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리미미는 얼른 마크가 손에 든 피자 박스를 들었다.
“제가 들고 갈게요.”
“미미 씨, 저도 성국이랑 같은 사장이라 깍듯하게 대하시는 거예요?”
마크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헤벌쭉거리고 있었다.
[마크, 제발… 진정해….]
리미미는 살짝 썩은 얼굴로 마크를 보더니, 이내 다시 해맑게 미소 지었다.
[리미미, 나 다 봤어! 방금 그 썩소!]
마크는 얼른 피자 박스를 몸쪽으로 당겼다.
“이런 건 남자가 하는 거죠!”
[하아…. 제발 마크~]
그래도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마크의 짝사랑은 쉽게 빠지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광속으로 끝나니깐.
* * *
리미미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두더니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간이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내렸다.
마크와 나는 얼떨떨하게 이 상황을 계속 지켜봤다.
리미미는 냉장고 문을 열더니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은 우유 맞죠?”
“네….”
나는 얼떨결에 대답하고 있었다.
마크가 조용히 속삭였다.
“성국, 저런 일까지는 할 필요 없다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야지….”
리미미가 뒤돌아보자, 그 순간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후다닥 노트북을 테이블에 놓고 정신없이 컴퓨터를 켰다.
리미미는 내 책상에 우유를 올려놨다.
“드세요, 사장님.”
“리미미 씨, 이야기 좀 할까요?”
“말씀하세요, 사장님.”
“리미미 씨는 아직 저희 회사 인턴이지만, 저희가 리미미 씨한테 이런 일까지 시키려고 뽑은 건 아니거든요. 이런 건 저희가 직접 할게요.”
“사장님은 이런 거 싫어하세요?”
“이런 거라뇨?”
도무지 리미미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어제는 세상 누구보다 잔뜩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더니 오늘은 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제가 독재자 밑에서 20년을 넘게 살았잖아요. 북한에서는 출신 성분에 따라서 철저하게 상하관계대로 움직이는데, 그게 몸에 뱄거든요. 근데 미국 와서도 이러니까 사장님들이 무척 좋아하시던데요. 전 그래서 역시 자본주의 나라 미국 국민들도 어쩌면 모두 독재자가 되기를 꿈꾸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죠.”
[뭐,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저희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일할 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마크나 저나 학생이라 아직은 이런 거 어색하네요.”
“사장님이 원하신다면 또 그렇게 해야 하죠. 제가 또 독재자 밑에서 20년 넘게 살아서 사장님 말은 잘 듣거든요.”
[독재자 밑에서 20년이라….]
왜 리미미에게서 아빠에게서 보던 사연팔이의 느낌이 강하게 나는 걸까.
부스럭. 부스럭.
마크는 피자 박스를 열더니 리미미에게 내밀었다.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사 왔어요. 고르세요.”
“사장님들 먼저 고르세요.”
“미미 씨, 그냥 저는 마크라고 부르세요. 편하게.”
[마크, 지금 소개팅 하니? 하아… 일이나 해야지.]
나는 최대한 신경을 안 쓰기 위해서 일에 집중했다.
‘페이스 노트’의 지금 가장 큰 문제점은 뭘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리미미를 쳐다봤다.
‘페이스 노트’ 계정을 해킹했을 정도니 그 누구보다 ‘페이스 노트’의 문제점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
“리미미 씨, 마크. 우리 회의할까?”
“성국, 갑자기 무슨 회의?”
마크는 페페로니 피자 한 쪽을 우걱우걱 먹으면서 물었다.
“새로운 직원도 들어왔으니까, 우리 ‘페이스 노트’의 문제점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좋습니다, 사장님.”
“근데… 리미미 씨, 사장님이라는 말은 불편한데요. 제가 리미미 씨보다 한참 어리잖아요.”
“저도 사장님 ‘페이스 노트’ 봐서 다 알죠. 그런데 마크처럼 또래한테 이름 부르는 건 동료 같은 느낌이 들지만, 너무 어린 사장님한테 성국아, 성국아. 그러면 너무 하대하는 느낌이 나잖아요.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를게요.”
“성국, 은근 중독성 있고 좋은데. 사. 장. 님.”
[마크, 네가 지금 뭐가 안 좋겠니….]
나는 노트북을 들고 소파로 향했다.
“자, 회의나 합시다!”
* * *
리미미는 일할 때는 꽤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작은 손으로 빠르게 노트북 키보드를 쳤다.
“리미미 씨, ‘페이스 노트’는 처음에 어떻게 알게 됐어요? 아직은 이쪽 동부 대학생들만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잖아요.”
“아르바이트 많이 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카페에서 일할 때, 같이 일하던 여자애가 하버드생이었어요. 일하는 시간에 계속 노트북을 몰래 보기에 궁금해서 알아봤죠. 완전 ‘페이스 노트’를 중독 수준으로 항상 지켜봤거든요.”
“중독 수준으로요?”
“어디서 파티가 열린다든가. 혹은 누가 어디 갈 건데, 같이 갈 사람을 구한다거나. 그런 것들이 계속 올라오니까 눈을 못 떼는 거예요. 여기 미국 여자나 남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어떻게든 연애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다들 그냥 외로우니까 그러는 거죠.”
