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화
“성국아, 쉬고 있어. 엄마랑 아빠랑 저녁 준비할게.”
“응. 엄마.”
방문을 열었다.
몇 달 만에 왔지만, 역시 집이 편했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려는 순간.
“형아!!!!!!”
“오빠!!!!!!”
민국이와 지희가 나에게 뛰어들었다.
지희의 양손에는 인형이 들려 있었고, 민국이의 양손에는 권투 글러브가 들려 있었다.
“형아, 나랑 권투하자.”
“오빠, 지희랑 인형 놀이. 이거 오빠가 해.”
[하, 정말 집에 왔구나.]
눈 밑으로 점점 다크서클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한 손에는 권투 글러브를 끼고, 다른 손에는 인형을 들고 양쪽으로 놀아주고 있었다.
민국이 녀석은 내 손에 계속 펀치를 날렸다.
“원, 투. 원, 투.”
“오빠, 우리 차 마시러 가요.”
지희는 인형들에게 보이지도 않는 차를 계속 먹여댔다.
[이래서 애 보느니 차라리 일한다는 거구나….]
* * *
“와, 김치찌개. 와, 보쌈.”
눈앞에 그토록 그리던 김치찌개와 보쌈이 놓여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엄마의 김치찌개와 아빠의 보쌈을 먹었다.
[역시 이 맛이야!]
“성국아, 천천히 먹어.”
엄마가 나를 말렸지만, 들을 생각이 없었다.
[엄마, 나 말리지 마. 얼마나 먹고 싶었는데….]
아빠도 걱정스레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갑자기 매운 거 많이 먹으면 탈 날 수 있어. 천천히 먹어.”
“네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보쌈을 입에 욱여넣었다.
저번 생의 유학 생활이야 풍족하다 못해 복에 겨운 수준이라 김치며 보쌈 같은 거 편하게 먹었다.
이번 생에서는 학교 근처 한식당이 있기는 했지만, 비싸서 자주 갈 수는 없었다.
“오빠, 물.”
지희가 얼른 내 곁으로 물을 건넸다.
“고마워, 지희야.”
나는 지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겨울방학 동안 뭐 할 거야?”
아빠가 일부러 말을 걸었다.
[좀 배가 부르네….]
나는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JP 가서 연습생 하게, 아빠.”
“그래, 이제야 네 또래답네. 그런 음악도 많이 듣고, 거기 가면 또래 친구들도 많이 사귀겠다. 그치?”
[연습생 하겠다는데, 반기는 집은 우리 집뿐이라고.]
엄마도 반겼다.
“어머, 성국아. 거기 ‘저스트’ 만든 회사지? 범선이는 잘 지내나 몰라.”
[응. 효진 그룹 구예정이랑 아주 잘 만나고 있어.]
엄마는 여전히 해체된 그룹 ‘저스트’의 팬이었다.
“이제는 걸 그룹이랑 더 어린 보이 그룹 만든대요. 전 그냥 연습생 신분으로 지내다 가려고요.”
“형아, 형아. 거기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나도 오디션 보면 안 돼?”
“넌 너무 어려서 안 돼.”
“몇 살이면 돼?”
“초등학교는 마치고 생각해보자.”
[민국아, 괜히 계약 꼬이면 빼오기 귀찮으니까, 형아가 회사 차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엄마도 민국이를 달랬다.
“그래, 민국아. 초등학교는 졸업하고 그때 생각해보자.”
“아하, 싫어, 싫어. 형은 공부하러 초등학교도 때려치우고 미국 갔잖아.”
“전민국!”
아빠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아빠, 무섭게 왜 그래?]
민국이는 잔뜩 삐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형이야 당연히 공부하러 간 거니까 그렇지. 너는 학생이 공부는 맨날 안 하고, 그러면서 무슨 가수가 된다고 그래? 요즘 가수들 보면 공부도 다 잘해서 좋은 대학 다니잖아.”
“치, 맨날 나만 뭐래.”
민국이가 제대로 사춘기가 오는 모양이었다.
[이럴 땐 형인 내가 나서야지.]
“민국아, 형이 JP 연습생 하면서 한번 동생 데리고 와도 되냐고 물어볼게.”
“진짜, 형?”
“진짜지. 근데 회사에서 싫어할 수도 있어서 장담 못 해. 형이 물어볼 때까지 공부 열심히 하고 있을 거지?”
“응! 형!”
아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얘는 도대체 누구 닮아서 이렇게 공부를 안 하는지 몰라. 유치원 다니는 지희도 맨날 책 읽는데….”
