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08화 (108/231)

제108화

피터는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다들 오느라 고생 많았어. 한 달 정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다들 이제 대학생 같은데.”

“바쁘시지 않으세요?”

“금요일 저녁이잖아. 나는 되도록이면 주말에는 쉬려고 해. 물론 중요한 투자 건은 제외하고….”

피터는 자신의 차로 직접 우리를 호텔로 안내했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점심 때 봐.”

“네, 감사합니다.”

호텔 앞에 우리를 내려준 피터는 그대로 떠났다.

마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피터는 왜 ‘페이스 페이퍼’에 대해서 한 마디도 안 하지?”

“글쎄. 자신은 ‘페이스 페이퍼’ 때문이 아니라 학교 선배로서 너희들을 초대한 거야. 뭐, 이런 느낌을 주려는 걸까. 마크, 그건 내일 생각하고, 나 지금 너무 먹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스테이크. 내가 살게!”

* * *

“성국, 여기 비싼 데 아니야?”

데니스는 괜히 쭈뼛거렸다.

[이번 주에도 삼전 전자의 주식과 아마조네스의 주식은 쭉쭉 오르고 있다고….]

둘 다 내가 주식을 하거나, 땅을 사서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몰랐다.

“한 달 30달러로 아껴 살아서 용돈 많이 남았어.”

[나 효진 그룹에서 후원받는 남자야.]

효진 그룹에서는 학비와 기숙사 비용을 비롯해서 일종의 품위 유지비로 용돈도 넉넉하게 보내줬다.

물론 그에 대한 보답은 준호 재단 잡지에 때마다 얼굴을 비치는 정도였다.

“아, 그렇지…. 암튼 잘 먹을게. 모자라면 나도 보탤게.”

“알았어.”

우리 셋은 자리에 앉아서 모두 스테이크를 시켰다.

마크가 흥분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바라봤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뉴욕 놀러 왔을 때, 여기서 먹었어. 그때도 정말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성국이 덕분에 먹네.”

“많이 먹어.”

나는 스테이크를 한 입 먹었다.

[하아, 이게 성공의 맛인가.]

물론 겨우 스테이크 가지고 그 정도 성공의 맛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는 이 정도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게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됐단 사실이다.

“뉴욕은 정말 다른 거 같아. 모든 게 빠르고….”

오하이오 출신의 데니스에게 뉴욕은 거의 신세계와 같았다.

“데니스, 아마 영화감독이 되면 뉴욕이나 LA에 살게 될 거잖아.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둬.”

“다들 하버드 나오면 적당히 돈 잘 버는 회사에 들어가서 월급쟁이가 될 거라고 여기실 텐데… 영화 한다고 했다가 돈도 못 벌고 평생 가난하게 살까 봐 걱정이야.”

데니스는 불안한 미래에 대해서 토로했다.

[데니스, 걱정 마. 너 엄청 성공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데니스, 영화감독 하다가 안 되면 우리 찾아와. 내가 우리 회사에 고용할게. 너 같은 인재는 어디든 필요하잖아.”

“말이라도 고마워, 성국.”

마크가 불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너는 매번 우리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지만… 우리는 괜찮을까?”

“마크, 성공할 거라고 믿어야 그 근처라도 가지 않겠어? 부정적인 생각만 하면서 시도도 안 해볼 순 없잖아.”

“그래….”

“오늘은 맛있게 먹고, 내일의 고민은 내일 하자.”

나는 스테이크를 한 입 크게 잘라서 입에 넣었다.

정말 한 달 동안 핫도그에 오렌지, 단백질 셰이크만 먹어대서 이곳의 스테이크는 더 맛있었다.

* * *

피터의 회사는 911 테러의 흔적이 아직 그대로인 그라운드 제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 똑.

문이 열리면서 미란다가 성국과 마크를 데리고 들어왔다.

“피터, 손님이요.”

피터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성국, 마크. 잘 쉬었어?”

“네.”

“미란다, 우리 마실 것 좀 부탁해요.”

“네, 피터.”

나는 무의식적으로 창문으로 다가갔다.

사무실에서는 그라운드 제로가 그대로 보였다.

마치 뉴욕 고층 빌딩 사이에 거대한 블랙홀이 생긴 느낌이었다.

“사실은 내 오피스도 원래는 세계 무역센터였어. 운이 좋다고 말하기에도 미안한데… 그날 나는 오전에 미팅이 있어서 회사에 나가지 않았거든.”

나와 마크는 조금 놀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11 테러로 수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몇 년 안 된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참 빨리 잊는 것 같아. 그때 난 평생 같이 일한 파트너를 잃었고, 그 충격으로 한동안 일을 쉬기도 했어.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삶의 태도가 변하더라고. 그날을 잊지 말잔 의미로 사무실도 일부러 여기 구했어.”

피터는 미안한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했지?”

“아니요. 그때 정말 많이 힘드셨을 텐데, 다음에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알려주세요.”

“그러지. 자, 다들 앉아서 일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볼까?”

“네.”

