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아침 일찍 그레이스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새벽까지 데니스와 새로 쓸 시나리오 이야기를 하다 잠들어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 성국아, 아직도 자니?
“그레이스, 어제 자리 일찍 떠서 미안해요.”
- 아니야, 덕분에 피터랑 이야기 많이 하고 뉴욕에 좋은 친구도 생긴 거 같아.
“잘됐네요.”
- 너 가기 전에 잠시 백화점 좀 가려고 했는데… 비행기 시간 몇 시니?
“오후 4시요.”
- 그럼, 12시까지 백화점으로 올 수 있니? 어제 너 보니까 후드 티만 있고. 그것도 심지어 작아지기 일보 직전이던데….
“그레이스, 저 옷은 필요 없어요.”
[그레이스, 난 얼굴이 옷을 대체한다고….]
하지만 그레이스는 단호했다.
- 성국아, 아들이 그 꼴로 하버드 돌아다닌다면 엄마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니?
[엄마 이야기 나오면 또 약해지는데….]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크 데리고 갈게요.”
툭. 전화를 끊고 시계를 봤다.
벌써 10시였다.
욕실에서 데니스가 면도까지 하고 말끔한 얼굴로 나왔다.
누가 봐도 데이트 가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근데 마크가 안 보였다.
“데니스, 마크 어디 갔어?”
“아침에 우울한 얼굴로 센트럴파크 좀 걸어야겠다고 나갔어. 자기도 뉴요커가 돼보고 싶다나 뭐라나.”
“실연의 아픔을 달래러 갔구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후드 티를 살폈다.
“데니스, 내 후드 티가 너무 낡았나?”
“그것보다 성국아, 네가 너무 빨리 자라는 거 같아. 옷들이 계속 작아지는 느낌이야.”
“원래 10대 때는 다 이러는 거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키는 이제 175cm 정도 된 것 같았다.
* * *
그레이스가 환한 미소로 나와 마크를 맞이했다.
“오늘 하버드로 돌아간다며?”
“네.”
“데니스란 그 친구는 먼저 간 거야?”
“약속이 있어서요.”
마크는 데니스 이야기만 나오면 괜히 딴청을 피웠다.
“내가 뉴욕 온 김에 옷 좀 사줄 테니까, 제발 옷 좀 신경 써. 성국.”
“전 이게 편한데요. 마크, 그렇게 이상해?”
“성국, 나도 너만큼 옷에 관심 없잖아.”
[나는 의도된 거고, 너는 진짜 관심 없는 거지.]
그레이스가 백화점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그레이스, 전 그냥 후드 티면 좋을 거 같아요. 수업 다니기에 너무 편하거든요.”
“어쩔 수 없네. 우선 오늘은 당장 입을 거 몇 개 사고… 내가 치수 알아놓고 사서 보낼 테니까, 옷에 제발 신경 좀 써.”
“네.”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참, 그레이스… 피터 어떤 사람 같아요?”
“신중하고 좋은 사람 같았어.”
“그쵸?”
“성국아, 너는 내 연애보다는 네 연애를 먼저 신경 써야 할 거 같지 않아?”
“전 열두 살이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한 브랜드에 들어가서 눈앞에 보이는 회색 후드 티 세 장과 데님 두 종류를 집었다.
그레이스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그거면 돼?”
“네, 그레이스.”
[그레이스, 앞으로 사람들은 전성국 하면 이 회색 후드 티에 데님을 떠올리게 된다고. 난 다 계획이 있는 거야.]
* * *
데이먼 윙클이 아들인 캐머런과 타일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피터와 계약 조건을 조율 중이라고 들었다. 대체 너희들은 뭘 한 거야?”
“저희는….”
캐머런이 얼버무렸다.
“라이언 클럽에 초대까지 해놓고, 성국이란 아이랑은 어떤 진척도 없었잖아. 유리하게 프로젝트를 끌어오겠다고 하더니, 대체 여태까지 너희들이 한 게 뭐야?”
“성국은 처음부터 저희를 경계하는 것 같았어요. 저희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요.”
데이먼은 화난 얼굴로 서류를 검토했다.
“피터가 내건 조건을 알아보긴 할 텐데….”
“아버지, 천천히 ‘페이스 페이퍼’에 접근하는 건 어떨까요?”
타일러가 재빨리 이야기를 꺼냈다.
