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예진은 나를 보더니 빙긋 웃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두두두근.
만두상 예진이 다가오는데, 왜 심장이 빨라지지?
“성국아, 뭘 그렇게 빤히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춤이나 어서 가르쳐 주세요.”
“알았어. 그럼, 시작할까?”
“네에!”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반년 전에 예진을 봤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예진 때문인지, 부정맥 때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예진은 우선 팔과 다리를 풀었다.
“성국아, 춤추기 전에는 몸 푸는 게 정말 중요해. 아이돌 생활 1, 2년 할 거 아니잖아. 또 부상당하면 다른 멤버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몸 푸는 거 잊지 마.”
“네, 누나.”
나는 예진을 따라 몸을 슬슬 풀었다.
예진은 곧 스피커에 MP3를 연결했다.
“성국아, 월말 평가 노래 뭐로 정했어?”
“노래는 저스트의 <거짓이야>랑요. 댄스는 전설의 <완벽한 남자>요.”
“어, 의외인데.”
“뭐가요?”
“미국에서 학교 다니니까, 당연히 팝송으로 준비할 줄 알았거든.”
미국 가수들은 보이 그룹이라고 해도 춤은 율동 수준이었고, 흑인들의 그루브나 소울은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실력이었다.
“그럼, 전설의 <완벽한 남자> 연습 같이 해볼까?”
“네!”
* * *
“성국아, 손을 좀 더 턱까지 올리고. 어, 그렇게!”
“성국아, 고개가 돌아갈 때 시선도 같이 움직여주는 거야.”
“자, 오른발부터 나가서 턴 돌고!”
1시간 내내 예진은 내 안무를 쉼 없이 봐줬다.
“헉. 헉. 허억-.”
나는 몸을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성국아, 너 아주 몸치는 아닌데?”
“허억- 정말요?”
“힘들지? 연습 그만할까?”
예진이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두근. 두근. 두두근. 두두두근.
연습할 때는 괜찮았는데, 또 심장이 미친 듯이 나대기 시작했다.
[호르몬 때문인가?]
나이로 치면 이제 슬슬 사춘기 호르몬이 왕성하게 활동할 때이긴 했다.
달칵.
이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진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선희야. 어쩐 일이야?”
예진이랑 같이 <원더우먼>의 멤버가 되는 그 선희가 등장했다.
확실히 선희는 큰 키에 늘씬한 몸매. 완벽한 이목구비가 지금부터도 빛이 났다.
[그래, 선희한테 확인해 보면 되겠어….]
확실히 저번 생이라면 만두상 예진이보다는 정석 미인에 가까운 선희가 내 스타일이었다.
거기다 도도한 매력까지.
내가 죽고 못 살던 스타일이었다.
“예진아, 너 여기서 뭐 해?”
“응. 성국이라고 연습생인데, 내가 좀 가르쳐주고 있었어.”
“혹시 네가 얼굴 천재 맞지?”
[내가 그런 별명으로 JP 사이에서 소문이 났군.]
나는 얼른 허리를 펴고 선희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얼굴 천재 전성국입니다.”
순간, 선희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걸 본인이 말하는 사람이 누가 있니? 너 미국서 살다 왔다더니, 한국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네.”
이 쌀쌀함까지. 나한테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여자는 처음인데…. 라며 저번 생에서는 참 좋아했던 스타일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심장은 전혀 나대지 않았다.
나는 지그시 심장에 손을 얹었지만, 고요할 뿐이었다.
“왜, 내 말이 기분 나빠?”
“아니요. 먼저 그렇게 말씀하셔서요. 제가 잘못 이해했어요.”
“근데 진짜 잘생긴 건 인정. 몇 살이야?”
“열네 살이요.”
“아하, 예진이랑 나보다 두 살 어리네.”
“네.”
예진이가 끼어들었다.
“저번 방학 때도 왜 우리 월말 평가하는 거 지켜봤잖아. 기억 안 나?”
[나 한 번 보면 보통 못 잊는데… 선희, 모른 척하는 거지?]
선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연습생이 한둘이어야지.”
[지금 설마. 나, 전성국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나 도발하는 거지?]
선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긴 머리를 풀어 헤쳤다.
선희에게는 예진과 달리 또 다른 달콤한 향기가 났다.
킁. 킁.
코가 먼저 반응했다.
드디어 사춘기 호르몬이 활동할 타이밍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심장은 나대지 않았다.
[부정맥은 아닌 모양이네, 다행이야….]
