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삼전 유치원 특별반 동창회라고?
나에게 삼전 유치원이란 많은 것을 얻은 것과 동시에 어린 나이에 나의 위치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 곳이었다.
삼전 유치원 특별반은 삼전 그룹의 자제인 전미진을 비롯해서 정재계 유력 인사들의 자녀와 손자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사회 배려자일 뿐이었다.
나는 문자를 깔끔하게 씹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띠링.
또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마크였다.
- 성국아, 미국 언제 와? 나 기숙사에서 너무 외롭다.
[징징거리긴….]
제시와 데니스도 연애를 하는 데다가 1학년 1학기가 끝난 지금, 사실 하버드는 모두 연애 중이나 다름없었다.
- 조금만 기다려, 마크. 그사이에 연애라도 해보든가.
- 성국, 너도 갈비뼈 때문에 인기 추락했어.
- 그 정도에 추락할 인기 아닌 건 알거든. 마크, 한국은 이제 밤 12시야. 나 잔다. 미국에서 봐.
- 잔인한 녀석.
- zzz.
* * *
“성국아, 아까부터 전화가 계속 와.”
엄마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전화가?”
“응. 어서 좀 확인해봐.”
나는 침대맡에 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알 수 없는 번호로부터 세 통의 전화가 와 있었고, 전미진이라고 이름을 밝힌 메시지가 여러 개나 와 있었다.
- 성국아, 나 삼전 유치원 동창 전미진이야. 기억하지?
- 성국아, 특별반 유치원 동창회 한다는 거 메시지 보냈는데 봤어?
- 성국아, 왜 답이 없어?
- 이거 혹시 전성국 핸드폰 아니에요?
- 성국아, 양 비서 아저씨가 확인했는데 맞는다는데 왜 전화를 안 받아. 확인하면 바로 연락 줘.
[성격 여전하네….]
자기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집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전미진의 성격은 여전했다.
물로 난 전미진의 문자에 답할 생각은 일도 없었다.
하버드에 들어간 해에 전재형 회장은 나를 불러 전태국과 대면을 시켰다.
그 자리에서 전재형 회장은 나같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결국, 삼전 같은 대기업의 부품이 될 수밖에 없단 사실을 각인시켰다.
그 이후로 나는 삼전과의 마음의 연을 끊었다.
다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성국아, 전화 받아봐.”
“어, 알았어.”
나는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성국 군 맞죠?
전미진이 아니었다.
나는 얼른 발신자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바로 양 비서였다. 핸드폰에 양 비서의 번호는 아직 저장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네, 양 비서님.”
- 내 목소리 기억하는군요.
“네, 잘 계셨어요?”
- 그럼요. 성국 군 소식은 종종 전해 듣고 있습니다. 너무 훌륭하게 자랐더군요.
“아직 더 커야 해요.”
- 그렇죠. 허허.
양 비서는 낮게 웃더니 본론을 꺼냈다.
- 성국 군, 미진 아가씨 기억해요? 삼전 유치원 특별반 같이 다녔는데요.
“네, 어렴풋이요.”
솔직히 대여섯 살의 기억이야 안 난다고 해도 상관없었지만, 나는 삼전 유치원 특별반 동창회에 한번 나가볼 작정이었다.
전미진이 애타게 찾는 문자를 보니 그들 사이에서 사회 배려자였던 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눈으로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 미진 아가씨가 이번에 삼전 유치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 돌렸는데, 성국 군만 답이 없어서요. 성국 군 이번 일요일에 시간 되면 와서 오랜만에 동창들 만나는 거 어떨까요?
“네, 나갈게요.”
- 다행이네요. 그럼, 제가 차를 집 앞으로 시간에 맞춰서 보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삼전 유치원 시절 나는 은따에 가까웠다.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똑똑한 놈은 그들에게 친구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미진이 내 얼굴에 빠져서 나를 챙겨주는 바람에 나를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모두들 조용히 나를 따돌렸다. 그걸 모를 나이는 당연히 아니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고 일어났다.
이제 복수할 타이밍이다!
* * *
양 비서 아저씨는 늘 그렇듯 정확한 시간에 맞춰서 집 앞에 도착했다.
“성국 군, 잘 지냈어요?”
“네, 안녕하세요.”
“이제 정말 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네요. 정말 잘 컸어요. 어릴 적에도 잘생겼는데, 더 잘생겼네요.”
