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와, 대박!”
전미진은 나를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전미진, 입에 파리 들어가.]
“정말 성국이. 성국이 맞지?”
“응. 전성국 맞아. 네가 전미진이지?”
“어, 나 기억해?”
[물론 기억하지. 내가 네 오빠야, 전미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다른 애들도 조금은 기억나.”
나는 스위트룸에 모인 특별반 멤버들을 쭉 훑었다.
전 검찰총장 손자 강주성.
전 삼전 전자 대표 손자 김현중.
전 삼전 병원장 손녀 이세희.
전 국방부 장관 손녀 서여림.
모두들 어릴 적 모습이 있었다.
[아직 뜯어고치기 전들이군….]
“성국아, 안 그래도 모두 네 이야기 하고 있었어. 흠… 넌 내 옆에 앉으면 되겠다.”
전미진은 유치원 때나 똑같이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쥐고 흔들었다.
그래도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전미진 옆에 앉아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이세희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나를 연신 쳐다봤다.
“와, 성국아… 너 여자 친구 있어?”
“이세희! 그건 내가 물어볼 거야.”
전미진이 이세희의 말을 가로챘다.
이세희는 그제야 정신을 번뜩 차렸다.
“아, 미안. 성국이가 너무 잘생겨서 그만…”
[그런 반응 너무 식상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성국아, 너 키가 몇이야?”
강주성이 물었다.
강주성도 덩치는 제법 좋아 보였다.
“175cm 정도 되는 것 같아.”
“키는 뭐, 나랑 엇비슷하네. 근데 너 진짜 하버드 다녀? 너 기사에도 많이 났더라.”
“어, 그렇게 됐어.”
이 정도면 겸손한 대답이겠지….
[겸손 같은 거 모르고 살다가 하려니 힘드니….]
나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모두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다들 왜 그렇게 봐?”
“성국아, 어릴 적에도 너한테 눈을 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더 뗄 수가 없어.”
전미진은 유치원 때와 똑같이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여전히 부담스럽네, 전미진…. 그럼, 잘난 척 좀 해볼까.]
나는 어깨를 스윽 풀었다.
잘난 척이야 저번 생부터 지금까지 쭉 해오던 것이라 자신 있었다.
나의 첫마디는.
“근데 다들 아직 중학교 다니지?”
“어, 우리는 다 그렇지.”
김현중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봤나. 중학교 생활은 어때? 다들 어디서 중학교 다녀?”
“성국아, 우리 그냥 오랜만에 만났으니 자기소개 겸 하는 건 어떨까.”
전미진이 제안을 했다.
“좋아.”
“그럼, 나부터 할게.”
전미진이 나섰다.
[여전히 나서는 거 좋아하네.]
전미진은 제대로 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욕심은 많아서 나서는 건 참 좋아했다.
“다들 오랜만이야. 난 전미진이고, 이번에 코네티컷에 있는 로즈메리 보딩스쿨에 들어가.”
[아하, 돈 많은 애들이 많이 다니는 데. 역시 돈으로 들어갔군….]
전미진이 다음으로 서여림을 쳐다봤다.
서여림은 제법 키가 컸다.
“난 이번에 영성 중학교 들어가. 근데 내년쯤 상하이 쪽 국제학교로 갈 것 같아.”
[때맞춰 못 들어갔다는 건 어학 실력이 미달이란 소리네. 1년 공부해서 되겠어, 서여림?]
나는 팔짱을 꼈다.
삼성 병원장 손녀 이세희는 부모님 따라서 곧 네덜란드로 넘어가서 그쪽 국제학교로 진학할 거란 이야기를 했고, 삼전 전자 대표 손자였던 김현중은 서여림과 같은 영성 중학교에 입학했다.
마지막으로 검찰총장의 손자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강주성이 남았다.
“나도 곧 보스턴 보딩스쿨로 떠날 거야. 성국아, 너도 하버드면 보스턴 쪽 맞지?”
“응.”
“잘됐네. 너 거기서도 효진 그룹 후원 받는 거지?”
[뭐가 잘됐단 거지?]
우선 고개는 작게 끄덕였다.
“응.”
“안 그래도 주말에 학업 보충해줄 메이트 찾고 있었는데, 내가 돈은 충분히 줄 테니까 네가 나 좀 도와줘. 나도 하버드 가는 게 목표거든.”
강주성은 거들먹거렸다.
이들은 내가 효진 그룹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이 누구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회 배려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강주성의 말 한마디에 스위트룸은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들 이제 강주성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아는 나이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나를 사회 배려자로 아는 건가, 강주성.]
나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 최대한 차갑게 강주성을 쳐다봤다.