“피터가 이미 초기 투자자로 나섰으니깐, ‘페이스 페이퍼’가 정말 가치 있는 기업인지 아닌지 판명 날 때까지 저희는 지켜보는 거죠. 만약 2, 3년 후에도 ‘페이스 페이퍼’가 성장하고 있다면 그때 투자자가 더 필요할 거잖아요. 피터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시기가 분명 올 거예요.”
“그때를 노리자고?”
“네. 그때까지 저랑 캐머런은 성국이든 마크든 꼬셔놓을게요.”
“더 좋은 건 둘의 분열이라는 걸 명심해라.”
“네, 아버지.”
* * *
데니스의 ‘페이스 페이퍼’가 드디어 연애 중으로 바뀌었다.
축하의 댓글이 미친 듯이 달렸다.
“데니스, 축하해. 내 망언은 다 잊어줘.”
마크도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다.
1학년 1학기. 하버드도 연애 중 모드로 많은 이들이 바뀌고 있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나와 마크.
나는 안 하는 거였고, 마크는 못 하는 거라는 커다란 차이점이 존재했다.
“성국아, 수업 들으러 가자.”
“그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을 집어 들었다.
요즘 나의 스케줄은 살인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버드 수업 일정을 쫓아가면서 마크와 함께 ‘페이스 페이퍼’ 업그레이드를 진행했고, 데니스와 틈틈이 <채찍>의 시나리오 회의를 했다.
“성국, 너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거 아니야?”
“부족해. 정말 부족해.”
[에너지 넘치는 10대라도 이 스케줄을 소화하긴 무리라고.]
나는 하품을 쩍 했다.
마크도 옆에서 연신 하품을 했다.
“성국, 우리 창업과 하버드 공부를 병행할 수 있을까?”
“나도 그게 의문이긴 해.”
“난 솔직히 학교 그만두고 싶은데, 부모님이 반대하실 것 같아서 더 그래.”
[한국이나 미국이나 부모님들의 마음은 다 똑같군.]
나는 다시 하품을 하며 책을 펼쳤다.
“마크. 피터와의 계약이 정리되면 정식으로 고민해보자.”
“그러자.”
마크도 연신 하품을 해댔다.
제시가 오랜만에 우리 앞에 얼굴을 드러냈다.
“둘 다 왜 이렇게 죽어가는 거야?”
“안녕, 제시.”
마크는 이제 제시를 봐도 예전처럼 찐따 짓을 하지 않았다.
그건 제시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의미였다.
“성국, 마크. 이번 할로윈 파티 때는 얼굴 보는 거지?”
[벌써 할로윈이었던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 대학 1학년의 할로윈 파티는 특별하잖아.”
제시가 졸린 나와 마크를 설득했다.
“알았어, 제시. 마크랑 다 같이 갈게.”
“그날 난 마를린 먼로로 코스프레할 거야. 성국, 뭐로 할 거야?”
[아, 귀찮아.]
하지만 이미 간다고 말해놓은 상황이다.
“난, 아이언맨. 마크 넌?”
“그럼 난 스파이더맨.”
“마크, 멋진데!”
“성국, 너도! 아이언맨 엄청 기대된다.”
마크와 내가 너드처럼 킥킥거리며 웃으니까, 제시가 한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너무 마크랑 붙어 다니더니 마크처럼 되는 거 아니야?”
[그거 지금 욕이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암튼 그날 봐.”
제시는 휭하니 사라졌다.
마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제시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제시가 널 좋아하는 거야 ‘페이스 페이퍼’ 하는 애들은 다 안다고. 네가 글 올리면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 제시잖아. 근데 넌 맨날 제시한테 철벽을 치잖아.”
“마크, 난 아직 어린애야. 제시도 얼른 또래의 좋은 남자를 만나야지.”
“또. 애늙은이처럼 이야기한다. 그나저나 너 진짜 아이언맨으로 나타날 거야?”
“응.”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 시절에 말이야. 내가 대한민국 재계의 아이언맨이었단 말, 했던가. 캬아, 그때 정말 죽여줬었지. 진짜 내 마음대로 다 휘두르고 살았다고. 그러고 보니 심장 안 좋은 것도 비슷하네.]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 *
피터가 보내온 계약서를 검수했다.
효진 그룹의 변호사가 검수한 바로도 특별한 독소 조항은 없었다.
전적으로 나와 마크의 공동 경영을 인정한다는 내용도 있었고, 초기 3년 동안 투자를 약속했다.
