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아빠가 전수현에게 보쌈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건 수현이 가져가고.”
“사장님, 매번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젊을 때 한창 배고프잖아. 질리면 말해. 그때 그만 싸줄게.”
“전 많이 먹으면서 배워야죠.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다들 내일 쉬는 날이니까 푹 쉬고, 화요일에 봐요.”
“사장님, 안녕히 계세요.”
모두가 떠나고 아빠는 가게 문을 닫았다.
나는 얼른 아빠 손에 들린 보쌈을 들었다.
“아빠, 어서 가서 보쌈 먹자.”
“그래… 엄마 기다리겠다.”
아빠와 나는 단둘이 밤길을 걸어갔다.
“우리 성국이랑 오랜만에 이렇게 밤길을 걸어가네.”
[아빠, 또… 무슨 소리 하려고?]
이미 아빠는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성국아, 너 애기 때 공사하던 옆집이 와르르 무너져서 엄마랑 너랑 그때 진짜 큰일 날 뻔한 일이 있었어.”
[나 다 기억한다고, 아빠.]
“그때, 엄마가 너 살리려고 어찌나 폭 안았던지 너는 다친 데가 하나도 없는데, 엄마가 좀 다쳤었어. 아빠 진짜 가게에서 그 소식 듣는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어. 아빠한테는 엄마랑 아빠가 없잖아. 너희 엄마랑 네가 인생의 전부인데, 혹시? 라는 생각에 정말 무슨 생각으로 병원까지 갔는지 기억도 안 나.”
나도 그날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재벌 총수가 막 되려는 시점에 심장마비로 죽고 태어나 보니 이건 뭐, 흙수저도 보통 흙수저가 아닌 집안.
콩나물 100원어치도 깎아서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보니 지금의 엄마, 아빠를 인정할 수가 없던 때였다.
그때 엄마가 몸을 날려서 나를 살려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에게 이 두 철없는 부모는 진짜 엄마, 아빠가 됐다.
“다행히 엄마도 이상이 없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하루 입원하라고 하시는 거야. 엄마한테는 돈 걱정 말라고 입원시켜 놓고 나오는데, 솔직히 그때 아빠 돈이 하나도 없었다. 너 안고 집에 걸어가는데, 그래도 다리가 하나도 안 아픈 거야. 네가 내 품에서 바동거리고 자니까, 어찌나 귀여운지….”
[그때 나도 돈 없는 건 눈치 깠다고.]
물론 아빠한테 사실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성국아, 잘 커줘서 고마워.”
“아빠….”
나는 나긋하게 아빠를 불렀다.
“응?”
“아빠, 이제 내 자랑 좀 그만해. 사람들이 뭐라 해!”
“알았어. 이 녀석, 아주 어릴 적부터 아빠 감동 먹을 때마다 분위기 와장창 깨더니 여전하네.”
[아빠, 아빠 내 자랑 좀 그만하고 본인 자랑 좀 해. 아빠도 충분히 잘 살아왔어.]
나는 아빠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어릴 적 말이 안 통할 때, 나만의 신호였다. 두 번은 긍정, 세 번은 부정의 의미였다.
[아빠, 이거 기억하나?]
아빠가 멈칫 나를 보더니 빙긋 웃더니 앞으로 걸어갔다.
“성국아, 엄마 기다리겠다. 어서 가자.”
“응!”
* * *
이제 내일이면 또 나는 하버드로 떠나야 했다.
“자, 전민국. 그리고 전지희. 오빠가 다음 방학 때 올 때까지의 계획표야. 이대로 최대한 지켜.”
전민국은 계획표를 보더니 동공이 흔들렸다.
“형, 반에서 5등 안에 들라니? 나, 반에서 딱 중간 해. 15등. 15등에서 어떻게 10명을 제쳐. 그건 불가능해.”
“민국아, 형이랑 계약한 거 기억나지? 형은 아이돌 데뷔, 얄짤없이 성적순으로 자를 거야.”
“아이, 형….”
“자신 있다며?”
“그게… 마음은 자신이 있어도… 마음대로 되는 게 인생이 아니잖아.”
민국이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학원도 다녀야 하고… 형아 말대로라면 영어도 마스터해야 하고… 아이돌 되는 거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아이돌 되면 더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이것도 제대로 못 하면서 아이돌 되겠다고?”
“형, 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
민국이가 주먹을 앙 쥐고 나를 바라봤다.
[짜식, 벌써 협상하는 건가.]
“뭔데, 조건이?”
“나 방학 때 JP와 SH 연합 콘서트 데리고 가줘. 엄마가 형이 데리고 간다고 하면 허락해줄 거야.”
“알았어. 대신, 반에서 5등 안에 들어야 해!”