“자기야, 민국이 그만 혼내. 자기 요즘 민국이만 혼내는 것 같아.”
“맞아!”
민국이는 대차게 반응했다.
나는 민국이를 찬찬히 살폈다.
나 닮아서 키도 또래보다 컸고, 얼굴도 봐줄 만했다.
[역시 우리 집 유전자 어디 안 갔네. 정신연령만 키우면 되겠어.]
“성국아, 어서 밥 먹어.”
“응, 엄마.”
나는 보쌈을 매운 김치에 싸서 한 입에 밀어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몇 번 씹어 넘겼는데… 그 순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왜 이러지?]
나는 배를 안고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 * *
화장실 밖에서는 엄마, 아빠가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매운 거 너무 갑자기 많이 먹는다 싶었어. 성국아, 괜찮아.”
[아, 안… 괜찮.]
“소영아, 약국 가서 약 사올게.”
“어, 빨리 다녀와.”
이 와중에 민국이와 지희는 화장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피웠다.
“형아, 괜찮아? 내가 도와줄까?”
“오빠. 오빠. 마이 아파?”
[이것들아. 이럴 땐 모른 척해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꾸륵.
* * *
엄마가 내 배를 쓰다듬었다.
“성국아, 이제 좀 괜찮아?”
“어…. 엄마.”
나는 정말 몸 안에 음식물이라고는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쏟아냈다.
그러곤 화장실 앞에서 장렬히 쓰러졌다.
약을 사온 아빠가 나를 업고는 침대에 겨우 옮겼고, 민국이와 지희가 돕겠다며 고사리손으로 내 팔과 다리를 들었다.
[정말 한국 온 첫날부터 모양 안 살게…. 흑.]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성국아, 학교 다닐 때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응, 잘 먹고 다녀.”
“저번에 아빠가 그러시던데, 30달러로 한 달 살기 했다며? 그때, 몸 많이 상한 거 아니야?”
“오늘 갑자기 매운 거 먹어서 그래. 걱정 마, 엄마.”
“정말, 고집은 누굴 닮아 이렇게 센 거니.”
[누구겠어. 엄마, 아빠 닮았겠지.]
엄마의 따뜻한 손이 배를 문질문질하니 갑자기 어릴 적이 떠올랐다.
엄마가 이렇게 배를 문질문질해 주면 막 종알종알 이 일 저 일 참견하다가도 까무룩 잠들곤 했는데….
그때가 참 좋았는데….
* * *
“성국아, 성국아. 오늘부터 JP에 연습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엄마, 몇 시야?”
“8시. 근데 너 몸 괜찮아?”
나는 몸을 벌떡 세웠다.
간만에 푹 잤더니 몸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엄마, 나 완전 괜찮은데.”
“하루 정도 푹 쉬면 안 될까? 엄마가 담당자한테 전화해줄까. 엄마도 SKJ 엔터테인먼트 이사잖아.”
[헬리콥터맘은 사양할게, 엄마.]
나는 얼른 욕실로 향했다.
“엄마, 괜찮은 거 같아. 나가보고 몸 안 좋으면 말하고 오늘은 일찍 올게.”
“절대 무리하면 안 돼.”
욕실 문을 잡아당기려는 순간, 민국이가 내 앞에 와서 서더니 주위를 의미심장하게 둘러봤다. 그러곤 나에게 초콜릿 한 봉지를 내밀었다.
“형아, 연습하다 힘들 때 먹어.”
“민국아, 이거 뇌물이지?”
“형아, 뇌물이 뭐야?”
[민국이 녀석, 공부 안 했구나.]
나는 민국이의 어깨를 탁 잡았다.
“이거 먹고 얼른 JP에 데려다 달라고 주는 거지?”
“히이. 들켰네, 형. 그래도 내가 제일 아끼는 초콜릿이야.”
[이 녀석, 어디서든 굶어 죽진 않겠어.]
나는 초콜릿을 받았다.
“형도 회사에 적응해야 하니까, 빨리는 못 물어봐. 기다리면서 공부 좀 하고 있어.”
“응, 형아!”
민국이는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똑. 똑.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무혁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성국아! 어서 와.”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냈지. 나 너 ‘페이스 페이퍼’ 보는 재미에 푹 빠져서 지냈어. 미국 방송에도 출연하고, 대단하던데….”
“그냥 운이 좀 좋았어요.”
