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피터와 그레이스가 떠나고, 마크와 난 단둘이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얼른 디지털카메라를 찾았다.
아빠가 자주 소식 전하라고 준 디지털카메라를 아직도 애용 중이었다.
“마크, 우리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해서 ‘페이스 노트’에 올리자.”
“나도 나와?”
“넌 빠져.”
“덩그러니 사무실만 찍게?”
“응.”
나는 막 이사 온 집 같은 사무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성국, 뭐 찾아?”
“‘페이스 노트’라고 현판이라도 달아야 하나….”
그때 눈앞에 검은 매직이 여러 개 보였다.
매직 하나를 집어서 마크에게 던졌다.
마크는 본능적으로 검은 매직을 한 손으로 탁, 잡곤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말을 하고 던져야지! 근데 매직은 뭐 하라고?”
나는 검은 매직을 꺼내서 깨끗한 도화지 같은 흰 벽을 바라봤다.
“이 벽에다가 ‘페이스 노트’라고 적자.”
“우리가?”
“응!”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 나 악필이야. 노트 필기도 글씨가 개판인데, 이 벽에다가 어떻게 쓰라고! 거기다가 여기 우리 렌트한 거잖아. 나갈 때 다 원상 복구 해야 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지.”
순간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매직을 놓고 얼른 텅 빈 사무실 벽을 카메라로 찍었다.
“성국아, 대체 너 뭐 하려고 그래?”
“마크, 우리 파티 하자.”
“파티?”
“응! 내가 오늘 돈 좀 쓸게!”
“성국, 도대체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
“텅 빈 사무실이랑 이 빈 벽 사진 올리고, 이 벽에 그라피티로 ‘페이스 노트’ 완성해줄 사람 자원받고, 사무실 오픈했으니 파티도 열게. 피자와 맥주는 무제한. 물론 난 우유지만….”
“좋은 생각인데?”
[당연하지, 나 전성국이야.]
나는 얼른 컴퓨터 앞에 가서 이 사실을 공지했다.
- 2004년 2월 14일.
여기까지 적고 보니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였다.
“마크,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인 거 알았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치, 너랑 나랑은 상관없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
“성국, 모두가 연애하는 것 같아도 우리처럼 혼자 보내는 사람도 많을 거야. ‘페이스 노트’만큼 혼자 노는 사람들을 위한 것도 없잖아.”
[마크, 이제 제법인데?]
나는 사진과 공지를 마저 올렸다.
- 2004년 2월 14일. ‘페이스 노트’ 사무실이 오픈 기념 파티가 열립니다. 그리고 이 흰 벽을 그라피티로 멋지게 장식해줄 분들 구합니다!
오늘 피자와 맥주는 무제한입니다. 물론 전 쓸쓸히 우유를 마시겠지만요.
곧이어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 성국, 오늘 밸런타인데이에 오픈한 거야? 너무 싱글 티 내는 거 아니야?
- 마크는 혼자 있어도, 너는 혼자면 안 되지.
곧 데니스의 댓글이 달렸다.
- 미셸이랑 데이트 중인데, 레스토랑 바가지에 마침 울고 있었어. 피자 공짜 맞지?
나는 얼른 데니스의 댓글에 답을 했다.
- 세상에 공짜 없어, 데니스.
- 미셸이 근처에 사는 그라피티 하는 친구 안대. 이 정도면 피자 얻어먹을 만하지?
- 맥주도 무제한이야!!!
* * *
15평 스튜디오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다들 피자를 한입에 물고, 맥주를 한 손에 들고 누군가 들고 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파티를 즐겼다.
나는 한 손에 우유를 들고 황홀한 얼굴로 벽면을 쳐다봤다.
FACE NOTE가 환상적인 그라피티로 벽 전체를 채웠다.
마크와 데니스, 미셸은 맥주를 마시며 벽을 응시했다.
“성국, 이게 원하던 거 맞지?”
“응. 완벽해!”
“성국아, 진짜 이번에 직원 구하는 거야?”
