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21화 (121/231)

제121화

“안녕하세요, 전성국이라고 합니다.”

“오, 영어 발음이 좋으시네요. 미국에 사셨어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거든요.”

“외모로 봐서는 대학생?”

“대학생이긴 해요.”

“아, 맞다. 민국이가 자기 형 천재라고 엄청 자랑했어요.”

우리는 자연스레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원장 선생님은 안절부절못하더니 우리 대화에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한국말로.

“올리버 샘, 이분이 수업 보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물론이죠.”

올리버는 예나 지금이나 정말 뻔뻔했다.

원장 선생님은 그제야 안심을 하더니 올리버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올리버 샘이 미국에서 아이비리그 중에 하나인 프린스턴 졸업하셨거든요. 여기는 하버드 다니시니깐 두 분이 말이 아주 잘 통하실 거예요.”

“하버드 다닌다고요?”

올리버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제가 수업 좀 지켜봐도 되겠죠? 민국이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부모님이 걱정하시거든요.”

“아… 네. 다른 학생들도 있으니까, 한 10분 정도 보시면 되겠죠?”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올리버는 자연스럽게 나를 민국이가 있는 교실로 안내했다.

올리버는 긴장을 풀려는 듯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댔다.

“근데 형제분이 무척 닮았네요.”

[뭔 소리야, 내가 민국이보다 훨씬 잘생겼지, 올리버.]

“낯이 익은데, 혹시 저희, 어디서 봤나요?”

[당연하지. 정우네 과외 할 때 나랑 이런저런 수다 많이 떨었잖아, 올리버.]

“제가 예전에 TV 프로그램도 나오고, 광고도 여러 개 찍었거든요.”

“아, 그래서 낯이 익구나…. 오늘은 저희 교재에 있는 거 문법 간단히 설명하고, 프리 토킹 진행할 거예요. 잠시 보세요.”

“혹시 수업 끝나고 상담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올리버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올리버의 수업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교재가 있어서인지 교재의 문법 몇 개를 설명하고는 그걸로 단순 문장 몇 개를 만들게 하더니, 아이들에게 서로 주고받고를 시켰다.

민국이는 곧잘 수업을 따라갔다. 신기하게….

[역시 머리는 좋은 거였나….]

나는 민국이의 반 옆에서 진행하는 지희의 반 수업도 연이어 지켜봤다.

지희는 생각대로 반 아이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사용하는 어휘도 훨씬 많았고, 표현력도 좋았다.

[지희는 걱정 없겠군.]

“성국 군.”

뒤에서 원장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이제 원장실에서 커피 한 잔 할까요?”

“네. 근데 저 커피 못 마시거든요. 물 주세요.”

“알았어요.”

* * *

“우리 학원이 이 근처에서는 나름 오래된 학원이에요. 원어민 선생님들도 요즘 말이 많잖아요. 미국에서 대학도 제대로 안 나온 선생님들 쓴다고요. 저희는 그런 거 검증 철저하게 해요.”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묵묵히 생수를 마셨고, 원장 선생님은 학원을 어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원장 선생님, 이력 보니까 보스턴 대학 졸업이라고 쓰여 있던데 보스턴 대학 나오신 건 아니죠?”

“아, 그게요. 보스턴 대학에 있는 단기 코스 졸업했어요. 그것도 졸업이죠. 참, 저는 수업은 안 해요. 보시다시피 학생들이랑 선생님들 조율만 해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저희는 100프로 원어민 수업이에요.”

[그래, 원장도 먹고살아야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수업을 마친 올리버가 들어왔다.

“민국이 자습하고 있으라고 했어요.”

올리버는 자연스레 영어로 말했다.

원장 선생님이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대답을 했다.

“감사합니다, 시간 내주셔서요.”

“민국이 가르치는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죠. 궁금한 거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세요.”

올리버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앉았다.

[안 본 사이에 많이 한국 사람 같아졌어, 올리버.]

나는 모른 척 민국이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민국이 수업에서 뒤떨어지진 않나요?”