“응!”
나는 지희를 쳐다봤다.
“자, 지희야.”
민국이를 대할 때와는 목소리부터 달랐다.
“형, 너무한 거 아니야? 지희한테는 왜 이렇게 부드러워?”
“지희는 일곱 살이잖아.”
“세상 불공평해!”
[아이돌 되면 세상 불공평한 게 뭔지 더 잘 알게 될 거야, 전민국.]
민국이는 괜히 지희에게 화풀이를 했다.
“치이, 전지희! 너 성국이 형 가면 내가 막 굴릴 거야.”
지희는 내게 딱 달라붙으며 메롱을 했다.
“성구기 오빠! 오빠, 지희는 공부 열심히 하고 있을게요.”
“그래, 오빠가 미국에서 바비 인형 사다 줄게.”
“와! 신난다!”
“아, 뭐야! 이거 또 차별이야. 형, 나도 로봇 사다 줘.”
“반에서 5등 안에 들면.”
“아, 맨날 차별해! 전지희, 너 형 가면 진짜 두고 봐!”
지희는 내게 폭 안겼다.
“오빠, 지희 무셔워.”
이러니 내가 여동생을 안 좋아할 수 있나.
민국이가 툴툴거리며 지희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며 사라지자, 엄마가 부엌에서 나를 불렀다.
“성국아, 너도 짐 싸야지. 참, 김치랑 고추장이랑 김이랑 포장해뒀어. 이리 와서 챙겨.”
“응, 엄마.”
[드디어 또 미국에 가는 건가….]
마음 한편이 쓸쓸했다.
저번 생에서 가족들과 헤어질 때는 이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서 헤어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참, 엄마. 오늘 아빠랑 할 이야기 있는데….”
“뭔데?”
“이따 아빠 들어오시면 같이 이야기할게.”
“알았어.”
엄마는 회사도 쉬면서까지 내 짐 싸기에 여념이 없었다.
“성국아, 너 또 옷 후드만 샀지?”
“엄마, 난 이게 편해.”
“진짜… 미국에서는 니 나이 때 다들 연애한다는데, 이렇게 입고 다녀서 여자애들이 좋다고 하겠어?”
“엄마, 나 인기 많아.”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아이들이지만, 너무 잘난 척이 심해.”
“맞아! 형 완전 잘난 척쟁이!”
칼을 들고 온 집 안을 휘젓고 다니던 민국이가 사이사이 끼어들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집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 * *
피터에게서 장문의 메일이 도착했다.
피터는 3월 달부터 들어가게 되는 하버드 근처의 스튜디오 사진을 보내주었고, 더불어 미국에 오는 대로 ‘페이스 페이퍼’의 개발과 홍보 계획에 대해 의논하자는 내용이었다.
[흠… 마크 혼자로는 힘드니까, 개발자들이 더 필요할 거 같고… 3월에 창업하면 찰리 잡스가 제안한 ‘페이스 노트’로 이름도 바꿔야겠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는 사이에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밤 10시 30분.
가게 일을 마치고 아빠가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자기야, 이거 왜 이렇게 뜨거워?”
“성국이 내일 미국 가는데, 다 식은 고기 먹일 수 있어? 새로 했지.”
“맛있겠네.”
“민국이랑 지희는?”
“잠들었지. 민국이랑 지희랑 나이 차이도 많은데, 왜 이렇게 싸우는지 몰라.”
“민국이가 철이 안 들어, 참.”
아빠와 엄마의 일상적인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다.
“아빠.”
“성국아, 엄마가 그러던데 우리한테 할 말 있다며?”
“응.”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가 너 마지막으로 먹으라고 보쌈 제일 좋은 고기로 해서 싸왔어. 아빠, 금방 씻고 나올게.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응.”
“소영아, 맥주 준비해줘.”
“어, 알았어.”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식탁 앞에 앉았다.
엄마가 흘금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성국아, 왜 이렇게 심각해?”
“그냥….”
사실 난 오늘 엄마, 아빠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 하나를 빼앗을지도 몰랐다.
곧 샤워를 마친 아빠가 비누 냄새를 풍기며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곧 시원한 맥주를 땄다.
아빠는 시원한 맥주 한 컵을 쭉 마시더니, 나를 봤다.
“성국이랑 또 이별해야 하니까, 아빠는 참 마음이 그러네. 그래, 할 이야기가 뭐야?”
“엄마, 아빠… 제가 친구 마크랑 ‘페이스 페이퍼’라고 SNS 개발하잖아요.”
“응, 알지. 그거 투자받는다면서?”
“네. 그것 때문에요.”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왜, 성국아?”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하버드 그만둘 수도 있어요. 그 사업 꼭 성공시키고 싶거든요.”
