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달칵.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낮은 재즈 피아노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뭐야, 이 몽글몽글한 감성은….]
책상에서 데니스가 머리를 부여잡고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성국….”
[마크 한 명 사람 만들었더니, 이번엔 데니스인가….]
“데니스, 무슨 일 있어?”
“하아….”
데니스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셸이 연애 중이야.”
[이런! ‘페이스 노트’의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가 발생했잖아.]
아직 기능들이 세부적으로 나눠지지 않아서 발생한 상태였다. 연결된 모든 이들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데니스의 어깨를 도닥였다.
[근데 이거 꼭 데니스 영화 같은 내용이잖아….]
데니스의 두 번째 작품은 각자의 꿈을 향해서 LA에 모여든 청춘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결말은 한때 연인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지만 각자 따로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었다.
[그래, 사랑 다 소용 없어. 데니스, 인생 혼자 사는 거야!]
“성국… 미안. 어린 너한테 이런 추한 모습 보여서….”
“데니스, 예전에 너랑 짧은 시나리오 이야기한 적 있잖아.”
“<채찍> 말고?”
“응. LA에 젊은 청춘들이 꿈을 위해서 모여드는 이야기.”
“아, 맞아. 우리 그 이야기도 했지?”
“데니스, 내가 보기에 너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매우 재능이 있을 거 같아.”
내 분석만이 아닌 사실이기도 했다.
살짝 기운을 차린 데니스가 나를 쳐다봤다.
“성국, 우리가 그때 이야기했던 LA에 꿈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 써보라는 거지?”
“응. 원래 실연은 창작으로 잊는 거잖아.”
나도 옛날 재벌 시절에 그랬다.
여자에게 크게 마음을 주진 않았지만, 헤어지고 나면 쓸쓸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미친 듯이 일만 했다. 그 시기의 삼전 그룹은 정말 불이 꺼지지 않았었다.
데니스는 제법 여유를 찾았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네 안에 꼭 늙은이 몇 명은 있는 것 같아.”
나는 그저 웃었다.
[데니스, 내 안에는 전직 재벌이 있어.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 거라고. 이게 다 너에게 투자하는 거야.]
“참, 성국. 윙클 형제가 나를 보자고 하는데? 무슨 일일까?”
“너를 보자고?”
“응. ‘페이스 노트’ 통해서 연락이 왔어. 내가 영화감독 지망생이라고 들어서 한번 만나고 싶대. 자기 아버지가 투자회사 운영하는데, 엔터 쪽으로 관심이 있다고.”
전형적인 낚시였다.
내가 잘 낚이지 않으니, 데니스를 낚아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분명했다.
“데니스, 그 말 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가 조언 하나 해도 돼?”
“당연하지. 너는 내 영감의 원천이잖아.”
“데니스, 어떤 계약서든 함부로 도장 찍으면 안 돼. 할리우드에서는 우편이나 메일로 보내는 무작위 시나리오 안 읽어보는 거 알지?”
“어….”
할리우드 영화 제작사에서는 무작위로 도착하는 시나리오를 보지 않는 게 불문율과 같은 거였다.
우편으로 본 시나리오를 뜯어본 제작사가 영화 개봉 후 시나리오를 보낸 사람으로부터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이 걸린 후부터였다.
데니스 역시 그래서 미셸이 준 의견을 삭제하느라 <채찍>의 시나리오가 늦어지고 있었다.
“윙클 형제 말처럼 그들 아버지는 큰 투자회사를 운영하시는데, 만약 그들의 의견이 시나리오에 들어가는 순간 어떻게 될지 보이지?”
“내 시나리오는 온전히 내 게 아닌 거네.”
“당연하지. 데니스, 나 같으면 이 시나리오가 완벽하게 완성되기 전까지는 그런 유혹에 발도 안 담글 거야.”
데니스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뺨을 세게 두드렸다.
“내가 미셸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 성국이 네 조언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사실은 윙클 형제가 투자하겠다고 하면 나도 어서 성공하고 싶어서 그러려고 했거든. 미셸은 LA로 이사도 가고, 남자 친구도 만났는데…. 난 기숙사에서 뭐 하는 짓인가 해서.”
