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타일러는 와인 자국이 선명한 티셔츠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도대체 성국이는 무슨 생각으로 북한에서 온 여자를 뽑은 거야!”
“타일러, 진정해. 무슨 생각이 있다기보다는 능력이 있으니까 성국이가 뽑았겠지.”
“캐머런. 넌 누구 편이니?”
“타일러, 가족인데. 당연히 나는 네 편이지. 그냥 이런 상황에서 너무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거잖아.”
타일러는 옷을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와인, 분명히 일부러 나한테 쏟았어. 확 고소해 버릴까, 그 여자?”
“타일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오늘 우리는 예고도 없이 성국이네 회사에 들이닥치다시피 했어. 그런데다가 너도 우호적이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지금 우리는 성국이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그 북한에서 온 여자를 확 고소해 버린다고! 그게 성국이랑 무슨 상관이야?”
“타일러, 너는 평소에는 나보다 상황 파악도 잘하고 영악하다가 화가 나면 앞뒤를 안 가리더라….”
“아버지 닮은 거지, 뭐.”
캐머런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타일러, 성국이는 지금 사냥개를 고용한 거야. 북한에서 온 거라는 거 보니까… 이 일이 아마 절박한 사람일 거야.”
“혹시 불법체류자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아. 불법체류자였으면 우리에게 저렇게 함부로 못 했을 거야.”
“흠… 그렇지.”
타일러도 서서히 이성을 찾고 있었다.
이 둘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타일러가 영악한 머리로 앞서나가다가 실패하고 분을 못 이기면 캐머런이 이성적으로 달랬다.
그게 바로 이 두 사람의 밸런스를 맞춰 시너지를 일으키는 요소였다.
“캐머런, 결국 우리는 조용히 ‘페이스 노트’를 주시해야 한단 말이지?”
“응… 근데, 갑자기 좀 더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다른 방법?”
“데니스.”
“성국이 룸메이트?”
“영화 감독한다고 시나리오 쓴다는데, 우리가 접근해서 투자 이야기를 슬슬 흘려볼까?”
타일러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절박한 사람은 아무거나 잡기 마련이고….”
“성국이한테 우리가 좋은 투자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거지.”
“물론, 데니스는 적당한 미끼를 주고 버리면 되고.”
“당연하지. 시나리오가 좋으면 우리도 숟가락 얹는 게 될 테니, 조금 투자하고 나중에 크게 받을 수도 있을 거잖아.”
“캐머런. 난 네가 항상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땐 우리 핏줄이 분명해.”
캐머런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타일러, 그러니까 너도 웃어. 그러면 사람들이 너의 진짜 모습을 모를 거야.”
“쌍둥이지만 나도 널 간혹 모르듯이?”
“그렇지. 암튼 우선은 성국이의 사냥개를 조심하자.”
“그래….”
타일러와 캐머런은 주차된 벤틀러에 올라탔다.
* * *
슬슬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리미미는 현재 가장 취약한 보안 부분을 전반적으로 손보고 있었다.
일하는 동안에는 잔뜩 몸을 구부린 채 아무 말도 없이 집중했다.
나는 노트북을 일부러 소리 나게 닫았다.
“마크, 리미미 씨. 우리 회식하러 갈까요?”
리미미가 기지개를 쭉 켰다.
“드디어 남한 드라마에서 보던 회식을 하네요!”
“북한에서는 회식 안 해요?”
“먹고 죽을 것도 없는 나라에서 회식이 가당키나 하나요.”
“미미 씨, 진짜 북한 사람들 많이 굶어요?”
“마크, 궁금하죠?”
“네!”
마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술 사세요.”
“당연하죠! 성국아, 너는 술 못 마시니까 콜라 마셔.”
“나는 몸에 좋은 우유나 마실래.”
나는 노트북을 챙겼다.
* * *
마크가 우리를 데려 간 곳은 싸구려 땅콩 껍데기가 바닥에 나뒹구는 학교 근처의 펍이었다.
마크는 리미미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미미 씨, 드시고 싶은 거 고르세요.”
“마크가 시켜주세요.”
“그럴까요?”
마크는 신이 나서 메뉴판을 정독했지만, 영 결정은 못 내렸다.
“마크, 이리 줘봐.”
나는 메뉴판을 쭉 훑었다.
[죄다 싸구려네. 하아, 내가 그러게 근처에 백 년 된 스테이크 집 가자고 했잖아…. 나 전직 재벌이라 입맛이 고급이라고….]
