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24화 (124/231)

제124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에 앉아 있는 젊은 양 비서가 보였다.

조금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양 비서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밴 습관 같았다.

“성국아, 뭐 마실래?”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럼… 편하게 불러.”

“저는… 우유요.”

“주문해서 올게.”

나는 듬직한 젊은 양 비서, 철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철수는 곧 우유와 카페라떼를 테이블에 놨다.

[양 비서, 취향 그대로네….]

나는 흐뭇한 얼굴로 우유를 호로록 마셨다.

철수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곤 나를 쳐다봤다.

“아버지가 한번 성국 군 만나서 제 진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주셨어.”

철수는 말도 참 신중하게 했다.

이런 거 보면 정말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다. 아버지 양 비서도 과하다 할 정도로 신중한 타입이었다.

“양 비서님께 잠깐 들었어요. 진로나 학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신다고요.”

“응. 사실 지금 대학은 내가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처음엔 그냥 학교 다니는 것도 일이다, 하고 다녔거든. 그래도 잘 적응을 못 하겠어.”

“전공은 뭐로 정하실 거예요?”

“비즈니스.”

전태국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할 거니 철수도 따라갈 모양이었다.

나는 저번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철수는 그때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니긴 했지만 나와 같은 비즈니스 전공은 아니었다.

내가 어차피 회사 일 평생 할 거, 공부라도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었다.

그때, 철수가 선택한 건.

“혹시 다른 거 전공하고 싶지 않으세요?”

“어… 있긴 해.”

“뭔데요?”

“심리학.”

역시….

내 기억력은 정확했다.

철수는 그때 심리학 전공으로 나와 학교를 같이 다녔다.

“그거 어려운 공부잖아요. 한국에서는 취업도 잘 안 되는 과라고 말들 하고요.”

“솔직히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비즈니스랑 심리학 두 개 복수로 전공하고 싶어. 그런데 아무래도 태국 도련님이랑 있으면 비즈니스 학위 하나만 따기도 바쁠 거야.”

“학교도 옮기고 싶으세요?”

“만약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된다면, 태국 도련님을 보필하지 않겠다는 의미니까 학교도 바꾸고 싶지. 한국으로 다시 대학을 와도 좋을 것 같고….”

나는 우유를 호로록 마셨다.

“근데 심리학은 정말 공부해서 밥 먹고 살기 어렵지 않아요?”

“그렇겠지. 아버지도 아마 이 말 들으면 말리실 거야.”

철수는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양 비서! 정확하게 플랜을 세워야지!]

옛날 같으면 미친 듯이 다그쳤겠지만, 나도 성격 많이 죽었다.

“저 같으면 그냥 무작정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진지하게 미래에 대해서 계획을 짜서 양 비서님께 말씀드릴 것 같아요. 미국은 대부분 복수 전공도 하고, 비즈니스와 심리학, 왠지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많이 필요로 할 분야 같거든요.”

“그럴까?”

“당연하죠. 사람을 이해하는 게 경영의 첫걸음이잖아요.”

철수의 눈이 대번에 커졌다.

“어… 그 말은 전재형 회장님도 자주 하시는 말인데….”

[내가 전생에 그분 아들이었잖아, 양 비서.]

나는 빙긋 웃었다.

“저도 창업하려고 보니까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서요. 특히 전 미국에서 동업할 거거든요. 동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 신뢰를 쌓아가는 거잖아요. 그게 다 사람 마음의 문제잖아요.”

“성국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내가 막연히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게 뚜렷해지는 기분이야.”

자, 이제 팁을 줄 시간이다.

“참, 참고로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학교 네임 밸류에 엄청 약하거든요. 저도 하버드를 굳이 선택한 이유가 저희 부모님이 다 아는 학교여서였거든요.”

“그렇지. 대한민국에 하버드 모르는 사람은 없지.”

“양 비서님도 아마 지금 이름도 없는 그 대학이 아니라 형이 좀 더 좋은 대학으로 편입을 하거나 하면 더 좋게 봐주실 거예요.”

“그럼… 진짜 도련님이랑은 이별인데….”

“형은 삼전 그룹의 부품으로 평생 살고 싶으세요?”

나는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건 철수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이기도 했다.

저번 생의 철수야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보좌한 착실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 나에게 필요한 인물은 착실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몸을 맡길 수도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철수가 제법 당황스러운 눈치로 나를 쳐다봤다.

아마 대한민국 사람들 누구나 삼전 그룹의 부품으로 사는 삶을 최고라고 여길 것이다.