데니스가 물었다.
“어, 프로그래머 한 명 구하려고.”
“진짜 창업하는 거구나.”
“당연하지. 이력서는 마크 이메일로 보내라고 알려줘!”
“응!”
우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했다.
미셸이 웃으며 데니스를 잡아끌었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데, 다들 벽만 보고 있을 거야? 데니스랑 나랑은 춤출게.”
“성국, 너도 어서 파트너 좀 만들어.”
“나 미성년자라고!”
“마크, 너도 어서 파트너 좀 찾아.”
“이젠 포기했어.”
“둘 다 정말 고집불통이야.”
데니스는 웃으며 미셸에게 끌려갔다.
흥에 겨운 음악 소리. 맥주를 한 손에 들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커플들.
그 사이에서 벽을 바라보고 선 나와 마크.
나와 마크는 눈이 딱 마주쳤다.
“성국, 나 말이야. 성공하기 전까지는 연애 안 할래.”
[마크,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잖아.]
마크가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성국, 너 지금 눈으로 욕하고 있었지?”
[마크, 이제 제법 내 눈치도 읽는 거야?]
나는 우유를 천천히 들이켰다.
“마크, 나도 성공하기 전까지는 연애 안 할 거야.”
“성국, 너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잖아. 미성년자라서….”
마크는 나를 보며 해맑게 웃었다.
“마크, 그런 의미에서 우리 짠 할까?”
“좋지!”
우리는 우유와 맥주병을 부딪쳤다.
* * *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 안.
나는 벤처박람회의 브로셔를 꼼꼼히 보고 있었다.
백 개가 넘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기업을 홍보하고 있었다.
옆에서 브로셔를 보던 마크가 혀를 내둘렀다.
“성국아, 이렇게 많은 기업들이 창업하는데…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 갑자기 겁이 나네.”
[응, 걱정 마. 우리는 성공해.]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크, 우리는 빌 게이트와 여러 사모펀드에서 탐낸 아이템을 가지고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이야.”
“그렇긴 하지만….”
마크는 하얀 얼굴이 더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마크, 걱정 말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미래를 바꾸고 있는지 그거나 확인해.”
“어… 몇 개 재미있는 게 보이긴 해. 구굴이라고 검색 엔진인데… 근데 정말 검색 엔진이 잘되면 이거 완전 빅브라더의 세상이 오는 거 아니야? 우리가 검색하는 모든 것들이 정보화되고 그걸 가진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거잖아.”
빅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정보의 독점으로 권력을 가지는 거대한 세력을 일컫는 말이었다.
“마크, ‘페이스 노트’도 결국 빅브라더가 될 수밖에 없잖아.”
“무슨 소리야?”
마크가 놀라 나를 쳐다봤다.
“‘페이스 노트’는 개인적인 사생활에서부터 시작해서 인맥, 그들의 공통 관심사, 심지어 연애와 결혼 유무까지. 개인의 정보가 통으로 들어가 있잖아. 만약 우리가 나쁜 마음을 먹고 특정 정치인이나 단체에 돈을 팔고 정보를 넘기기라도 해봐. 그러면 얼마든지 여론도 조작 가능하잖아.”
“그러네…. 왜 내가 그런 건 생각 못 한 거지.”
실제로 ‘페이스 노트’는 이런 이슈로 미국 상하원 의원의 청문회까지 간다.
[마크, 청문회는 너에게 맡길게.]
나는 마크의 어깨를 도닥였다.
“마크, 일어나지 않은 일은 너무 고민 말자.”
“어… 성국. 근데 볼만한 회사 좀 찾아봤어?”
“전기 자동차 회사인 테슬론. 이게 제일 기대돼. 너는?”
“난 아까 말한 구굴이 한창 개발하는 건데, 너튜브라고 동영상 올리는 사이트. 뭔가 재미있지 않아?”
[마크, 역시 눈썰미가 대단한데….]
“나도 눈여겨보는 거야. 이따 같이 그 부스에도 가자.”
