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한소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네가 혹시 그냥 재미 삼아 연습생 하려는 마음인지 아닌지 테스트해본 거야.”
[한소리 선생, 당신 테스트에 나 지금 마음이 아주 너덜너덜하다고.]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하고 맥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너 엄청 똑똑하다며?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하버드 간 만큼 여기 애들도 데뷔하기 위해서 정말 모두 열심히 노력해. 그래서 너한테 좀 독한 말 한 거야.”
[어서 나에게 음치라고 한 말 취소해, 한 선생.]
“그리고 사실 성국아, 너 노래에는 크게 재능은 없어.”
[하아, 두 번 죽이는구나.]
한소리가 음료수를 내밀었다.
“이거 먹고 기운 내고, 보컬 연습은 일주일에 두 번이야. 내가 그때마다 숙제 내줄 테니까, 열심히 연습해 와야 해. 내가 음치도 무대 설 수 있게 다 만들었어. 너도 열심히 하면 어디 가서 노래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을 거야.”
“네, 선생님.”
* * *
방무혁이 내 어깨를 도닥였다.
“한소리 씨 장난 아니지?”
“네… 완전 쫄았어요.”
“무섭지 않으면 애들이 연습 잘 안 해오거든. 솔직히 10대 때 놀고 싶은 게 더 많잖아. 의욕도 중요하지만, 정말 무대에 서려면 연습, 또 연습해야 하거든.”
“네에.”
나는 대한민국 아이돌 연습생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이제 댄스 담당 선생님 만나보러 갈까?”
[댄스는 자신 없는데….]
나는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댄스 연습실은 한 층 아래야.”
[벌써부터 다리가 떨리네.]
나는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흙수저 집안에 태어나서 하버드까지 간 나인데, 이만한 일에 기죽을 수 없지!
* * *
댄스 담당은 센 언니 캐릭터로 유명한 이서린이었다.
후에 TV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는 안무가였다.
“오늘은 네가 어느 정도 기본기가 있는지 테스트 간단하게 해볼게.”
[나 기본기 없는데….]
“우선 나 따라서 몸 간단히 풀어보자.”
“네.”
나는 이서린을 따라서 몸을 풀었다.
몸 푸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게 기본기를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성국아, 이제 내가 하는 동작을 따라 해봐. 이건 우선 웨이브 기본 동작이야. 머리 내밀고. 다음으로 가슴, 배. 골반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반대로 배, 골반. 가슴, 머리 집어넣고!”
“어때, 할 수 있겠어?”
“네!”
“자신감은 최고네. 천천히 나 따라 해봐.”
이서린은 말처럼 머리부터 배까지 유연하게 웨이브 동작으로 연결시켰다.
[머리, 가슴, 골반, 배….]
나는 순서를 떠올리며 머리부터 유연하게 웨이브를 하는데.
“성국아! 머리, 가슴, 골반. 배라고!”
“그, 그렇게 했는데요.”
이서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지금 한 덩어리가 움직이잖아. 웨이브는 정확하게 머리, 가슴, 배. 이렇게 몸 부분, 부분이 움직여야 하는 거야.”
[내가 레고도 아니고 어떻게 몸이 그렇게 따로 움직이나, 이 선생.]
큭.
뒤에서 지켜보던 방무혁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너무하네. 너무해.]
그래도 이서린은 한소리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성국아, 처음에 오면 다들 이래. 너무 걱정하지 마, 앞으로 나만 잘 따라오면 잘할 수 있을 거야. 가능성이 보여.”
“네, 선생님.”
나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땀을 닦았다.
* * *
가창 D
댄스 D-
[뭐야, 이 선생. 가능성 있다고 하고는 한 선생보다 더 점수 짜게 줬잖아! 역시 사람은 믿으면 안 돼.]
나는 황망한 얼굴로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난생처음 보는 D라니….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방 피디님, 제 성적이 연습생들 중에서 어느 정도 되는 건가요? 이 정도 점수 받고도 데뷔한 연습생 있나요?”
“솔직히 말할게. 충격 먹지 마.”
[이 상황에 더 먹을 충격이 남아 있다고?]
눈 밑 다크서클이 땅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연습생 중에 이 점수는 못 본 것 같아. 그래도 둘 중 하나는 다들 뛰어나니까 연습생으로 캐스팅되거든. 성국이야 외모가 워낙 좋잖아. 근데 내가 여러 연습생 봐온 결과, 가장 중요한 건 정말 노력이야. 음치도 고칠 수 있고, 몸치도 충분히 아이돌 가능해.”
“위로 감사해요.”
방무혁이 내 어깨를 도닥였다.
“위로 아니고 진짜. 네가 예전에 예진이란 애 탈락시켜야 할까, 말까 고민할 때 우리한테 그런 말 했잖아. 그룹에는 뛰어난 멤버도 필요하지만, 주변 멤버들과 잘 섞이는 튀지 않는 멤버도 필요하다고.”