순간, 나는 번뜩 고개를 들고 만두상 예진을 쳐다봤다.
[설마… 이번 생에서는 내 취향이 저 만두상이라고? 아니야, 나 정석 미인 좋아한다고….]
내가 당황하는 사이, 선희가 나와 예진을 번갈아 봤다.
“연습 안 할 거야?”
“해야지.”
“선희야, 우리 끝나고 요 앞에 새로 생긴 분식집에 밥 먹으러 가자.”
“오늘 저 가르쳐 주셨으니, 밥은 제가 살게요.”
“좋아, 성국아.”
예진은 반겼지만, 선희는 별로 반기지 않았다.
“난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지금부터 가르쳐 주시면 되죠. 그때 월말 평가 때 춤 굉장히 잘 추셨잖아요.”
나는 일부러 선희에게 더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내가 왜 마크가 하던 찐따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거지….]
“맞아, 선희가 우리 또래 연습생 중에서는 제일 춤 잘 춰.”
“그럼, 우선 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자.”
“네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 * *
“성국아, 많이 먹어.”
예진이는 살뜰하게 나를 챙겼다.
“성국아, 너무 실망하지 마.”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로 선희는 나를 위로했다.
나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전설의 <완벽한 남자>를 추는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여름날 지친 나방이 불빛을 향해 돌진하는 저돌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싶었지만, 동영상의 나는 거미줄에 걸려서 바동거리는 귀뚜라미일 뿐이었다.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성국아, 너처럼 완벽한 애가 춤 못 추는 건 좀 인간적이던데?”
[선희, 지금 나 놀리는 거야?]
“그래, 성국아. 너 연습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우리는 그때 너보다 더 못 췄어. 어서 밥 먹자.”
예진이의 위로에 숟가락을 겨우 들었다.
“근데 성국아, 너 미국에 여자 친구 정말 없어?”
예진이의 물음에 선희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미국에선 동기들이 나보다 다 나이가 많기도 하고, 연애에 관심도 없었어요.”
이건 사실이었다.
“누나들은 연애 안 하세요?”
나는 은근히 질문을 던졌다.
[그래, 이건 자연스러웠어. 전성국!]
“우리 JP 연습생들끼리 연애 금지야.”
그 순간,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연애 금지라니?
그럼, 예진이랑 안 된다는 거잖아!
[잠깐, 내가 왜 겨우 연애 금지에 놀라는 거지? 연애는 원래 관심도 없는데….]
이놈의 사춘기 호르몬은 정말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성국아, 왜 그렇게 놀라?”
“아, 그냥요. 연애 금지라는 게 좀 놀라워서요. 제가 미국에서 살다 왔잖아요.”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아, 그렇지. 근데 몰래 다들 해.”
예진이가 친절하게도 알려줬다.
“진짜요?”
“응.”
“누나도 남자 친구 있어요?”
“난 없어.”
[휴우- 다행이야….]
예진이의 대답에 또 심장이 슬쩍 나댈 기미를 보였다.
혹시라도 이상하게 보일까 봐 나는 얼른 선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누나는요?”
“나? 나도 없어. 우리는 연습하기에도 바빠.”
나는 다시 조금 기운을 차렸다.
“누나들 많이 드세요. 제가 살게요.”
“참, 성국아. 번호 좀. 내일 또 연습하러 올 거지?”
[당연하지!]
“같이 연습하면 금방 늘 거야.”
나는 얼른 예진의 폰에 전화번호를 남겼다.
“나도 줘.”
“네!”
선희의 폰에도 전화번호를 남겼다.
어쨌든 내일 또 예진을 본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 * *
나는 후드 티를 몇 번이나 입고 벗었다.
하지만 도대체 마음에 드는 핏이 나오지 않았다.
똑. 똑.
“성국아. 아침 먹어.”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나는 하는 수 없이 조금 핏이 어정쩡한 후드 티를 입고 나갔다.
“성국아, 오늘도 연습 갈 거야?”
“응.”
“친구들은 많이 사귀었어?”
“조금. 엄마, 나 이 후드 티 잘 안 어울리지?”
“후드 티 편하다고 그것만 샀잖아.”
“다른 옷은 없나….”
있을 리가 없었다.
패셔니스타 재벌 시절의 추억은 다 버리고 일에만 매진하다 보니 후드 티밖에 안 산 지 꽤 오래됐다.
후드 티 위에 더플코트 혹은 패딩을 입는 게 내 겨울 패션의 전부였다.