수익의 배분율은 다른 사모펀드보다 훨씬 양호한 수준이었다.
“마크 어때?”
“난 좋은 거 같아. 근데 성국아. 진짜 우리 이제부터 ‘페이스 페이퍼’를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드네.”
마크는 원래 하나밖에 모르는 성격이었다.
“흠. 나도 그렇긴 해. 마크, 솔직히 이야기할게. 난 만약 ‘페이스 페이퍼’가 처절하게 실패한다고 해도 아직도 10대일 거야. 그때 하버드에 다시 돌아오거나, 나는 한국으로 들어가서 다른 일을 해도 돼. 하지만 너는 20대를 날릴 수 있는 거잖아.”
“인생을 걸지 않으면 성공도 할 수 없는 거잖아.”
마크를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마크가 멋있어 보였다.
“마크, 멋있는데?”
“나도 가끔은 멋있을 때가 있어야지.”
“마크,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계약을 조율하고 모든 계약이 끝나면 아마 거의 겨울방학 직전일 거야. 겨울방학을 인생의 마지막 휴가라 여기고 서로 실컷 놀고 와서 3월부터 ‘페이스 페이퍼’에 올인하는 거 어떨까? 피터에게도 우리의 계획을 미리 말해둘게.”
“그래. 성국, 우리 한번 인생을 걸어보자.”
마크도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근데 성국. 너 아이언맨 의상 샀어?”
“어, 아마조네스에서 시켰어.”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스파이더맨 안 시켰어?”
“지금 시키면 할로윈 파티 전까지 올까?”
“떠들 시간에 어서 주문해! 마크.”
마크는 득달같이 노트북을 열고 스파이더맨 의상을 시켰다.
* * *
2003년 10월 31일.
삼전 전자의 주식은 계속 순항 중이었고, 아마조네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난 아플과 나이스 운동화 회사의 주식까지 보유해서 2007년 리먼 사태 이전까지 누구나 부러워하는 증권 포트폴리오를 가진 셈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핸드폰이 울렸다.
아빠였다.
[돈 든다고 전화 잘 안 하시는데, 웬일이지?]
나는 전화를 받았다.
“아빠! 어쩐 일이세요?”
- 성국아, 잘 지내?
“네, 아빠. 겨울방학에 들어가서 상의드릴 일이 많아요.”
- 저번에 엘렌 윈프리 쇼 나온 거 봤어. 겨우 30달러로 그렇게 한 달 동안 먹고 너 몸 상한 건 아니지?
“저 괜찮아요. 그 일로 ‘페이스 페이퍼’ 투자도 성사됐고, 마크랑 조만간 창업할 거 같아요.”
- 그래, 효진 그룹 담당 변호사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 아빠가 전화한 건 말이다. 네가 사둔 판교 지역이 대대적으로 개발에 들어간다고 하더구나.
2003년 하반기이니 한창 그럴 시기이긴 했다.
- 평당 400만 원까지 거래가 된다고 하는구나.
판교는 이때 미친 듯이 올랐다가 10년간 하락한다.
바로 대한민국도 잃어버린 10년의 부동산 타이밍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서민들 아파트야 얼마나 오르락내리락하는지 관심 없었지만, 공장 부지를 매입해야 했기 때문에 땅값에는 민감했다.
“아빠, 다 파셔서 제가 말하는 두 지역에 땅을 좀 사두세요.”
- 땅 판 돈 전부로 다시 땅을 사라고?
“네, 아빠. 마곡과 동탄 두 지역이요. 판교 땅 팔아서 딱 반반씩 마곡과 동탄 지역에 땅을 사두세요.”
- 어, 그러마. 성국아, 아빠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너무 무리하지 마. 알았지?
“어엉, 아빠.”
오랜만에 아빠의 목소리를 들으니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때, 뒤에서 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빠, 지희예요. 오빠, 잘 지내?
그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저번 생에서는 동생들이 그렇게 귀찮았는데….
암튼 이번 생에서는 좀 감성이 풍부한 몸에 태어난 건 맞는 것 같았다.
- 오빠, 언제 와?
“겨울 방학에 갈게. 조금만 기다려, 지희야.”
- 오빠 오면 포옥 안아줄게.
[이래서 다들 딸바보, 여동생바보가 되는구나.]
나는 찡해진 코끝을 슥슥 문지르곤 얼른 대답했다.
“응. 지희야. 오빠가 얼른 보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