마크는 연애를 갈구하는 ‘페이스 노트’ 사용자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만큼 중독성이 있단 말이네요.”
“네, 사장님.”
리미미는 무릎에 올려놓은 노트북으로 ‘페이스 노트’를 보다가 문득 마크와 나를 번갈아 봤다.
“두 분 다 외모 꾸미기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는 것은 알겠는데요. ‘페이스 노트’는 왜 온통 파란색인가요?”
나는 마크를 쳐다봤다. 이건 마크의 개인적인 아픔이기도 했다.
마크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적녹색맹이거든요.”
“그게 뭐예요?”
“적색과 녹색이 제 색의 스펙트럼에 없다는 말이에요, 미미 씨.”
미미는 조금 놀란 듯 마크를 다시 쳐다봤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 중에 두 개 색이 없단 말이죠?”
“그렇죠. 저에게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평생….”
마크는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우리 ‘페이스 노트’의 기술적인 부분은 마크가 맡고 있잖아요. 파란색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색도 아니고… 저는 당연히 ‘페이스 노트’의 개발자인 마크에게 가장 편안한 환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근데… 파란색이 촌스럽나요?”
마크는 리미미의 의견이 신경 쓰이는 듯했다.
“파란색은 안 촌스러운데, 너무 심플하긴 해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스 노트’ 초기 이용자들의 가장 큰 불만이 이 심플함이었다. 하지만 이 심플함이 세계를 주도하게 만들기도 한다.
리미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엔 좀 촌스러운 거 아닌가 했는데, 오히려 직관적이고 심플하네요. 그리고 파란색은 무조건 붉은색보다는 나아요. 북한에서는 뭐만 하면 붉은색 글자를 건물마다 새겼거든요. 이게 한결 민주주의의 색 같네요.”
리미미의 말에 풀이 죽었던 마크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리미미 씨, 앞으로 우리가 한 달동안 할 일은 ‘페이스 노트’ 서버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용량도 키우는 거예요. 성국이는 주로 비즈니스를 맡으니까, 우리 둘이 같이 일하는 경우가 많을 거예요. 그런 의견 편하게 말해줘요.”
“네, 마크.”
[단둘이 붙어있겠다는 고도의 계획은 아니지, 마크?]
리미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더니 살짝 손을 들었다.
“사장님,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리고 손은 안 드셔도 돼요. 자연스럽게 말하세요.”
“그것도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사장님. 참, 할 말은 저도 새로 들어왔는데, 회식 안 하나요?”
나와 마크는 조금 놀란 얼굴로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 씨, 북한에서도 회식을 하나요?”
“남한 드라마나 예능 보니까 직장인들은 회식 다 하던데요. 회식은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미미 씨, 오늘 당장 회식 하죠!”
리미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크가 소리쳤다.
나는 얼른 마크의 티셔츠 자락을 당겼다.
“그 전에 우리는… 회의부터 끝내자, 마크.”
“사장님, 어서 일하죠. 일하지 않는 자, 돈도 못 받는 게 자본주의 논리잖아요.”
리미미의 성화에 모두 다시 회의에 집중했다.
나와 마크는 다양한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우선 위치 노출 기능을 내가 원하는 사람들에게만 오픈할 수 있게 해야 할 것 같아.”
“성국, 나도 그 생각. 지금 가지고 있는 기능들이 대부분 단순하면서 많이 오픈되어 있잖아. 이 기능을 세분화하는 게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지 않을까 싶어.”
마크는 확실히 일할 때는 똑 부러지는 면이 있었다.
띵동.
이때, 누군가 사무실 초인종을 울렸다.
나와 마크는 서로를 바라봤다.
“마크, 올 사람 있어?”
“아니…. 이 사무실에 날 찾아올 사람은 없잖아.”
리미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도어스코프로 밖을 확인했다.
“사장님, 밖에 웬 멀대같이 키가 큰 백인 쌍둥이가 있는데요.”
멀대같이 키가 큰 백인 쌍둥이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딱 둘이었다.
[윙클 형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어스코프를 확인했다.
윙클 형제가 한 손에는 와인, 그리고 한 손에는 화분을 들고 서 있었다.
“성국! 우리야. 윙클들!”
* * *
캐머런 윙클이 와인을 성국에게 안겼다.
“성국, 우유 대신 와인 사 와서 미안. 사무실 오픈하는데, 우유 사 오는 건 폼이 안 나잖아.”
타일러는 화려한 꽃다발을 리미미에게 안겼다.
“여자 직원은 언제 뽑은 거야?”
“오늘 첫 출근이에요.”
“마침. 우리가 잘 왔네. 저희는 성국이가 속한 라이언 클럽의 선배들이에요.”
“반갑습니다. 리미미입니다.”
“말투가 독특하시네요. 한국 사람인 것 같은데, 성국이랑 묘하게 억양도 다르고요.”
타일러의 질문에 리미미는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북한에서 왔거든요.”