“성국아, 옷 사러 갈까? 안 그래도 너 옷 좀 사야 할 것 같았어. 오늘 연습 끝나고 같이 백화점 갈까?”
[끝나고 예진이랑 밥 먹어야 하는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엄마, 주말에 같이 가요.”
“그래. 성국아, JP 여자 연습생들 이쁘지? 친구 하자는 애 없어?”
“엄마, 우리 연애 금지야.”
“엄마가 언제 연애라고 했어? 친구 없나 했지.”
뜨끔.
도둑이 또 제 발 저리고 말았다.
“엄마, 나 빨리 가봐야 해.”
“응. 어서 먹어.”
엄마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엄마, 그런 얼굴로 보지 마. 나, 여자 친구 생겨도 절대 공개 안 할 거야. 나 원래 비공개 연애가 취향이거든.]
* * *
“헉. 헉. 헉.”
나는 거침 숨을 토해냈다.
연습실에서 1시간 넘게 혼자 춤 연습을 했는데, 예진은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어제 같이 연습하자고 그랬잖아! 그냥 물어본 건가… 내가 착각한 건가….]
또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이때,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선희와 예진이 동시에 들어왔다.
[예진 누나! 왜 이렇게 늦었어?]
어김없이 심장이 먼저 나대기 시작했다.
내가 반갑게 다가가자, 예진이 미안한 얼굴로 먼저 말을 걸었다.
“성국아, 오늘 연습 같이 못 할 것 같아. 그리고 앞으로도 같이 연습 못 할 거 같아.”
“무슨 말이세요?”
“나랑 예진이가 데뷔조로 뽑혔거든.”
둘이 데뷔조로 뽑혀서 <원더우먼>으로 데뷔한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게… 이제부터 나랑 선희는 데뷔조라서 숙소 생활 할 거야. 아침에 매니저가 회사에 데려다주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아마 개인적으로 너한테 춤 연습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그럼… 누나들 이제 못 보는 거예요?”
[예진 누나! 안 돼!]
예진은 정말 미안한 얼굴이었다.
“완전히 못 보는 건 아니고. 근데 데뷔조로 준비 시작하면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개인 시간이 안 나. 성국아, 미안해.”
“성국아, 너도 열심히 해서 데뷔해. 알았지?”
나는 이를 앙 물었다.
“누나들 꼭 데뷔하세요. 응원할게요!”
예진과 선희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연습실을 나섰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주책없이 나대던 심장도 고요해졌다.
[하아, 이 몸의 첫 실연인가….]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을 바라봤다.
혹시나 예진이가 다시 들어오나 기대를 했지만, 징징 이유미였다.
“성국아, 한소리 선생님이 너 보컬 레슨 올라오래.”
“어….”
* * *
“성국이 이번 월말 평가에서 <거짓이야> 부를 거지? 연습 좀 했어?”
“네… 했는데, 잘은 모르겠어요.”
“우선 오늘은 편하게 불러보자.”
“네에.”
한소리가 건반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저스트의 <거짓이야>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게 했던 모든 눈빛 모두가 거짓이야. 내게 했던 모든 행동 모두가 거짓이야. 내게 했던 모든 약속 모두가 거짓이야! 거짓이야!”
나는 처음으로 <거짓이야>를 끝까지 다 불렀다.
한소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감정이 이렇게 좋았어?”
“네에?”
“꼭 실연당한 사람처럼 노래 부르잖아. 성국아, 내가 널 잘못 평가한 것 같아. 음은 좀 많이 불안하긴 한데, 감정이 너무 좋아. 감정 좋은 보컬은 정말 찾기 힘들거든.”
한소리의 칭찬을 듣는데, 하나도 안 기쁜 건 왜일까.
* * *
그날 밤, 나는 집에 와서 ‘페이스 페이퍼’에 오늘 보컬 연습한 영상을 올렸다.
- 2004년 1월 2일. ‘저스트’의 <거짓이야> 커버했습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곧 댓글들이 수두룩 달리기 시작했다.
- 보컬 완전 좋아졌어!
- 이 노래 장난 아니게 훅 한다. 거짓이야. 거짓이야. K-POP 중독성 장난 아니야.
- 감정 죽이는데? 너 꼭 실연당한 사람 같아.
나는 조용히 다시 <거짓이야>의 가사를 음미했다.
날 보며 웃던 그 눈빛도.
춤 가르쳐 주겠다던 그 약속도.
“모두 거짓이었어. 흑-.”
나는 뜨거운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또 어른이 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