이때, 뒤에서 반듯하게 생긴 청년이 얼른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양 비서! 양 비서, 나야!]
바로 어른 양 비서의 아들이자, 나를 오랫동안 보필한 젊은 양 비서였다.
하지만 반가워할 순 없었다.
“아버지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전 양철수라고 해요.”
“말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시잖아요.”
“그래도 되나….”
철수는 조금 망설였다.
[내가 허락해줄게. 양 비서, 말 편하게 해.]
어른 양 비서가 온화한 얼굴로 아들을 바라봤다.
“철수야, 편하게 대해. 성국 군, 너도 예전에 본 적 있지?”
“태국 도련님 생일 파티에서요.”
“그렇지. 그때 봤구나.”
철수는 내게 뒷문을 열어줬다.
[정말 양 비서 의전 오랜만이야.]
나는 살짝 옛날 생각이 나서 코끝이 찡했다.
젊은 양 비서와는 많은 추억이 있었다.
나이 차이도 많지 않았고, 주위에 진정한 친구란 존재하지 않는 재벌 후계자로서 양 비서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나는 뒷좌석에 얼른 탔다.
내 옆으로 어른 양 비서가 타고, 조수석에 철수가 탔다.
“저도 호텔에 도련님 보필해 드리러 가야 해서요. 같이 탈게요.”
“말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아, 그게… 그럴게. 그럼, 성국아.”
철수는 수줍게 웃었다.
아버지 양 비서만큼이나 심성이 착하고 곧은 친구였다.
“철수 형도 미국에서 대학 다녀요?”
“응. 태국 도련님이랑 같은 대학에 다녀.”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철수는 한국에서 나와 같은 서울대는 아니지만 명문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수재였다. 거기다 유학 시절 내내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녔다.
나를 보필할 목적이긴 했지만, 그만큼 공부도 잘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꼴통 전태국을 보필하느라 같은 대학에 다니다니!
내가 다 안타까웠다.
거기다 방학까지 전태국 뒤치다꺼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전태국이 방학 때 어떻게 사는지는 뻔했다.
“철수야, 도련님은 어제도 호텔에서 주무신 거니?”
“친구들이랑 한잔하고 집에 들어가기 뭐 하시다고 해서 제가 방까지 안내해 드리고 나왔어요.”
“그래, 잘했구나. 오늘은 좀 들어가라고 조언드려.”
“회장님이 아버지 말을 듣듯이 도련님이 제 말을 듣는 날이 올까요?”
[그런 날은 절대 안 와. 사람 안 바뀐다고!]
양 비서가 내 눈치를 살폈다.
“철수야, 내려서 얘기하자.”
“네, 아버지.”
나는 두 사람의 대화는 전혀 모른 척했다.
양 비서는 능숙하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아가씨가 성국 군 나온다는 말에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몰라요.”
“솔직히 유치원 동창생들 어렴풋이 기억만 날 뿐, 자세한 건 기억이 안 나요.”
“그렇겠죠. 두 분 다 어리셨으니까요. 유치원 때 미진 아가씨가 성국 군 여러모로 많이 챙기셨어요.”
[양 비서, 기억을 조작하지 마. 나를 챙긴 건 사실이지만, 여러모로는 아니지. 지 꼴리는 대로 챙겼지.]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철수가 살짝 뒤돌아보더니 나를 흘깃 봤다.
“성국아, 그런데 너… 잘생겼다는 말 많이 듣지?”
“조금 들어요.”
[JP에서 얼굴 천재라고 불렸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조금 아닌 것 같은데.”
“쓰읍. 철수야.”
“아, 네. 아버지. 앞에 볼게요.”
철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앞을 봤다.
양 비서 아저씨는 자신의 대를 이어 삼전 일가를 모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철수에게도 어린 시절부터 참 엄했다.
별거 아닌 일에도 혼나는 것을 나도 여러 번 목격했었다.
[지금도 그러다니….]
저번 생에서야 누군가 나를 모시는 일이 당연한 일이라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번 생에서 보니 철수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양 비서는 전재형 회장을 모시면서 계열사 대표들과 비슷한 연봉을 받았다. 거기다 각종 혜택은 더 많이 챙겼다.
아파트부터 시작해서 보너스까지.
못해도 서울 시내에 건물 하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고도 남을 재산을 축적했을 것인데, 왜 아들까지 저렇게 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물론 자신처럼 살면 어린 나이부터 대한민국 누구보다 많은 연봉과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철수도 그렇게 살고 싶은 걸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새 차가 삼전 호텔 입구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내가 차에서 내리자 얼른 철수는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성국아, 잘 놀고 가. 아버지, 저는 도련님 챙기러 가볼게요.”