[내가 그런 주옥같은 말을 했었구나.]
“이제 연습생 1년 차들한테 인사하러 가자. 노래는 개인적으로 레슨 계속 받겠지만, 댄스는 앞으로는 이 친구들이랑 함께할 거야. 다들 회의실에 모여 있을 테니까, 가보자.”
“네, 피디님. 근데 혹시… 저에 대해서 알까요?”
“내가 그냥 미국에서 학교 다니는 친구인데, 방학 동안 연습생으로 들어올 거란 말만 했어.”
“그냥 그 정도로만 우선 소개해 주셨으면 해서요.”
“부담스러워서 그래? 아마 초록창에 네 이름 검색하면 연관 기사들 뜰 건데. 최근 사진들도 좀 뜰 수도 있고.”
“그때 알면 말하고요. 그 전까지는 저도 좀 평범한 10대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서요. 또래 친구들도 사귀고요.”
“그래, 알았어.”
* * *
회의실 문이 열리자, 아홉 명 정도의 남녀가 섞여 앉아 있었다.
어린 친구는 내 또래부터 시작해서 성인으로 보이는 연습생도 있었다.
방무혁은 연습생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기는 오늘부터 같이 연습할 전성국이라고, 내가 일전에 말했지? 미국에서 학교 다니는데, 방학이라 특별히 들어왔어. 성국아, 인사하자.”
“안녕하세요. 전성국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박수 소리가 들리더니, 곧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박, 남자 연습생 중에 얼굴 1등 아니야?”
[이봐, 그 얘기 다 들린다고.]
그래도 얼굴 1등이라니 앞서 받은 가창과 댄스의 최하위 점수에 충격받은 마음이 좀 위로되는 느낌이었다.
“궁금한 거 있으면 자유롭게 질문해.”
방무혁의 말에 여기저기서 질문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방무혁이 얼른 중재를 했다.
“다들 엄청 궁금하구나. 그냥 시계 방향으로 하나씩 질문하자. 자, 정미부터.”
“몇 살이세요?”
“한국 나이로 열네 살 돼요.”
“와, 키가 얼마예요?”
“정확히는 모르는데… 175cm 정도 될 거예요.”
“미국 어디에서 학교 다녀요?”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요.”
“무슨 양복 광고 같잖아.”
남자애들이 키득거렸다.
다음으로 얼굴이 유독 하얀 여학생이 질문했다.
“특기가 뭐예요?”
“전 얼굴이요.”
그 순간, 회의실이 웃음으로 터져 나갔다.
“푸하하하.”
“얼굴이 특기래.”
“완전 웃겨!”
[다들 왜 이러지? 사실을 말한 건데…. 이상하네.]
* * *
“성국아, 본격적인 연습은 내일부터 시작하자. 근데 연습생들 다들 너 잘 모르나 봐.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전성국을 모르나….”
“그 프로 할 때 다들 저랑 같이 기어 다니고 있었을 텐데요. 많아야 아장아장 걷고요.”
“그렇긴 하지. 나이는 나만 먹나 봐. 배 많이 고프지?”
“조금이요.”
“내가 만나야 할 가수가 있어서. 잠깐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조금만 여기서 기다려.”
“네.”
나는 연습실 사이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잠시 앉았다.
휴식 공간에는 JP를 통해서 데뷔한 가수들의 앨범과 브로마이드, 사인 같은 것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에 ‘저스트’가 당연 중심이었다.
꼬르륵.
이때, 아침에 민국이가 주머니에 밀어 넣은 초콜릿이 떠올랐다.
나는 얼른 초콜릿을 꺼내서 몇 알 먹었다.
“저기….”
누가 뒤에서 조용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뒤돌아보니 아까 회의실에서 본 얼굴이 유독 하얀 여학생과 그 옆에 앉아 있었던 여학생 두 명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안녕, 난 이유미야.”
“안녕, 난 서진아야.”
얼굴이 하얀 쪽이 이유미. 그 옆이 서진아였다.
[둘 다 나중에 무슨 그룹에서 보게 되었던 것도 같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데뷔조로 뽑힌 이후에는 얼굴이 계속 업그레이드되기 때문에 솔직히 지금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데뷔할 때 본명을 쓰는 경우도 많았지만, 예명을 많이 쓰기도 했고.
저번 생에서 어느 순간 걸 그룹은 펑클과 SOS 이후로 탈덕해서 아주 유명한 그룹 외에는 별로 기억이 없었다.
간혹 아이돌 출신 배우들은 만나기는 했지만.
“어, 안녕.”
“성국아, 우리 둘 다 너랑 동갑이야. 이번에 다 열네 살 될 거거든. 중학교 입학해.”
[그래서, 어쩌자고? 말 놓자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초등학교 1학년 중퇴 이후로 내 또래와 어울릴 일이 없어서인지 요즘 중딩들의 사회화된 행동이 뭔지 좀 헷갈렸다.