대학생들은 삼전의 어느 계열사든 취업하고 싶어 하고, 그곳에서 멘탈 터지게 일하며 주는 황홀한 월급에 젖어서 평생을 그럭저럭 살 것이다.

그러다 나이 들면 오래된 부품을 교체하듯 교체되는 게 어쩔 수 없는 순리라 여겼다.

나는 지금 철수에게 그런 삶을 계속 살 것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건….”

철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눈빛 좋은데, 양 비서!]

“아버님이 오랫동안 부품으로 사셨잖아. 나는 사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작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그럼, 지금이라도 도전하세요. 형! 형, 스무 살은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니에요. 10년 후에 뒤돌아보면 지금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할지도 몰라요.”

“성국아, 너랑 대화하니까 꼭 나이 마흔 먹은 부장님이랑 대화하는 거 같아.”

철수가 빙긋이 웃었다.

[마흔은 맞지만, 부장은 아니지. 나 삼전 그룹 전직 회장될 뻔했다고.]

나는 모른 척 우유를 호로록 마셨다.

“성국아, 네 말대로 내 인생 플랜을 정확히 세워서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학교도 옮기는 게 맞는 것 같아. 삼전의 그늘 없이 홀로 서려면 뭐든 뛰어난 스펙이 필요할 테니까. 오늘 이야기 고마워. 참, 미국에는 언제 들어가니?”

“다음 주요.”

“난 2주 후에 들어가는데, 미국에서 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저 3월에 창업해요. 학교 근처 스튜디오 얻어서요. 그때 놀러 오세요.”

“그래, 맛있는 거 사서 꼭 놀러 갈게!”

철수는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비서, 이번 생에서도 잘 부탁해.]

* * *

나는 집에 들어가다가 여전히 아파트 상가에 있는 아빠의 보쌈 가게에 들렀다.

방학 때 종종 들러서 일하시는 분들도 이미 얼굴을 익힌 상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서빙을 하는 20대 초반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반겼다.

바로 아빠와 엄마가 자란 서촌 보육원에서 만났던 전수현이었다.

지금은 보쌈집에서 홀 서빙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일을 배우고 있었다.

“성국아, 왔어?”

“안녕하세요. 아빠, 안에 계세요?”

“응. 잠시만. 사장님!”

전수현이 아빠를 불렀다.

옆집에 있던 치킨집과 합쳐서 이제는 홀에 테이블도 꽤 많아졌고, 서빙 하는 아르바이트생과 주방 일을 배우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다.

아빠는 주방에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이제 저녁 시간이라 바빠질 타이밍이었다.

“성국아, 웬일이야?”

“아빠 일 도와주려고. 저녁 시간 바쁘잖아.”

“밥은 먹었어?”

“아직.”

“이쪽 안으로 와. 간단하게라도 먹고 아빠 도와줘.”

“응!”

나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녁 장사를 위해서 연신 삶아지고 있는 보쌈과 잘 무쳐진 김치가 보였다.

아빠가 주먹밥을 내밀었다.

“지금은 이걸로 간단하게 먹고, 아빠랑 이따가 제대로 먹자.”

“응.”

아빠 가게에서 주방 일을 배우시는 아저씨가 기특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도 인물이 훤하지만, 아드님은 진짜 배우 해도 되겠어요.”

“우리 아들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나왔잖아.”

[아빠, 또 또 시작이다.]

아빠는 전형적인 팔불출이었다.

내 자랑을 지겹도록 하고 다녔다.

“아이고, 사장님. 귀에 못이 박히겠어요. 아니지, 이미 박혔지.”

“죄송해요. 자주 못 보니까 이렇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나 봐요.”

“잘생기고, 똑똑하고. 효진 그룹에서 하는 경연에도 아드님이 나가라고 했다는 거, 한 번만 더 들으면 정말 천 번은 듣는 거 같아요. 이제 돈 내고 자랑하세요.”

“헤헤. 제가 그렇게 말을 많이 했나요.”

아빠는 쑥스럽게 웃었다.

이때, 가게 문의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들이닥칠 모양이다.

동시에 홀에서 주문 소리가 들렸다.

“보쌈 중짜 하나요. 소주 한 병이랑요.”

“성국아, 나가서 수현이 형 도와줘.”

“응!”

나는 얼른 팔을 걷어붙이고 홀에 나갔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자 홀은 앉을 자리 없이 꽉 찼다. 포장 주문도 밀려들어 왔다.