“아까 보셨듯이 수업 시간에는 곧잘 따라 해요. 근데 복습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원래 언어라는 것이 자주 사용하고 반복해야 하잖아요. 민국이가 그게 좀 부족해요. 이 부분은 집에서 좀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올리버는 나름 민국이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올리버, 생각보다 이제 진짜 선생님 같네요.”

내 말에 올리버가 살짝 놀랐다.

“이제 진짜 선생님 같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 기억 안 나세요, 올리버?”

올리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과거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내가 혹시 과외 한 적 있던 학생인가요?”

“정우라고 제 친구 과외를 했었죠. 한 7년 전에요.”

“정우?”

“기억 안 나세요? 정우 과외 할 때 정우 옆에서 종알거리던 그 친구요.”

“설마….”

올리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나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그때 저한테 그런 말씀 하셨잖아요. 미국에서 대학 그만두고 한국 왔는데, 여긴 영어만 잘하면 돈 벌기 쉽다고요.”

“아, 그건….”

올리버는 변명을 찾고 있었다.

우리 대화를 못 따라오는 원장 선생님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우리 눈치만 살폈다.

“아, 맞다! 기억나네, 그 꼬맹이. 그때도 영어 엄청 잘해서 나랑 농담 많이 주고받았잖아.”

“농담은 아니고, 그냥 이야기를 나눴죠.”

“그래, 맞아. 내가 내 얘기도 많이 했지?”

“여기 원장 선생님은 올리버가 프린스턴 졸업한 걸로 알던데요?”

“아, 그게… 나도 사실대로 이야기하긴 했어. 근데 원장이 그렇게 말하는 게 학부모들에게 좋을 거라고 해서… 프린스턴 나와서 이렇게 작은 한국 학원에서 누가 영어를 가르치겠어. 그리고 나 나름 이제 경력도 오래돼서 애들 잘 가르쳐.”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가 됐다.

민국이를 가르치는 것을 보니 별 무리는 없어 보였다.

“아무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어요. 앞으로 민국이 잘 부탁드려요.”

“당연하지.”

올리버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알은척해 놨으니, 별 탈 없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원장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는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민국이랑 지희,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물론이죠. 저희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요. 그리고 저… 제 학교는….”

“부모님께 말씀 안 드릴게요. 어차피 수업은 원어민 선생님들이 다 하시니까요. 올리버, 잘 부탁드려요.”

“네.”

올리버도 얼른 대답을 했다.

이 학원 원장도, 올리버도 내게 약점을 잡혔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민국이랑 지희의 수업은 허투루 하지 못할 것이다.

* * *

오른손은 민국이, 왼손은 지희를 꽉 잡고 민국이의 보습 학원으로 향했다.

“형아, 또 수업 시간에 들어와서 볼 거야?”

“왜, 싫어?”

“어. 좀 창피해. 형아, 보습 학원은 나 혼자 가면 안 돼? 이제부터 열심히 할게.”

“알았어, 대신 정말 형아랑 한 계약, 잊으면 안 돼!”

“당연하지. 나 한다면 한다고! 근데, 형아.”

민국이는 내 손을 어디론가 잡아끌었다.

“어디 가?”

“형아, 돈 있어?”

“그건 왜?”

“나 학원 가기 전에 떡볶이 사줘. 거기 피카츄 돈가스도 엄청 맛있어.”

지희도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지희도 배고파!”

“지희도 먹고 싶어?”

“응!”

지희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에 안 넘어갈 대한민국의 오빠는 없을 것이다.

“그래, 오빠가 다 사줄게. 가자.”

“와아아아!”

“형, 쵝오!”

민국이와 지희는 뛰어가면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오빠, 달려!”

[그래, 오늘은 호구가 되어주마. 시키고 싶은 거 다 시켜!]

* * *

나는 엄마 앞에 민국이 지희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엄마는 화난 얼굴로 조르륵 앉은 우리를 쳐다봤다.

“성국아, 민국이랑 지희 어떻게 공부하는지 지켜보러 간다고 하고는 애들 학원도 안 보내고, 떡볶이 먹고 있으면 어떻게 해.”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필이면 지갑을 가지고 나가지 않아서 잔뜩 시켜 먹고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핸드폰도 없어서 분식집 주인아줌마에게 빌렸다. 그 바람에 민국이랑 지희도 학원도 못 가고 분식집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민국이는 엄마 올 때까지 더 먹겠다며 떡볶이와 튀김을 추가해서 먹기까지 했다.