“운이 아니라, 네가 기회를 만드는 것 같던데…. 참, 이따가 식사하면서 천천히 이야기하고, 오늘부터 JP 연습생으로 지낼 거니까 스케줄 알려줄게.”
방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을 나섰다.
“우선 오늘은 간단한 테스트를 할 거야. 보컬, 댄스 그런 능력이 지금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하는 거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1년 차 연습생들 있거든. 그 애들한테 인사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은 끝. 1년 차 연습생들은 네 나이부터 시작해서 성인까지 다양하게 있어.”
“네.”
“그럼, 보컬 테스트를 진행해 볼 건데… 우리 JP 보컬 선생님 중에서 제일 능력자셔. 이분이 찍은 애들 중에 데뷔 못 한 애가 없어.”
나는 살짝 목을 풀면서 보컬 연습하는 공간으로 향했다.
방음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방들이 한 층에 쭉 있었다.
방무혁은 세 번째 방 문을 두드리더니 문을 열었다.
짧은 머리에 카리스마 가득한 얼굴의 한소리가 나를 반겼다.
“네가 그 유명한 성국이구나.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와, 실물로 보니까 더 잘생겼네. 너 진짜 얼굴은 바로 데뷔해도 될 것 같아.”
“소리 씨, 우선 보컬 테스트부터 해주세요. 이 친구 보컬이니 댄스니 아무것도 해본 적도 없어요.”
“정말요? 여러 기획사에서 탐낼 얼굴인데…. 이리 들어와봐.”
방무혁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보컬 트레이닝룸으로 불리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소리는 건반 앞에 앉더니 음계를 쭉 쳤다.
“음악 시간에 노래 부르는 것처럼 편하게 부르면 돼. 긴장할 거 없어.”
“네….”
[별거 아니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음악 수업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실기 평가에서 나쁜 성적을 받은 적은 없었다.
솔직히 예체능은 타고나는 재능의 영역이었다.
그 재능으로 실기 평가를 보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내가 건의해서 모든 예체능 선생님들은 학생의 노력 여부를 실기 평가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봤다. 물론 난 노력이라면 누구 못지않았다.
한소리가 건반 음계를 하나씩 쳤다.
“잘 들어봐. 이게 도. 이게 레… 들었지?”
“네.”
“우선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 올라가보자.”
“도레미파솔라시도.”
나는 필 충만하게 불렀다.
한소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연습한 노래 있니?”
“‘저스트’의 <거짓이야> 연습했어요.”
“그래. 그럼 그 노래 앞부분만 좀 해보자.”
“네!”
나는 이번에도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이거야 완전 껌이지. 내가 이 노래를 두 돌 때부터 듣고 자랐다고. 한소리 선생, 이 노래 내가 ‘저스트’한테 직접 골라준 거야.]
“그만.”
[한 소절도 제대로 못 불렀는데, 그만두라고?]
한소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방무혁을 쳐다봤다.
“피디님, 평소대로 말해도 되죠? 얘 무슨 특별 대우 받고 그런 거 아니죠?”
“그렇긴 한데… 살살 해요. 성국이는 방학 동안만 연습하고 또 미국 들어갈 거예요.”
“살살하긴요. JP 연습생 되려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체험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되죠.”
“선생님,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나는 공손하게 앞 손을 모으고 말했다.
“그래, 성국아. 이게 네 앞날을 결정하는 데도 도움 될 거야. 솔직히 난 네 외모 보고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 이건 뭐, 바로 데뷔해도 될 만한 외모잖아. 근데, 노래 듣는 순간… 진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구나, 이 생각이 드는 거야.”
[한소리 선생, 말을 너무 꼬아 하네! 어? 내가 누군 줄 알아?]
나는 화를 꾹 눌렀다.
“솔직히 이 정도 실력으로 연습생 체험해 보겠다는 거, 다른 애들한테 미안하지 않니?”
“한소리 선생님, 살살 해요.”
오히려 방무혁이 말렸다.
“너, 연습은 하고 온 거야?”
“네, 많이 듣고 많이 연습했습니다.”
“근데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이 모양이라니? 도대체 내 모양이 어때서? 내가 어때서!]
한소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 피디님, 솔직히 이야기할게요. 얘 그냥 음치예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모욕이었다.
나는 지금 아이큐 121 이후로 가장 큰 좌절을 겪고 있었다.
얼굴이 감당할 수 없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날 보더니 한소리가 빙긋 웃었다.
“성국아, 내가 말을 너무 세게 했지?”
[흑… 나 완전 상처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