“그래….”
양 비서는 달려가는 철수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쳐다봤다.
양 비서도 아는 거겠지?
자신이 모시는 전재형 회장과 달리 전태국은 골칫덩어리라는 것을.
“양 비서 아저씨,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요, 성국 군.”
“양 비서 아저씨 아드님이요. 꿈이 양 비서처럼 되는 거예요?”
“그건 왜 갑자기….”
양 비서가 당황스러워하는 게 한눈에 보였다.
“양 비서 아저씨는 회장님의 비서로 사시는 게 행복하세요?”
“성국 군… 그런 질문은 왜 하는 거죠?”
여전히 양 비서는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양 비서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은 나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전재형 회장님이랑 그 아드님인 전태국 형을 저도 몇 번 만났는데요. 특히 태국이 형은 저 같은 사람을 대할 때 좀 배려가 없으셨거든요.”
그 말만 하고는 나는 말을 돌렸다.
“동창회는 어디서 하죠?”
“아, 네. 스위트룸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나는 양 비서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한동안 말이 없던 양 비서는 문득 나를 돌아봤다.
“성국 군, 아까 제 아들에 대해서 한 말이요. 그 의미가 뭔지 물어도 될까요?”
“저는 열네 살인데도 하고 싶은 일이 많거든요. 친구들과 SNS도 개발해서 창업도 하고, 아이돌 연습생도 해 봤고요. 그런데 양 비서님 아드님은 이게 진짜 지금 하고 싶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띵.
엘리베이터가 스위트룸에 도착했다.
양 비서는 나를 안내하고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양 비서, 정신 차려. 전태국은 절대 전재형 회장처럼 될 수 없는 놈이야. 싹수부터 아주 샛노랗다고….]
나는 후드 티를 가다듬고 스위트룸 앞에 섰다.
* * *
양 비서는 종잇장처럼 구겨진 미간을 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방금 전 성국이의 모습은 마치 전재형 회장이 어릴 적 조용히 자신을 질책하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꼼짝없이 당했어.’ 하는 느낌이 번쩍 들었다.
거기다 자신의 아들의 미래까지 걱정하다니….
사실 자신의 아들인 철수를 전태국을 따라 유타주에 있는 대학에 같이 보낸 것은 자신이었다.
철수는 하버드는 아니어도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하나나 유명 주립 대학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철수 역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했지만, 자신이 극구 말렸다.
양 비서는 삼전 그룹에 대를 이어 충성하는 것이 자신의 아들에게도 자신이 거머쥔 부를 쥐게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간과 쓸개는 직장에 저당 잡히는 것들이다.
어차피 그렇게 직장 생활하며 멘탈 갈리느니, 돈이라도 많이 벌면 그게 최선이라고 양 비서는 생각했다.
‘아들 잘못되라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양 비서는 발걸음을 옮기는데, 앞에 철수가 전태국의 캐리어를 들고 힘겹게 쫓아가는 게 보였다.
전태국의 손에는 핸드폰 하나만 들려 있었다.
양 비서는 입을 꼭 다물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캐리어 하나를 잡아끌었다.
“아버지….”
철수가 양 비서를 쳐다봤다.
“아버지가 도와줄게.”
“감사해요.”
“철수야….”
“네?”
“너… 이 일 힘들지?”
“안 힘든 일이 어디 있어요.”
그 말에 양 비서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자식만은 힘들게 살지 말라고 자신이 선택한 삶이었지만, 자식까지 그 힘든 일을 대물림하려고 했다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철수야, 내가 시간 마련할 테니 이따가 성국 군이랑 이야기 좀 해보렴.”
“갑자기 왜요?”
“너도 아이비리그 학교 관심 많았잖아. 갈 수도 있는 성적이었고. 내 욕심에 널 도련님 딸려 보낸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생각 있으면 성국 군이랑 이야기해 보고 학교 편입 같은 거 알아보자.”
“아버지….”
철수는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때, 앞에서 전태국이 짜증 섞인 어투로 철수를 불렀다.
“양 비서, 내가 기다려야겠어?”
“아버지, 저 가볼게요.”
철수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캐리어를 끌고 갔다.
양 비서는 성국이 덕분에 자신이 아주 큰 실수를 했단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