“엄마, 죄송해요.”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장남 체면이 말이 아니네….]

이때, 민국이가 나를 꼭 안았다.

“엄마! 형아 혼내지 마! 내가 떡볶이 사달라고 한 거라고! 그리고 학원 시간 내가 착각해서 못 간 거야. 형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지희도 나를 꼭 안았다.

“엄마, 오빠 혼내지 마! 오빠 잘못한 거 없어!”

“맞아!”

민국이는 나를 다시 꼭 안았다.

“정말 못 말리겠네. 엄마는 그냥 그렇게 대책도 없이 떡볶이 사 먹고 한 게 어이가 없어서 혼내는 거잖아. 만약 오늘 엄마가 일 나가는 날이었어 봐. 니들 몇 시까지 거기 있었겠어?”

“엄마, 민국이랑 지희 혼내지 마세요. 제가 지갑 잘 못 챙겨서 그런 거죠.”

“누가 형제들 아니랄까 봐 서로 감싸긴. 암튼! 앞으로는 학원 시간 절대 늦지 말고! 끝나면 딴눈 팔지 말고 얼른얼른 들어와? 알았지?”

“네에!”

“대답은 잘해요.”

엄마는 겨우 화를 풀었다.

나는 민국이와 지희를 꼭 안았다.

엄마에게 혼날 때 나를 지켜준 동생이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정말 저번 생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서로의 약점을 찾아내서 이르는 게 저번 생의 동생들이었는데….

울컥.

또 마음 한편이 울컥했다.

“형아, 울지 마.”

“오빠! 울어?”

“아니야, 오빠 괜찮아.”

엄마가 혀를 찼다.

“쯧쯧. 성국아, 뭐 그런 거 가지고 울어?”

“우는 거 아니라….”

[감동한 거라고!]

민국이와 지희가 나를 꼭 다시 안았다.

[그래, 이번 생에서는 내가 너희들 끝까지 책임지마.]

그런 의미로.

“전민국, 올리버 샘이 수업 시간에 영어는 곧잘 하는데, 잘 늘지 않는 것은 복습을 안 해서라고 하시더라. 오늘 배운 거 형이랑 복습하자.”

“형! 갑자기 왜 이래?”

“그리고 지희. 지희는 오늘 보니까 어휘도 좋고 표현력도 좋더라. 그런데 거기서 만족하면 안 돼. 어휘력 더 늘려면 영어책을 많이 읽어야 해. 오빠가 지희 사준 <마법사 해리> 있지?”

“으응. 오빠.”

지희도 뭔가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예전에 네가 씹어 먹던 책이야.]

“자, 민국이는 학원 교재 가져오고. 지희는 <마법사 해리> 가져와. 형이랑 공부하자!”

민국이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사람 안 바뀌네.”

“전민국, 어서 책 가져와.”

민국이와 지희는 투덜거리면서도 책을 가지러 방으로 향했다.

엄마가 나를 보며 빙긋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 장남이 최고야!”

[그걸 이제 알았어? 엄마도, 참….]

* * *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이 됐다.

나는 ‘페이스 페이퍼’를 켰다.

그리고 짧게 친구들의 소식을 살폈다.

마크의 유럽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셀카로 끝이 났다.

[쯧쯧. 삼각대라도 사서 가지….]

비행기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 두근거린다는 여행의 시작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멘트로 끝이 났다.

데니스는 여자 친구 미셸과 정겨운 한때를 보내는 사진들을 종종 올렸다.

[헤어지면 다 지울 거. 너무 티내지 않는 게 좋아, 데니스.]

물론 이런 악담은 적지 않았다.

제시는 연일 타일러와의 염장샷을 올렸지만,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쇼윈도 커플 같으니라고….]

띠링.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핸드폰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이름이 떴다. 바로 전미진이었다.

- 삼전 유치원 특별반 동창회가 2월 1일 일요일 삼전 호텔에서 개최됩니다. 많은 참석 부탁드려요. 전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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