나는 드디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 * *

피터는 편하게 이야기를 이끌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지난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페이스 페이퍼’의 가치에 대해서 많이 논의해봤네. 그리고 가장 큰 리스크라 여긴 자네와 마크의 대표 자격도 말이지. 근데 말이야. 솔직히 말하겠어.”

피터는 잠시 뜸을 들이며 나와 마크를 번갈아봤다.

[어서 말하라고, 피터. 나 지금 심장 쫄린다고!]

저번 생의 성격이 튀어나와서 호통칠 뻔했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

피터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둘이 젊은 ‘페이스 페이퍼’를 이끄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의견들이야. 우리는 자네들이 거침없이 성장하도록 최선의 지원을 해주고 싶네. 자, 여기 우리의 계약 조건일세.”

피터는 서류를 내밀었다.

나와 마크는 서류를 확인했다.

나와 마크를 공동 경영자로 인정하며 최선을 다해 지지해 주겠다는 피터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3년 동안 전폭적인 투자와 동시에 나와 마크가 동등하게 최대 지분을 유지한다는 조건이었다.

“초창기는 아마 우리 투자만으로도 유지가 되겠지만, 점점 더 커지면 더 큰 자본이 필요할 거야. 그땐 내가 자네들에게 유연한 투자 조언가가 되어주도록 할게.”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여러모로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물론 피터가 수익률에 있어서 안 챙겨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시 아버지나 윙클 형제들처럼 우리의 경영권마저 위협하는 계약 조건이 들어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호의적인 계약 조건이었다.

“어떤가, 두 사람은?”

마크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곤 천천히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저랑 마크가 살게요. 이제부터 같이 일할 거잖아요.”

피터가 함박 미소를 지었다.

“좋지!”

* * *

마크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그렇게 빨리 결정해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내가 저번 생에서 얼마나 많은 계약서를 보고 사인했는지 알면 너는 까무러칠 거야.]

“응. 괜찮은 조건이야. 우리 경영권이 확실하게 지켜지잖아. 그리고 계약서 세부 조항은 내가 아는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조율할게. 대한민국에서 대기업 상대하는 변호사들이라 절대 불리한 조항은 넣지 않을 거야.”

“어, 그래…. 솔직히 나도 피터가 좋긴 해. 제시 아버지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편한 느낌이랄까.”

“마크, 그래도 우린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 너무 믿지 말자고.”

“성국, 넌 정말 내가 아는 열두 살 중에 가장 신중한 것 같아.”

[당연하지. 마크, 네가 아직 모르겠지만,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가 되는 데까지 딱 10년 남았어.]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때, 엘리베이터에 달린 모니터에서 삼전 전자의 광고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제 삼전 그룹을 뛰어넘을 준비가 되었다.

* * *

데니스와 나는 뉴욕의 음악 전문 학교인 맨해튼 음악 대학으로 향했다.

맨해튼 음악 대학은 실용음악을 위주로 가르치는 유명 대학이었다.

“마크는 미팅 피곤하다고 잔대.”

“성국, 넌 안 피곤해?”

“응. 난 열두 살이잖아.”

나는 배시시 웃었다.

“미셸이 이번에 엄청 많이 도와줬어. 맨해튼 음악 학교에 아는 사람 있다고 소개도 해줬어.”

[흠… 수상한데….]

“데니스, 혹 미셸은 안 만나?”

내 물음에 데니스가 팔짝 뛰며 놀랐다.

“아, 아니… 성국,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난 그냥 물어본 건데.”

깜빡깜빡.

[이건 열두 살의 순진한 눈 깜빡임이야. 데니스, 내 앞에서 뭘 그렇게 놀라?]

데니스는 그제야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미안… 난 혹시 오해하나 싶어서.”

“데니스, 난 솔직히 연애 잘 몰라. 모태솔로잖아.”

열두 살에 모태솔로는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난 고등학교 때 잠시 사귄 애가 있긴 했어. 근데 공부하다 보니까 바빠서 헤어지고 정신없었어. 그나저나 성국아, 너는 진짜 연애 안 해?”

“응. 성인이 되기 전에 연애하는 거 아니야. 대한민국에서는 모두 그래.”

[연애. 저번 생에서 엄청 많이 해봤지만, 다 소용 없었어. 사람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고,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덜터덜 뉴욕의 거리를 걸었다.

* * *

미셸이 소개해준 남학생이 우리를 맞았다.

남학생은 드럼 스틱이 든 가방을 옆으로 메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일즈라고 해요. 미셸 누나한테 연락받았어요.”

“전 데니스이고, 이쪽은 성국이라고 제 룸메이트예요.”

“저도 그 프로 봤어요. 한 달 동안 30달러로 살기요. 그거 보고 저도 다음에 한번 해보려고요. 음악 하는 사람들도 미래가 불확실한 건 마찬가지거든요.”

[알지. 잘 알지.]

마일즈는 나에 대해서는 이미 조금 알고 있었다.

“참, 시나리오 쓰시는 분이 누구세요?”

