인적인 정보를 올릴 수 있는 프로필 서비스를 업데이트했다.
마크는 얼른 자신이 솔로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성국아, 너도 얼른 해.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따라 하지.”
“오케이!”
솔로.
나는 얼른 나의 연애 상태를 표시했다.
그러자 곧 제시도 프로필을 수정했다.
덜컥.
문이 열리면서 데니스가 들어왔다.
“성국아, 라이언 클럽에서 연락 왔어?”
“어.”
“당연히 패스지?”
“당연하지. 데니스, 너도 어서 와서 네 프로필 업데이트해. 우린 모두 솔로야.”
“드디어 만든 거야?”
데니스는 신이 나서 자신의 ‘페이스 페이퍼’ 프로필을 업데이트했다.
“근데 제시는 왜 아직 솔로일까? 대시하는 남학생들 한둘이 아닐 텐데.”
[그거야 나 때문이지.]
* * *
데니스는 밤새 낑낑거리며 컴퓨터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도 책을 읽고 있었다.
확실히 대학에 오니 아이큐 121로는 학업을 따라가기 점점 버거워졌다.
하버드는 미국 고등학교에서도 1, 2등을 다투는 천재들만 오는 곳이다.
아이큐 121의 삶이란 정말 노력의 연속이었다.
[저번 생의 아이큐가 그립네….]
데니스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성국, 내 이야기 좀 들어줄래?”
“무슨 이야기?”
“시나리오를 하나 쓰는데… 영 풀리지가 않아.”
나는 책을 덮었다.
데니스의 이야기라면 꼭 들어줘야 했다.
왜냐면! 데니스는 앞으로 10년 안에 미국 영화계의 가장 유망한 감독이 되기 때문이다.
“무슨 이야기 쓰는데?”
“내가 열네 살에 드럼을 잠시 배웠거든. 학교 방과 후 수업 중에 드럼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재미있는 거야. 처음에는 실력도 제법 잘 늘고… 그래서 드럼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
[데니스의 첫 영화가 여기서 시작하는 거였구나.]
나는 데니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갑자기 드럼 선생님이 바뀐 거야. 그 전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식으로 강의를 하셨거든. 못해도 좀 더 하면 잘할 거야, 뭐 그런 식으로 칭찬도 많이 하시고…. 그런데 새로 온 선생님은 엄청 무서운 거야. 내가 실수라도 하면 넌 드럼에 재능이 없다는 식으로 쏘아붙이시는데, 그 일로 드럼도 그만뒀어.”
“그 이야기를 영화로 쓰고 싶은 거야?”
“응… 시나리오를 구성하는데, 너무 뻔한 거 같아서.”
“흠….”
난 괜히 고민하는 척했다.
“실제 주인공의 나이도 중학생으로 설정한 건 아니지?”
“지금은 그래….”
“나 같으면 실제 나이를 좀 더 올리고 싶은데… 뉴욕의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면 어떨까? 더 절실하고, 재능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어 할 거잖아.”
데니스의 눈이 반짝였다.
“성국! 이 시나리오, 나랑 같이 써볼래?”
“그래도 돼?”
“당연하지.”
[흠, 계약서 하나 더 써야겠네….]
난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될 때마다 같이 써보자.”
“근데 걱정이 있어. 시나리오가 너무 상업적이지 않아서 투자나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
“데니스, 만약에 투자 안 되면 내가 투자할 테니 걱정 마.”
“성국, 너 돈이 그렇게 많아?”
“많이 벌 거야.”
데니스는 뒤로 발라당 넘어가며 웃어댔다.
“성국, 너 정말 웃겨!”
[원래 부자는 티 내는 거 아니야. 그리고 겨우 50억 가지고…. 저번 생에서는 내 주식만 몇 조였어.]
나는 조용히 책으로 다시 눈을 옮겼다.
* * *
드디어 라이언 클럽의 첫 모임 날이 다가왔다.
드레스 코드는 슈트였다.
나는 슈트를 입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컴퓨터를 하기 위해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마크도 고개를 갸웃했다.
“성국, 너 키가 또 큰 거야?”
바지가 짧아져서 발목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런 모양이야. 저번 주에는 밤이라 잘 몰랐는데… 낮에 보니 엄청 짧네.”