“데니스, 한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급할수록 돌아가라.”
데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 넌 내 구원자야.”
[오늘 사람 여럿 구하네. 니들, 내 은혜 잊으면 안 된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데니스, 그런 의미로 우유나 한잔할까?”
“그래, 난 맥주!”
데니스가 냉장고에서 맥주와 우유를 꺼내왔다.
“성국, 그런데 너 오늘 좀 우울해 보여.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아니… 마크의 사내 연애 금지를 풀어줬거든.”
“정말? 리미미 씨랑 잘될 기미가 보여?”
“전혀 안 보여.”
나는 우유를 벌컥 마셨다.
“근데 왜 네가 우울해?”
“마크의 긴 짝사랑은 언제 끝날까 싶어서.”
“성국, 넌 정말 찐친구야. 그런 것까지 다 걱정해주고.”
[마크가 방황하면서 일 못 할까 봐 걱정하는 거야. 그래서 사내 연애 금지시킨 건데…. 오늘 좀 마음이 약해졌어. 나답지 않게….]
나는 몰캉몰캉한 재즈 선율에 맞춰서 우유를 마셨다.
[가끔 나답지 않은 일도 하는 거지, 뭐.]
* * *
마크와 리미미, 나는 사무실에 매일 출근해서 ‘페이스 노트’의 기능을 좀 더 세분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달 동안 리미미가 보여준 실력은 대단했다. 무엇보다 나와 마크의 지시를 100% 이해하고 오히려 자신의 의견도 아끼지 않고 내놨다.
물론 마크와 리미미의 관계는 정말 접점 하나 없는 평행선이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아무튼 오늘은 리미미의 정식 채용에 대해서 마크와 논의해야 했다.
퇴근 시간이 되자 리미미가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짐을 싸는 게 보였다. 평상시에는 사무실에 늘 두고 다니던 노트북이었다.
마크와 나는 둘 다 아무 말 없이 리미미가 짐을 챙기는 모습을 지켜봤다.
사실 아직 마크와 확실하게 리미미의 채용에 대해서 마무리 짓지 못했다.
리미미는 가방을 들쳐 메더니 나와 마크를 번갈아봤다.
“사장님, 마크. 그냥 편하게 결정해요. 만약 잘렸는데, 짐 챙기러 사무실 다시 오기 쪽팔리잖아요.”
마크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이럴 땐 내가 나서야지.
“리미미 씨, 그동안 정말 실력을 많이 보여줬어요. ‘페이스 노트’ 사용자들이 모두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마크도 도움 정말 많이 됐다고 이야기하고요. 근데 제가 제일 걸리는 점은요.”
나는 솔직하게 마크를 쳐다봤다.
마크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를 왜 봐, 성국아?”
“마크, 넌 리미미 씨랑 계속 일할 수 있어?”
“미미 씨야… 당연히 너무 좋은 프로그래머야. 있으면 도움이 되지.”
“그럼, 계속 같이 일하시죠. 리미미 씨.”
나는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사장님, 방금 걸리는 게 하나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걸리는 게 마크였거든요.”
“성국, 무슨 소리야!”
마크가 발끈했다.
“사장님, 마크가 왜 걸리세요?”
“리미미 씨, 혹시 마크가 한 달 동안 뭐 리미미 씨를 이상하게 대한다거나 한 적 없어요?”
“아하….”
리미미는 빙긋 웃더니 이해한 얼굴로 가방을 책상에 내려놨다.
“사장님, 걱정 마세요. 그건 제가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얼핏 본 마크의 얼굴은 그렇게 개운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크, 괜찮아? 난 솔직히 네 의견이 최우선이야. 리미미 씨도 중요하지만, 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너야.”
나는 리미미에게 마크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
리미미가 제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고 해도 마크를 무시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었다.
“성국, 나도 너랑 일하면서 굉장히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아닌 거 같은데….]