암튼 20대들의 입맛은 싸고 기름졌다.
“저녁도 돼야 하니까 버거 세 개에 나초랑 바비큐 시키고. 술은 각자 알아서 시키죠.”
“난 맥주지, 미미 씨는요?”
“저도 맥주요.”
맥주가 나오자 마크는 드디어 궁금한 것들 물어보기 시작했다.
“미미 씨, 북한 진짜 어때요?”
“뭐엉- 우선 좀 먹고요.”
리미미는 깡마른 체구에 비해서 햄버거를 한 번에 후딱 해치웠다.
“역시 자본주의 맛은 좋네요. 제가 이 햄버거 때문에 탈북을 결심했거든요.”
“이 햄버거 때문에요?”
마크는 전혀 상상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마크, 이제부터 본격적인 북한의 실상 이야기라는 이름의 사연팔이가 시작될 거야. 마음 단단히 먹어.]
나는 마크의 등을 두 번 도닥였다.
대한민국에서야 북한의 실상을 다루는 프로도 많고, 탈북자들의 증언도 많아서 익숙한 내용들이었다.
“태국 가서 외국 은행 사이트 털어서 북으로 송금하는 일을 주로 했거든요. 정치범 수용소에 부모님이 잡혀 계셔서 저는 24시간 감시당했는데, 제가 인도네시아 은행을 털어서 북한에 송금을 아주 크게 했어요.”
나도 어느새 리미미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거… 너무 흥미롭잖아.]
마크는 어느새 내 앞에 놓인 햄버거를 리미미 앞으로 옮겼다.
[마크, 그건 내 거… 그래, 봐주지. 북한에서 햄버거 때문에 탈출했는데….]
나는 씁쓸히 감자튀김을 쪽쪽 빨았다.
리미미는 햄버거를 한 입 먹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한국 돈으로 30억 정도 단번에 해킹해서 북한으로 바로 송금했거든요. 그랬더니 저 감시하던 동무가 뭐 먹고 싶냐고 하기에 햄버거 먹고 싶다고 했어요. 남한 드라마 보니까 대학생들이 햄버거 가게 많이 가더라고요. 사장님, 진짜 그래요?”
“누구나 자주 가요. 그래서요? 그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나도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감독 동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곤 지랑 나 먹을 거 두 개를 사 왔는데… 제가 햄버거를 먹고 그만 울어 버렸잖아요.”
“미미 씨, 왜요?”
“너무 맛있어서요.”
리미미는 두 번째 햄버거도 이미 거덜 내고 있었다.
“리미미 씨, 햄버거 더 드실래요?”
“좋죠, 사장님!”
들고 있던 햄버거를 싹 먹어 치운 리미미는 이번엔 감자튀김을 거덜 내기 시작했다.
마크는 리미미의 먹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리미미 씨, 근데… 24시간 감시당하는데, 탈출은 어떻게 한 거예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사실은 부모님 때문에 안 한 거예요. 부모님이 정치범 수용에 계시는데, 저까지 조국을 버리고 도망가면 생사를 알 수가 없거든요. 근데… 그날 햄버거를 먹는데… 감독 동무가 술을 몇 잔 먹더니 그러는 거예요. 너 그 좋은 재주로 외국 나가면 오히려 부모님 더 빨리 구할 수 있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미 씨?”
나는 마크의 등을 살짝 잡아당겼다.
[마크, 간격 유지해. 간격!]
하지만 술까지 마신 마크가 내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감독 동무가 북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거 없다고. 정치범 수용소가 가장 독하긴 해도, 거기 녀석들 다 돈으로 매수 가능하다고요. 어차피 내가 여기서 아무리 조국을 위해 해킹해서 송금해도 조국은 우리 부모님 신경 하나도 안 쓸 거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자본주의 나라에 가서 돈을 벌자! 그래서 햄버거 먹으면서 탈출할 마음을 먹은 거예요.”
리미미는 맥주까지 야무지게 다 마셨다.
“여기 맥주 한 잔 더!”
리미미는 새로 나온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야기를 이었다.
“탈출은 생각보다 쉬웠어요. 감독 동무가 술 먹으면 바로 뻗는 타입이라서 술 왕창 먹이고 뻗었을 때, 도망쳤어요.”
“그래서 리미미 씨 부모님은 살아 계세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네 시간씩 자면서 일해서 그 돈 다 정치범 수용소 간부한테 보냈어요. 다행히 살아는 계세요.”