“와우-”
타일러가 동물원의 동물 보듯 신기하게 리미미를 쳐다봤다. 그게 리미미의 심기를 건드렸다.
“왜 그렇게 보지?”
사교성 좋은 캐머런이 어서 나섰다.
“북한에서 온 사람은 처음이라서요. 성국, 직원도 새로 들어왔으니 환영의 의미로 와인 한잔할까?”
“당신들 회사도 아닌데, 왜 당신들이 날 환영하는데?”
리미미는 팔짱을 딱 낀 채 느끼한 타일러와 캐머런을 쳐다봤다.
190cm가 넘는 키의 캐머런과 타일러 앞에 선 리미미는 마치 거대한 코끼리 앞에 가시를 잔뜩 세우고 선 고슴도치 같았다.
[리미미, 제법인데….]
“오해하지 말아요. 우린 그만큼 성국이랑 마크의 친한 친구거든요.”
[말은 바로 하라고, 친구 아니고 벗겨 먹을 먹잇감으로 생각하잖아….]
나는 오랜만에 팔짱을 끼고 윙클 형제와 미미의 대결을 쳐다봤다.
리미미는 윙클 형제가 들고 온 와인을 따더니 커피잔에 무작정 따랐다.
황급히 캐머런이 나섰다.
“와인잔 없어요?”
“놀려고 만든 사무실도 아닌데, 와인잔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아, 그렇지. 미안해요.”
캐머런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마크는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성국, 리미미 씨 우리 대할 때랑 완전 달라.”
“적과 우리 편이 분명한 사람인 거지.”
리미미는 어제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고 윙클 형제를 대하고 있었다.
리미미는 따른 와인을 마크와 윙클 형제에게 건네곤 우유를 내게 내밀었다.
“드세요, 사장님.”
“감사해요.”
타일러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비웃듯 나와 리미미를 바라봤다.
“사장님? 지금 성국이한테 사장님이라고 한 거야? 성국, 네가 시킨 거야?”
“리미미 씨가 내 이름 부르기가 뭐하다고 그냥 그렇게 부르겠대요.”
“완전 웃겨. 성국이 베이비 보스가 맞긴 하지. 어리지만, 사장은 사장이지.”
[지금 시비 걸러 온 건가….]
나는 우유를 손으로 꽉 쥐었다.
이때였다.
리미미가 갑자기 휘청하더니 타일러의 옷에다가 와인을 그대로 쏟았다.
“아, 죄송.”
말도 짧게 끝냈다.
누가 봐도 일부러 와인을 쏟은 리미미와 열받은 게 분명한 타일러가 서로를 노려봤다.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북한에서 와서 잘 모르는데?”
“이거 변상하려면 너 같은 애 한 달 월급으로도 부족해.”
[하아… 타일러 저 자식이.]
나는 우유를 끝까지 다 마셔버리고는 거칠게 우유갑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탕!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타일러, 그거 구스 꺼 아니에요? 비싸야 500, 600달러 될 거 같은데. 우리 직원이 실수했으니 같은 옷으로 제가 사줄게요.”
“뭐라고?”
타일러는 콧방귀를 꼈다. 이들이 돈이 없어서 리미미에게 시비를 건 건 아닐 거였다.
캐머런이 얼른 타일러를 말렸다.
“타일러, 그만해. 세탁하면 되잖아. 그 정도 돈은 신사가 받는 게 아니지.”
“신사의 나라는 영국 아닌가….”
리미미는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화가 잔뜩 난 타일러가 리미미에게 다가가자, 캐머런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타일러를 잡아끌었다.
“성국, 우린 그냥 축하해주러 온 거야. 아무 사심 없이.”
[거짓말하지 마. 사심 많은 거 내가 제일 잘 알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미리 연락하고 정식으로 방문할게.”
“캐머런, 타일러. 오늘 불쾌한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고마워, 성국.”
캐머런은 타일러를 데리고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는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 씨, 아까 와인 일부러 그런 거죠?”
“네, 사장님.”
“왜요?”
“남의 사무실에 들어와서 저나 사장님을 비웃잖아요. 겨우 100달러짜리 와인 사 와서는 허세는….”
“미미 씨, 와인 가격 어떻게 잘 알아요?”
“리큐르 샵에서 아르바이트해서 잘 알아요.”
마크는 신기한 눈으로 리미미를 연신 바라봤다.
“리미미 씨,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요. 그리고… 와인 일부러 쏟은 거 너무 티 났어요. 미국에서는 그러다가 큰 소송에 걸릴 수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해요.”
물론 윙클은 무조건 나에게 잘 보여야 하는 시점이라 소송은 못 걸게 뻔했다.
“네, 사장님. 근데 한국 드라마 보면 물 뿌리고, 주스 뿌리고, 머리채도 잘만 잡던데, 여긴 안 되나 보네요.”
“그건 드라마고… 여긴 미국이잖아요.”
나도 드라마처럼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리미미가 나 대신 느끼한 윙클 형제를 해치워준 것 같아 홀가분했다.
“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사장님.”
리미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사장님 소리, 오랜만에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네…. 역시 자본주의야!]
나는 몰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