마크는 얼른 내 옆으로 와서 서더니 키를 쟀다.
실제로 마크보다 엄지손톱만큼 더 컸다.
마크는 좌절한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았다.
“이제 네가 나보다 키도 큰 거야! 와, 완전 좌절이야. 그동안은 내가 너보다 나이 많고 키 큰 걸로 먹어줬는데….”
“마크, 나이는 항상 네가 더 많을 테니 걱정 마.”
“그건 반대이고 싶다고.”
마크가 울상을 지었다.
[그나저나 슈트는 어쩌지….]
이때, 문이 열리면서 데니스가 들어섰다.
데니스도 마크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성국, 키가 도대체 얼마야?”
“안 재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어. 아! 데니스, 슈트 있으면 빌려줄래?”
“한 벌 있긴 해.”
데니스는 옷장에서 슈트를 꺼냈다.
“엄마가 혹시 모르니까 하나 사라고 해서 할인마트에서 산 거야. 성국, 괜찮겠어?”
“짧은 프리다보다야 맞는 옷이 나을 것 같아.”
“라이언 클럽에 오는 애들 다 장난 아닐 텐데. ‘페이스 페이퍼’에 떠돌아다니는 말로는 미국 석유회사 재벌 아들에, 프린스턴 대학교수 아들에. 정말 쟁쟁했어.”
“어차피 난 동양인이라 크게 신경도 안 쓸 거야.”
나는 데니스의 슈트를 집어 들었다.
바지 핏도 생각보다 잘 맞았고, 할인마트에서 산 슈트라 오히려 유행도 타지 않는 무난한 스타일이었다.
“성국,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데?”
“옷 빌려준 값으로 내일 점심 살게.”
“좋지.”
* * *
하버드의 클럽하우스들 중에서도 라이언의 클럽하우스는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
그만큼 라이언 클럽의 선배들 입김이 세단 의미이기도 했다.
내 앞으로 몇 명의 학생들이 슈트를 입은 채 걸어가는 게 보였다.
‘페이스 페이퍼’에 떠도는 내용으로는 합격한 일곱 명 중 나를 제외한 여섯 명은 이름만 대면 알 정도로 유명한 기업의 아들이거나 유명한 학자의 아들이었다.
데니스가 말한 대로 미국 석유회사의 아들 지미 브라운도 있었고, 필즈상을 수상하고 프린스턴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의 아들인 저스틴 우즈도 있었다.
모두들 누가 봐도 고급진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내가 클럽하우스 앞에 서자, 윙클 형제가 맞이했다.
“성국, 축하해. 그리고 라이언 클럽에 온 것을 환영해.”
“감사합니다.”
나는 깍듯하게 인사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클럽하우스 내부는 마치 근대 미국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윙클 형제 중 캐머런이 나에게 다가와서 샴페인을 내밀었다.
“샴페인 한 잔 어때?”
“저 아직 미성년자라서요. 생수 마실게요.”
[캐머런, 이거 나 떠보는 거지? 난 이런 거에 안 넘어가.]
나는 생수가 든 컵을 집어 들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편이구나, 성국.”
[것보다는, 너희들을 못 믿는 거지. 나한테 술 먹이고 무슨 짓 하려고?]
나는 웃으며 대충 넘겼다.
“지킬 건 지켜야 나중에 탈이 없더라고요.”
“성국이 말하는 거 보면 정말 인생 오래 산 사람 같아.”
[너보다 오래 살았다, 이 느끼한 녀석들아.]
캐머런은 나를 이끌고 클럽하우스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줬다.
“여긴 우리들이 모여서 시가 같은 거 피우면서 수다 떠는 곳이야. 체스도 하고, 술도 마시고… 응접실 같은 곳이랄까. 아마 여기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거야. 성국, 시가도 안 피우지?”
[저번 생에서는 가끔 피웠지만, 이번 생에서는 입에도 안 댈 거야. 내가 살아보니까, 다 얻어도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더라, 캐머런.]
저번 생이 그랬다.
다 가졌는데, 심장마비로 죽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선배들은 아마 1시간 후쯤 도착할 거야. 다들 정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이니 인사 잘 해두면 좋을 거야.”