“어, 반가워.”
[이 정도면 적당한가. 아닌가. 아, 맞다. 애들은 먹을 거 주면 좋아하지.]
나는 초콜릿을 내밀었다.
“초콜릿 먹을래? 내 동생이 준 거야. 배고플 때 먹으라고.”
[초딩 때는 이거면 다 통했는데.]
“우리는 다이어트 중이라서. 미안.”
서진아가 새침하게 대답했다.
[흠, 실패네.]
확실히 또래가 더 대하기 어려웠다.
미국에서는 마크와 데니스, 제시를 비롯해서 나보다 나이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나도 굳이 실제 나이처럼 굴지 않고 어른스럽게 지냈기 때문이다.
이유미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성국아, 너 그럼 미국에서 얼마나 산 거야?”
“한 5년 정도.”
아홉 살에 넘어갔으니 딱 5년 좀 넘었다.
“와, 너 영어 정말 잘하겠다. 피디님이 영어 공부하라는데, 너무 어려워.”
[네가 머리가 나쁜가 보지.]
이유미는 좀 징징거렸다.
[징징 이유미. 새침 서진아. 나이는 동갑.]
나는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캐릭터를 입력했다.
“너희는 여기서 영어 레슨도 받아?”
“응. 영어 레슨, 연기 레슨 다 받아. 성국아, 넌 영어 공부 안 해도 돼서 좋겠다.”
이때, 지나가는 여자 연습생과 남자 연습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와, 특기가 얼굴? 이 친구야?”
“한 번에 알아보겠어. 진짜 잘생겼다. 키도 엄청 커!”
[이놈의 인기란…. ]
여기서도 나는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너, 미국에서 왔으면 거기서는 영화에서 보면 막 우리 나이 때 연애도 많이 하잖아. 너도 여자 친구 있어? 금발에 파란 눈?”
“영화는 영화일 뿐이에요.”
[이번 생에서 나는 순결한 모태솔로라고.]
키가 큰 남학생이 나를 보며 웃었다. 무쌍에 눈이 가늘게 찢어진 것이 일명 JP상이었지만, 좀 싸가지가 없어 보였다.
“야, 영화는 무슨 영화일 뿐이야. 너 거기서는 동양인이라 왕따라서 친구 없는 거지?”
[나는 관대하다. 나는 전성국이니까….]
나는 속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저, 친구 있어요. 근데 아직 연애는 안 해요. 관심이 없어서요.”
“치, 꼭 이런 애들이 나중에 여자 문제로 사고 쳐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전성국이고 마흔 살이니까….]
여자 연습생이 키 큰 남학생을 말렸다.
“건주야, 그만해. 넌 꼭 잘생긴 애들 새로 들어오면 놀리더라.”
“난 외국물 먹었다고 으스대는 애들 정말 싫거든. 너, 영어는 제대로 해? 코리아타운에서 살다 온 거 아니야?”
[나는 관대하다. 나는 전성국이고 마흔 살이며, 품격 있는 전직 재벌이었으니까….]
나는 어금니를 앙 물고 참았다.
하지만 남학생은 계속해서 깐족거렸다.
“쟤 아마 공부 못해서 연습생 핑계 대고 한국 온 걸 거야. 보나 마나 뻔하지. 여기 와서 이미지 세탁하고 아이돌로 데뷔하고, 영어 좀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 엄청 좋아하잖아.”
나의 관대함의 한계는 세 번까지이다.
그리고 지금 막 저 녀석이 내 관대함의 한계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치? 너 사실은 미국에서 엄청 놀았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먹 쥐면 어쩌게? 때리게?”
“나이가 몇 살이신지 모르겠지만, 전성국이라고 초록창에 검색 한번 해보시면 저에 대해서 다 아실 거예요. 제가 말하기에는 스펙이 너무 대단해서요.”
“뭐래? 또라이 아니야? 저 나이에 무슨 스펙이 있어?”
이유미가 휴게실에 놓인 컴퓨터로 내 이름을 검색하는 게 보였다.
“대에박!”
“왜 그래, 유미야?”
“여기 기사에… 전성국.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에 나왔던 그 어린 소년이 최연소로 하버드에 입학했대. 설마, 그 전성국이 너야?”
[이제야 알아보는군.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야, 말도 안 돼. 하버드를 무슨 중학생이 가?”
“아니야, 오빠 기사 봐. 진짜 그렇게 나와 있어. 효진 그룹의 <준호 재단> 첫 장학생 전성국 군, 하버드 입학하다.”
이때, 복도 끝에서 방무혁이 걸어왔다.
“거기 다들 왜 그렇게 시끄러워?”
“피디님! 성국이요, 정말 하버드생이에요?”
방무혁 피디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벌써 들킨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연습생 모두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봤다.
[다들 하버드생은 처음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