“강주성. 공부 혼자 못 해?”
“주변의 도움을 돈으로 살 수 있는데, 왜 어렵게 혼자서 해?”
“미국은 혼자서 알아서 잘하는 것을 굉장히 큰 메리트로 보거든. 한국과 달리.”
“내가 도움 받는 걸 학교가 일일이 어떻게 다 알겠어.”
그 말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
한국의 극성 엄마들이 미국으로 넘어가 한국식 학원이 생기는 지경이니.
“전성국, 효진 그룹 후원도 받으면서 내 돈은 받기 싫다는 거야?”
“너희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나 본데… 난 뛰어나서 효진 그룹의 후원을 받는 거지, 돈이 없어서 받는 게 아니거든.”
“돈이 있는데, 후원을 왜 받아?”
“그러는 너는 돈이 있는데 왜 하버드를 못 들어가니? 하버드에 건물 하나 지어주고, 잔디 깔아주고 들어갈 정도의 돈은 너도 없는 거 아니야?”
[겨우 대한민국에서 부자인 주제에!]
내 말에 강주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래서 없는 것들은 상대해주면 안 돼요. 지들이 잘나서 하버드 간 줄 알아.”
“강주성.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고. 나는 내가 잘나서 하버드 갔는데. 누구의 도움도 없이.”
“효진 그룹에서 후원해 줬다며!”
“공부는 내가 했지, 효진 그룹이 한 게 아니지.”
“야, 가르쳐주기 싫으면 가르쳐주기 싫다고 해. 나도 그레이스 최 접촉하고 있어. 그분이 너도 보딩스쿨 들어가기 전까지 케어해 줬잖아.”
“그레이스는 최고의 아이들만 케어하는데. 너는 그 정도 실력이 되나 궁금한데?”
“뭐라고!”
강주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미진이 팔짱을 끼고 강주성을 쳐다봤다.
“강주성, 앉아.”
그 말에 강주성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 전미진은 여전히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오랜만에 만나서 다들 유치하게 왜 이래?”
[뭐, 나보고 유치하다고! 난 지기 싫었을 따름이라고!]
전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선, 밥이나 먹자. 성국아, 너 예전에 우리 호텔 짜장면 엄청 좋아했지?”
“어….”
강주성은 앞에서 여전히 입을 삐죽거렸다.
“내가 중식당에서 음식 미리 맞춰놨어. 조금 있다가 가지고 오실 거야. 성국아, 근데 너, 하버드 가서 연애 같은 거 안 해?”
“난 미성년자잖아. 연애는 지금 관심도 없어.”
“그럼, 뭐에 관심 있어?”
이세희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창업할 거거든. 그게 지금 제일 관심사야.”
“봐. 돈 없으니까 돈 벌려고 발버둥 치잖아. 돈을 왜 벌어. 있는 돈 쓰면서 편하게 살면 되지.”
강주성은 옆에서 종알거렸다.
[저 녀석 확 밟아줄까?]
이때, 전미진이 부담스럽게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너 JP에서 연습생 했다며?”
“정말?”
“와, 대박.”
그 말 한마디에 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역시 중딩들에게 아이돌만 한 관심사도 없었다.
“성국아, JP 연습생 했으면 아이돌로 데뷔하는 거야?”
“경험만 해본 거야.”
[난 연예인은 체질이 아니야. 물론 하면 또 엄청 잘하겠지만.]
의외로 김현중이 제일 관심을 보였다.
“성국아, JP 연습생은 어떻게 들어갔어?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우리 아버지 그쪽으로는 라인이 없어서.”
“난 얼굴로 들어갔어.”
풉!
물을 마시던 김현중이 그대로 물을 바로 앞에 있던 강주성에게 뿜었다.
“주성아, 미안.”
“야, 넌 갑자기 물을 뿜으면 어떡해.”
[내가 웃겼나.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강주성이 물세례를 받은 것은 통쾌했다.
이때, 전미진이 나섰다.
“성국이는 진실을 말했는데, 뭐가 웃기니. 나 같아도 성국이 당장 뽑았겠는걸.”
“연예인들 사이에 있어도 성국이 절대 안 꿀릴 것 같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 얼굴 천재야. 미국에서도 프롬킹이었다고.]
띵동.
스위트룸 벨소리가 울리더니 곧이어 삼전 호텔의 짜장면이 들어왔다.
각종 요리도 한가득 있었지만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오직 짜장면뿐이었다!
[자, 이제 먹어볼까.]
사실 동창회에 온 이유 중에 5%, 아니 한 10%는 삼점 호텔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였다.
* * *
“성국아, 이거 내 번호.”
“어?”