“설명 감사해요.”
[좀 꺼져달란 말이야.]
하지만 캐머런은 내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나를 전담 마크하는 수비수 같았다.
설마 내가 ‘페이스 페이퍼’ 광고하는 것을 막으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캐머런을 쳐다봤다.
“저, 화장실 좀….”
“코너 돌면 나와.”
내가 움직이려고 들자 캐머런도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은 제가 잘 찾아갈게요.”
“어, 그래.”
캐머런은 머쓱한지 샴페인만 마셔댔다.
* * *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나는 얼른 마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마크, 라이언 클럽 선배들 중에 유명한 투자자 좀 검색해줘 봐. 그중에서도 피터 브랜튼에 대해서 자세히.
- 오케이.
곧 답이 왔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미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밖에서 유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동양인! 네가 이번에 여자들 연락처 제일 많이 땄다며?”
[너무 잘나면 또 어디서든 따돌림을 받는 건가.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운명인 것을….]
나는 비장한 얼굴로 문을 발로 쾅 찼다!
그 바람에 문을 밀던 유치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화장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뭐야, 약골이잖아.]
바닥에 쓰러진 놈이 바로 미국의 석유 재벌 아들이었다.
이름은 지미 브라운.
나는 지미 브라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일어날 거야?”
“…….”
지미 브라운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술만 자근자근 씹어댔다.
“싫으면 말든가.”
내가 손을 거두고 화장실을 나가려는 순간, 쓰러진 지미 브라운이 내 발을 걸려는 수작이 포착됐다.
[자식, 유치하긴….]
나는 재빨리 지미 브라운의 발을 피했다.
그 바람에 녀석은 다시 한번 화장실을 온몸으로 돌았다.
“화장실 바닥이 좋나 보네. 이따 보자.”
나는 지미 브라운의 자존심을 자근자근 밟아주고 밖으로 나왔다.
* * *
선배들이 한 명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신입생들은 깍듯하게 인사를 했고, 선배들도 자기소개를 거침없이 했다.
대부분 이름만 알 만한 기업에서 한자리를 하고 있거나, 정부 요직을 거친 사람들이었다.
나는 생수를 연신 마시며 캐머런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라이언 클럽에 동양인은 처음인 것 같은데.”
인상 좋은 중년의 남자가 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한국에서 왔어요.”
“어, 한국. 나도 가봤어, 투자 때문에. 내 이름은 피터 브랜튼이야.”
[드디어 찾았네.]
눈여겨보는 투자자가 바로 피터 브랜튼이었다.
“전성국이라고 합니다.”
나는 피터와 생수 잔을 부딪쳤다.
“나랑 취향이 같네. 생수.”
“전 미성년자라 술을 못 마셔요.”
“뭐어?”
피터는 놀란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쳐다봤다.
“미성년자라면 열여덟 살? 월반이라도 한 건가?”
“정확히는 열두 살이요. 월반을 좀 많이 했죠.”
피터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또 봤다.
“대부분 잘 안 믿지만, 정말 열두 살 맞습니다. 신분증 보여드려요?”
“하버드를 열두 살에 입학했다고?”
“네. 아마 그래서 제가 동양인에 미성년자지만 라이언 클럽의 초대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 라이언 클럽의 초대장을 받기는 어려운데. 대한민국에는 재벌이라는 게 있던데, 혹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기업을 부모님이 소유하셨나?”
[저번 생에서는 그랬지.]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절대 아니다.
“아니요. 부모님은 작은 식당 하세요.”
“그래?”
피터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단 표정이었다.
이때, 마크에게서 답이 왔다.
- 성국, 피터 브랜튼 엄청 유명한 투자자야. 정석대로 투자하고, 정석대로 버는 투자자고, 사모펀드의 야비한 수법들 엄청 비판했어!
나는 피터를 보며 빙긋 웃었다.
드디어 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아마 제가 친구와 공동으로 개발한 SNS 때문일지도 몰라요. ‘페이스 페이퍼’라고요.”
“‘페이스 페이퍼’? 설마 마이크로 세이버사에서 사려고 했다는 그 SNS를 말하는 거니?”
“네.”
나는 생수를 한 모금 쭉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