“오케이!”
나는 다시 벤처박람회의 브로셔를 훑었다.
앞으로 대세가 될 전기차 테슬론의 설명회가 도착하자마자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검색 엔진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구굴의 너튜브까지.
이제 서서히 세상이 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 * *
벤처박람회장 안은 사람들도 가득했다.
나는 검색대를 지나자마자 테슬론의 사업 설명회장으로 향했다.
“성국, 넌 테슬론 사업 설명회 갈 거지?”
“응. 너는?”
“나는 전기 자동차는 관심 없어서. 다른 거 보고 있을게.”
“알았어.”
나는 그대로 테슬론의 사업 설명회가 열리는 강당으로 향했다.
[이런, 늦었네….]
이미 사업 설명회는 시작한 후였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론 머스트가 강단에 서서 테슬론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일론 오랜만이야. 안 본 사이 머리숱이 많이 줄었네. 괜찮아. 나중에 돈 벌어서 심으면 되지, 뭐.]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아서 일론의 설명을 들었다.
“몇 년 전에 제가 간편 결제 시스템인 T.com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 한 꼬마를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꼬마가 나라고, 일론.]
일론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그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제가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지구가 파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그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전기로 자동차가 달리면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거 아니냐고요. 사실 어린아이의 이야기잖아요.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솔직히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일론 머스트의 이야기를 다 믿는 거 같지는 않았다. 마치 그때의 일론처럼.
일론은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전기 자동차가 없던 시절도 아니고 이미 사업화의 의미가 없다고 치부된 사업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이 생수를 가리키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 생수도 이미 오래전에 누군가가 사업화를 했지만, 사람들이 ‘물을 왜 사 먹어?’ 할 때가 있었다고요. 그땐 물론 모든 생수 회사들이 사업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겠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모두 물을 사 먹고 있잖아요. 이게 바로 타이밍입니다.”
[일론, 내 얘기 너무 써먹네.]
“저는 그때 깨달았죠. 사업화 가능성이 없다고 도태된 전기 자동차가 사실은 타이밍이 안 왔을 뿐이라고요. 그리고 전기 자동차의 사업화는 동시에 운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고요.”
“그게 뭔가요?”
관객석에서 누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 매번 운전하기 귀찮지 않으세요? 어쩔 땐 차가 스스로 가줬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지 않으세요?”
관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격하게 호응하는 이도, 공상 만화 쓰냐며 나가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일론 머스트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테슬론은 단지 전기로 가는 자동차가 아닙니다. 당연히 환경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친환경 자동차이긴 하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율주행입니다.”
[여기서 자율주행이 나오는군! 역시 일론이야….]
나는 흐뭇한 얼굴로 일론 머스트를 쳐다봤다.
남아 있는 관객들은 모두 일론의 생각에 흥미를 보였다.
“테슬론에 타시면 아마 앞으로는 햄버거를 먹으면서 목적지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제가 제시하는 테슬론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일론은 연설을 마치고 생수를 마셨다. 그리고 관객석을 훑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벤스나 BMG도 못 한 것을 난생처음 들어보는 회사가 한다고?”
“벤스나 BMG도 개발 중이긴 하지. 그런 큰 회사의 자본력을 저 사람의 아이디어로 이길 수 있을까? 그게 문제이지.”
“저 친구 T.com으로 번 돈, 이걸로 다 날리겠는데….”
관객들은 웅성거릴 뿐 질문을 하는 이는 없었다.
일론이 초조한 듯 관객들을 쳐다봤다.
“질문 없으세요?”
“제가 질문 있습니다.”
내가 손을 들자 일론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일론, 오랜만이야.]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일론도 입가를 슬쩍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거기… 젊은 친구, 질문해 주세요.”
“지금 설명하신 그 자율주행, 앞으로 언제쯤 자동차에 탑재될 수 있을까요?”
“앞으로 딱 5년. 5년 안에 가능합니다.”
일론 머스트는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