전미진이 내게 전화번호를 내밀었다.
“미국에서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해. 나야 케어해 주시는 분들 다 계시잖아.”
[그럴 일 없는데….]
나는 짜장면을 후루룩 먹었다.
그래도 예의상 번호는 챙겼다. 물론 버릴 거지만.
“어, 알았어.”
“성국아, 나도 번호 줄게. 아니, 네 번호 좀 알려줘.”
“응, 그래.”
[다들 차단이야.]
모두 내 번호를 가져갔다.
“성국아, JP 오디션 볼 때 어땠어?”
“나는 그냥 얼굴로 들어간 거라 별도의 오디션 없었어.”
“거기 엄청 연습 빡세지?”
“응. 그래도 따라갈 만해.”
“근데 너, 미국 다시 들어가는 거면 연습생 중간에 떨어진 거 아니야?”
강주성은 여전히 삐딱하게 물었다.
“응. 떨어졌어.”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니들도 놀랍지? 나도 놀라워.]
나는 짜장면을 후루룩 마저 먹고는 입을 닦았다. 모두들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월말 평가는 떨어졌는데, 그 이유는 내가 너무 튀어서였어. 그쪽에서는 그룹에 들어갈 멤버를 찾고 있었거든. 이후에 다시 들어오라고 했는데, 내가 가수든 뭐든 되는 게 싫어서 나왔어. 확인하고 싶으면 내 ‘페이스 페이퍼’ 들어가봐. 다 기록되어 있어.”
“아, 맞다. 아버지가 네 ‘페이스 페이퍼’ 이야기하셨어.”
전미진이 알은척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모르는 눈치였다.
“미국의 도토리월드 같은 거야.”
그제야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니들 10년 후에는 다들 도토리월드 버리고 ‘페이스 페이퍼’ 쓰고 있을 거야.]
정말 시시껄렁한 이야기의 향연이 1시간 정도 계속됐다.
[역시 중딩이랑은 수준이 안 맞아.]
나는 시계를 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이만 가볼게.”
“성국아, 왜? 벌써 가?”
“다들 궁금해서 나와본 거야. 연락처 있으니까, 편하게 연락해.”
[물론 안 받을 거야. 모르는 번호는 받을 수도 있어서, 니들 번호 다 받은 거야.]
전미진이 제일 안타까워했다.
“성국아, 미국 가서 꼭 연락할게. 내가 하버드까지 놀러 갈게. 알았지?”
“응.”
[절대 오지 마.]
다른 친구들은 그럭저럭 원만하게 인사를 했지만, 강주성만이 잔뜩 화난 얼굴이었다.
[사내자식이 속 좁게.]
나는 강주성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버드 꼭 들어가.”
[그럴 일 없겠지만.]
“그래, 그때 보자. 하버드에서.”
[바보야. 너 입학할 땐 난 이미 졸업했지.]
나는 그저 빙긋 웃고는 뒤돌아섰다.
이것으로 삼전 유치원 특별반의 동창회는 끝이었다. 다시는 만날 일도 마주칠 일도 없다!
* * *
1층 로비에 도착하자, 양 비서가 얼른 내게 다가왔다.
“성국 군.”
“저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 양 비서님.”
“그게 아니고… 혹 시간 되면 우리 아들이랑 이야기 좀 해보지 않을래? 아까 성국 군이 한 말이 좀 걸려서.”
양 비서도 아주 나쁜 아버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했는데, 내가 이 일이 평생 안정적이니까 무작정 태국 도련님이랑 학교 같이 보냈거든. 그게 잘한 일인지 싶어서. 혹 아직 아이비리그나 다른 쪽으로 공부할 생각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한번 밀어주고 싶은데, 내가 그 나이 또래도 아니고 미국 학교는 잘 몰라서 성국 군에게 부탁 좀 해도 될까?”
“진로 상담 같은 건가요?”
“어, 그렇지. 내가 말을 너무 돌려 했지?”
“괜찮아요. 형, 어디 계세요?”
“호텔은 좀 불편할 것 같아서. 내가 성국 군 집 근처 카페에 가 있으라고 했어. 내가 거기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지?”
“그럼요.”
나는 대기한 차에 올라탔다.
양 비서의 아들이자 날 오랫동안 보좌한 양 비서는 확실히 전태국 아래에 있기는 아까운 인재였다.
그리고 전태국이 삼전 그룹을 물려받을 거라는 것도 지금의 행동으로는 장담할 수 없었다.
오래전 전재형 회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얻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어.
양 비서는 이번 생에서도 나와 평생을 함께 갈 사람이 될까?
나는 궁금증을 가지고 젊은 양 비서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