순간, 아빠는 막 들던 보쌈 한 조각을 내려놨다.
엄마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부모들에게 하버드 다니는 천재 아들이 하버드를 그만둔다는 것만큼 하늘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아빠는 한참을 생각하다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학업은 계속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렵게 들어간 학교인데 그만두는 거 아깝잖아.”
아빠는 우선 회유를 했다.
“아빠, 저도 2학기는 마크랑 함께 다녀보기로 했어요. 그런데 솔직히 둘 다 병행할 자신은 없어요. 우선 투자도 받았고, 이제부터 정말 본격적으로 확장해서 회사 키우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서요.”
“흠….”
아빠는 말이 없었다.
다만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실 뿐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했다.
“아빠, 엄마. 저는 만약에 회사 키우다가 실패해도 스무 살도 안 되잖아요. 그때 다시 시작해도 겨우 남들과 똑같이 시작하는 거고요. 제 결정을 믿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 한번 해보자.”
아빠가 어쩐 일로 흔쾌히 허락을 했다.
“네가 말했듯이 만약에 사업에 실패한다고 해도 너는 아마 남들보다 어릴 거야. 다시 충분히 출발할 수 있는 나이이지. 근데 성국아, 너는 그동안 남들보다 몇 배는 빨리 인생을 산 거잖아. 쉬지도 않고…. 제일 중요한 건 네가 지치지 않는 거야. 알았지?”
“응, 아빠.”
“성국아, 그리고… 힘들 땐 아빠랑 엄마. 그리고 동생들이 있다는 거 잊지 마. 가족들은 항상 널 믿으니까, 힘들 때 언제든 기대. 알았지?”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오늘 내 비장함과 달리 너무 쉬운데? 엄마는 왜 한 마디도 안 하지? 뭔가 수상하게….]
* * *
성국이 아빠, 지성은 계속해서 뒤척거렸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소영아, 니가 성국이가 무슨 말을 해도 허락하라고 해서 그러긴 했는데, 잘한 거지?”
“아직도 그 걱정이야?”
“당연하지. 아무리 똑똑한 녀석이라고 해도 사업까지 한다니, 걱정 안 되는 부모가 어디 있어.”
“내가 다 이야기했잖아. 성국이 요즘 며칠 행동 보니까 수상해서 그레이스한테 바로 물어봤지.”
성국이 엄마와 그레이스는 여전히 연락 중이었다.
“그레이스가 성국이네 투자사 대표랑 사귀어서 자세히 이야기해 줬어. 우선 투자 조건도 좋고, 성국이랑 마크랑 우선은 2학기는 다니기로 했으니 지켜보래. 혹 사업하다가 지쳐 떨어져도 그 아이템만 사겠다는 회사도 많고, 팔아도 수억 달러를 받을 수가 있대. 수억 달러면 자기야, 몇천 억이래.”
성국이 아빠는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소영아, 너 그래서 저녁 내내 조용했구나?”
“당연하지. 자기야, 성국이가 아무리 천재고 나이보다 똑똑하다고 해도, 난 성국이 엄마잖아. 성국이는 내 손바닥 안이야.”
“진짜… 너나 성국이나 못 말려.”
걱정만 가득하던 지성도 겨우 미소를 지었다.
* * *
공항이 또다시 들썩거렸다.
“형아!”
“오빠!”
민국이는 오른손을, 지희는 왼손을 잡아당기며 나를 막아섰다.
“형아, 가지 마. 민국이랑 같이 살자아!”
“오빠, 지희도! 지희는 오빠랑 갈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들 차 안에서는 아무 말 없다가 수상한데?]
나는 무릎을 꿇고 민국이와 지희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
“민국아, 지희야. 내가 미국 가서 장난감이랑 인형 많이 사서 올 테니까 방학 때 봐. 알았지?”
순간, 민국이와 지희는 서로 눈을 보며 찡긋하곤 내 손을 미련 없이 놔버렸다.
“어쩔 수 없지. 형아, 잘 다녀와.”
민국이 녀석은 연기 경력을 살려서 울적한 목소리까지 냈다.
“오빠, 지희가 오빠 사랑하는 거 잊지 마. 히잉.”
[뭐야, 이 녀석들 다 쇼였어!]
엄마와 아빠가 시계를 보더니 나를 일으켜 등을 떠밀었다.
“성국아, 비행기 시간 늦겠어. 어서 들어가.”
나는 어쩔 수 없이 허겁지겁 게이트로 들어갔다.
“어, 엄마… 아빠… 미국 도착하면 전화할게!”
뒤돌아보니 엄마, 아빠 뒤에서 민국이와 지희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팔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