“제가 쓸 건데요. 근데 성국이랑 같이 쓸까 논의 중이에요. 제가 생각한 건 원래 드럼 치는 중학생 이야기였는데, 뉴욕의 대학생 설정으로 바꾸자고 한 게 성국이거든요.”

“제가 최대한 알려 드릴게요.”

마일즈는 우선 학교 구경을 시켜줬다.

이곳은 나도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뉴욕에 위치한 학교답게 건물 하나에서 모든 게 이뤄지는 작은 캠퍼스를 소유한 대학이었지만, 교수진은 모두 미국 음악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이었다.

“저는 이분에게 드럼을 배우고 있어요. 존 키이스라고요, 드럼계에서는 그냥 레전드예요.”

“성격이 어떠세요? 데니스는 드럼 배울 때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서 그만뒀다고 했거든요.”

“선생님들마다 다르긴 한데, 존은 무서운 편이죠. 정말 수업 시간에 들어가기 전에 심장이 벌렁거릴 때도 많고… 우리끼리 그런 이야기 해요. 존은 드럼 스틱으로 우리를 치는 게 아니라 말로 우리를 때린다고요. 정말 수업 끝나고 나면 멘탈이 너덜너덜해진다니까요.”

마일즈는 존 키이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수업 방식부터 잘하는 말 등.

데니스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메모했다.

“드럼 한번 쳐보실래요?”

마일즈는 데니스에게 드럼 스틱을 내밀었다.

“오래전에 치고 안 쳐서 잘 칠 자신이 없는데요.”

“그냥 한번 쳐보세요. 예전 생각 나고 좋을 거예요.”

데니스는 마일즈가 내민 드럼 스틱을 잡았다.

그리고 드럼 앞에 앉아 처음엔 몇 번 이것저것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짧은 연주곡 하나를 그대로 연주했다.

마일즈가 감탄스러운 눈으로 데니스를 쳐다봤다.

“잘 치시는데요?”

“아니에요. 이 곡 하나만 그때 죽도록 연습했거든요.”

데니스는 아쉬운 듯 드럼 스틱을 놨다.

* * *

나와 데니스는 피터와의 약속 장소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인터뷰를 마친 데니스의 얼굴에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게 어려 있었다.

“데니스, 드럼 포기한 거 후회하지 않아?”

“가끔 후회해. 그때 그 선생님의 말에 상처받지 말고 내 실력을 더 갈고닦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 하거든.”

“데니스, 영화의 주인공이 그런 성격이면 어떨까. 왜, 채찍을 가하면 가할수록 강해지는 사람 있잖아. 독한 말을 들으면 언제고 저 사람의 말을 뛰어넘어 주겠어! 이런 독한 마음을 품는 거지. 연습도 더 열심히 하고….”

“그러는 사이에 그 선생님이랑은 엄청 갈등하고?”

“응. 20대 초반에 연애도 하고 다른 친구들처럼 휴가도 가고 해야 하는데, 그러는 사이에 주인공은 연애나 그 외의 것들도 모두 포기하는 거야.”

“성국,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데니스의 눈빛이 또다시 반짝였다.

역시 예술가들은 달랐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갈 때 가장 빛이 났다.

“나, 뉴욕은 처음인데… 정말 이곳에는 곳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사는 것 같아. 성국, 넌 뉴욕 와봤어?”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레이스와 지내던 곳 근처였다.

“필립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에 이곳 숙소에서 지냈어.”

[그레이스는 아직 여기 살 텐데….]

이때, 익숙한 얼굴의 한 사람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성국이 맞아?”

“그레이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맨해튼이 좁긴 좁지.]

“성국아, 뉴욕엔 어쩐 일이야?”

“뉴욕에 일이 있어서요. 여기는 제 룸메이트 데니스요.”

피터와의 약속으로 온 것이라 그레이스에게 따로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

“그레이스. 안 그래도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하려고 했어요. 저 이번에 ‘페이스 페이퍼’ 관련해서 계약하려고 하거든요. 효진 그룹에서 계약서 좀 검토해 주셨으면 해서요.”

“그런 건 당연히 부탁해야지. 근데 어디 가는 길이야?”

“아, 피터라고, 저희 대학 선배이자 투자자가 되실 분이랑 저녁 먹으러요. 그레이스도 같이 가실래요?”

“내가 가도 되는 자리야?”

“제가 피터한테 물어볼게요.”

나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서 피터에게 연락을 했다.

나를 돌봐준 선생님 같은 분이라는 말에 피터는 그레이스를 보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그레이스, 7시에 울프 스테이크에서 보기로 했어요. 시간 맞춰 오세요.”

“알았어. 나보고 그 사람 좀 제대로 봐달라는 거지?”

“그럼요.”

[사실은 그레이스, 피터 좋은 사람 같아서 소개해 주려는 거야. 혼맥만큼 좋은 인맥도 없기도 하고.]

그레이스는 어서 가서 준비해야겠다며 근처 아파트로 들어갔다.

데니스가 나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성국, 이건 내 상상일 수도 있는데. 너 혹시 피터에게 그레이스 소개해 주려는 거 아니야?”

뜨끔.

[너무 티 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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