“미미 씨, 거짓말일 수도 있잖아요!”
마크는 마치 리미미의 일을 자신의 일인 것처럼 흥분했다.
“저 그 정도 바보 아니에요. 불법이지만 사이사이 통화했어요. 그리고 한 달 전쯤 간부한테 연락이 왔어요. 자기가 올해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 거니까, 부모님 꺼내고 싶으면 한 분당 만 달러씩 2만 달러를 준비해서 송금하라고요.”
리미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사장님이 실리콘밸리 신입 초봉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충분히 저희 부모님 북에서 구해올 수 있어요.”
“미미 씨, 정말 대단해요….”
마크는 이제 말릴 틈도 없이 리미미만 바라봤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없구나….]
나는 전직 재벌에서 심장마비로 모든 것을 다 잃고 아무것도 없는 흙수저 집안에 다시 태어났을 때, 나만큼 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북한에서 모든 것을 잃고 부모님까지 구출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의 리미미를 보자 내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나는 차가운 우유를 쭉 들이켰다. 크윽-
“리미미 씨, 열심히 일하세요. 저는 말한 것은 지킵니다.”
* * *
나는 포장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리미미에게 건넸다.
“야식으로 먹든 내일 아침으로 먹든, 편하게 먹어요.”
“사장님… 이런 건 한국 드라마에서 불쌍한 주인공 여자에게 재벌 남자 주인공이 하는 짓인데요?”
“리미미 씨, 감동 파괴해서 미안하지만. 나 미성년자예요. 미국에서 나랑 사귀면 범죄자란 뜻이에요.”
“자본주의가 그런 건 또 엄하네요. 사장님, 걱정 마세요. 전 사장님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요. 저는 약간 푸근한 스타일 좋아하거든요. 사장님은 누가 봐도 완전 까칠해 보이거든요.”
[잠깐. 지금 뭐라고? 나를 왜 안 좋아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나를 좋아하는데!]
리미미는 포장 봉투 안을 확인하더니 배시시 웃었다.
“콜라도 챙겨주는 센스. 감사합니다, 사장님.”
볼이 빨간 마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미미 씨, 내일 점심도 햄버거 먹을래요?”
“마크, 내가 아무리 햄버거 때문에 북에서 미국으로 넘어왔지만 몇 끼를 연속으로 먹기에는 힘들어요. 저도 뜨끈하고 시원한 국물 좋아하는 한국 사람이에요.”
“아, 미안해요. 다음에 당길 때 말해요. 내가 살게요.”
“그래요, 마크.”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나는 괜히 보도블록만 발로 툭툭 쳤다.
[까칠한 게 뭐가 어때서. 까칠한 게 내 시그니처 매력이라고! 뭐, 나도 키 작고 깡마른 여자는 취향 아니라고!]
마크는 화기애애하게 리미미와 인사를 나누고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기숙사로 가자.”
“그래….”
이때, 리미미가 내게 다시 오더니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왜 이러지?]
그리곤 고개를 들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사장님, 저한테 기회 주셔서 감사해요. 이건 단순히 저를 위한 기회가 아니라, 저희 가족들의 생명이 달린 정말 간절한 기회거든요. 그 기회 놓치지 않게 정말 열심히 일할게요. 사장님, 잘 들어가세요!”
리미미는 다시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뛰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리미미에게서 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났을 때와 같은 절박함이 보였다.
그때 나는 이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이 목표였다면, 리미미는 부모님을 살려야 했다.
“성국, 세상에 참 다양한 나라도, 사람도 있는 거 같아. 미미 씨, 정말 대단하지 않아?”
“마크, 리미미 씨 좋은 사람 같아. 사내연애 금지 취소할게.”
“성국? 진심이야?”
[물론 마크, 사귀는 게 가능하다면.]
나는 기숙사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술까지 마셔서 들뜬 마크는 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신나게 종알거렸다.
“성국… 어떻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표시하지? 당연히 영화 보자고 하면 되겠지?”
“마크,”
나는 나지막이 마크를 불렀다.
“왜, 성국?”
“대한민국 드라마를 봐. 거기에 리미미 씨가 원하는 답이 있을 거야.”
“성국! 넌 역시 천재야!”
[마크, 내가 정말 사람 한 명 구제했다. 너 이 은혜 잊으면 안 된다….]
나는 다시 주머니에 손을 꽂고 쓸쓸히 기숙사로 걸어갔다.
이렇게 난 또 혼자가 되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