“여기 보쌈 소짜 하나 포장해 주세요.”

“네!”

나는 재빨리 쟁반을 들고 가서 테이블을 치웠다.

그사이 또 다른 손님들이 자리를 잡았다.

“저희는 보쌈 대짜 하나랑 소주 한 병 주세요.”

“네!”

“저기요.”

테이블에 앉던 여자 손님이 얼른 불러 세웠다.

일반 회사원 같지 않게 굉장히 독특한 스타일의 메이크업과 옷을 입고 있어서 눈에 확 띄는 스타일이었다.

“손님, 뭐 필요하세요?”

“학생,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거예요?”

“네. 왜 그러세요?”

“잠시만요….”

여자는 핸드백을 뒤적이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저요, SH 기획 다니거든요. 혹시 연예인 해볼 생각 없어요?”

[길거리 캐스팅도 아니고… 이걸 뭐라고 하지? 보쌈집 캐스팅인가….]

여자는 빤히 나를 쳐다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전 학생이라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무슨 말이에요. 이 인물로 그냥 살 생각이에요? 학생, 여기서 알바하는 거 보니까 집이 좀 어려운 모양인데, 우리 SH 기획사에서 데뷔하면 집안 일으켜 세우는 거 금방이에요.”

이때, 같이 서빙 하던 수현이 형이 웃으며 다가왔다.

“손님, 이 친구, 사장님 아들이라 일 도와주는 거예요.”

“진짜요?”

“저기 가게 벽에 붙은 사진 보이세요?”

가게 벽에는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시절 ‘저스트’와 함께 찍은 아주 오래된 내 사진과 그 옆으로 하버드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아빠는 정말 말릴 수가 없었다.

“저게….”

“이 친구가 바로 저 <다섯 남자와 아기 바구니> 주인공이에요.”

“나도 그 프로 완전 팬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애기 때 얼굴이 남아 있네!”

여자의 환호에 주변 단골들이 한마디씩 더했다.

“그 아기가 지금 하버드생이유!”

“여기 사장님이 장남, 첫째라고 얼마나 자랑하시는데…. 효진 그룹 장학생이에요.”

“이 집 둘째도 한 인물 하고. 이 집 인물들이 다 좋아.”

놀란 여자는 그래도 내 앞치마에 명함을 밀어 넣었다.

“우선 받아둬요.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SH에서 뭐 하시는 분이세요?”

“난 비주얼 디렉터라고 해요. 전체적으로 그룹 내 이미지를 만들고 결정하는 역할을 해요.”

SH라면 어쨌든 JP와 더불어 현재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였다.

나는 명함을 얼핏 봤다.

정하늘?

아이돌은 잘 모르지만, 우선 잘 챙겨뒀다.

아이돌들의 콘셉트는 그 그룹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다음에 기회 되면 연락드릴게요.”

“꼭 연락 줘요! 아니, 일이 아니어도 한번 그냥 놀러 와요. 내가 회사 구경시켜 줄게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쟁반을 들고 자리를 치웠다.

* * *

밤 9시가 넘도록 자리에 한 번 앉지도 못했고, 아빠도 주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포장 주문도 거의 끝나가자 그제야 아빠는 주방에서 나와서 홀을 챙겼다.

“성국이 덕분에 일찍 들어가겠어. 성국아, 아빠 보쌈 좀 싸가서 먹을까?”

“응. 좋아, 아빠.”

“민국이 녀석은 아빠 보쌈 질린다고 싸오지 좀 말래. 자긴 치킨이 더 좋다나 뭐라나.”

“민국이는 한국에서 자주 먹어서 그렇지.”

“아빠가 얼른 싸서 나올게. 조금만 기다려.”

홀을 정리하던 수현이 형이 음료수를 내밀었다.

“성국아, 이거 마셔. 사장님이 끝날 때 한 병씩 마시라고 사다 두시거든.”

“감사해요. 형, 고생이 많아요.”

“뭐가 고생이 많아. 여기서 일 배우는 게 내 소원이었잖아. 사장님이 쉬는 날에도 주방 일도 많이 알려주셔. 사장님한테는 성국이 네가 자랑이잖아. 근데 우리 보육원 친구들한테는 사장님이 자랑이야. 다들 사장님처럼 자수성가하고 싶어 하거든.”

나는 주방에서 뒷정리하는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형, 저한테도 아빠는 자랑이에요. 저도 아빠처럼 자수성가하는 게 꿈이거든요.”

[단, 전 자수성가 재벌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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