“미미 씨 정도의 실력, 어디서도 찾기 쉽지 않아. 보안 부분은 특히나 대단해. 우리가 꼭 필요한 프로그래머인 것은 확실하고, 나도 미미 씨가 앞으로 우리랑 계속 일했으면 좋겠어. 동료로서.”
리미미가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 씨, 가방은 두고 가도 될 것 같네요. 대신, 자세한 연봉 등은 내일 이야기해요. 마음에 안 들면 그만두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가방은 다 풀지 말고요.”
“역시 사장님은 철두철미하시네요. 그럼, 전 가볼게요. 두 분이서 마저 상의하시죠.”
리미미는 그렇게 사무실을 떠났다.
나는 얼른 마크를 살폈다.
“성국, 네가 술만 마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크, 도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성국, 네가 그랬잖아. 답은 한국 드라마에 있을 거라고.”
“그래서?”
“한국 드라마에서 멋진 남성은 과묵하고, 여자를 묵묵히 지켜주는 남자더라고.”
[마크, 대체 어떤 드라마를 본 거야!]
마크는 냉장고로 가서 맥주를 꺼내 땄다. 그러곤 숨도 쉬지 않고 반 병쯤 마셔 없앴다.
“그래서 리미미 씨가 퇴근할 때면 조용히 뒤따라가 지켜주고, 일을 할 때도 말도 별로 안 하고 그랬더니 리미미 씨가 어느 날 나를 따로 부르더라고.”
“네가 좋아하는 걸 눈치챈 거야?”
“그게 아니라… 자기가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말하라고. 자기 인민재판 같은 거 많이 받아봐서 면전에 대고 욕하는 거 아무렇지도 않다고. 자기는 직장 상사이자 동료로서 불편하게 지내는 거 싫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고.”
“그럼 네가 좋아하는 걸 안 게 아니라….”
“미미 씨는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줄 알더라고. 성국, 한국 드라마에 답이 있다며!”
마크가 울부짖었다.
“도대체 한국 드라마 뭘 본 거야?”
“<별은 내 심장에> <사랑은 그대 품속에> 그런 거 보면 남자들이 다들 입 꾹 다물고 화난 얼굴로 여자 주인공을 항상 지켜보잖아. 거기다 매번 세상 모든 고뇌는 다 짊어지고!”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아무리 2004년이라고 해도 너무 옛날 드라마였다.
“마크, 그거 대한민국에서도 10년 전에 유행한 드라마야.”
“뭐라고! 성국, 알려주려면 제대로 알려 줬어야지. ‘페이스 노트’에 물어보니까 사람들이 이게 다 재미있다고 했다고.”
“재미있는 거랑 트렌드인 건 다른 문제잖아. 마크.”
나는 마크의 등을 도닥였다.
“근데, 마크 오히려 잘된 거 아닐까?”
“뭐가 잘돼?”
“리미미 씨는 네가 좋아하는 거 모르잖아. 고백했다가 차였으면 일하기에 더 껄끄러울 건데, 차라리 이게 낫지 않아?”
“그런가….”
마크는 머리를 긁적였다.
“마크, 어쨌든 리미미 씨와는 다시 일하게 됐고. 너의 짝사랑도 안 들켰잖아. 마크, 대한민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어. 짚신도 짝이 있다.”
“그래, 성국. 내 짝도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렇지?”
[짝 없는 짚신도 많긴 하더라고… 요즘은….]
나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마크는 축 처진 얼굴로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성국, 그냥 내 짝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면 하늘의 누군가가 ‘띠링’ 하고 알림을 줬으면 좋겠어. 그럼, 괜히 상대방 떠보고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직진하면 되잖아. 이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내 운명의 짝이구나, 한눈에 알아보고 얼마나 좋아. 왜 하나님은 그런 알림을 안 만드신 거야.”
“알림?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걸 이제야 생각하다니! 아직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라 정작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잖아.]
“성국, 왜 그래?”
“마크! 너의 실연은 곧 ‘페이스 노트’의 발전이야. 그러니까 너 절대 연애하면 안 돼! 다시 연애 금지야!”
“성국, 대체 무슨 소리야?”
나는 얼른 ‘페이스 노트’를 폈다.
“마크, 우리에게 부족한 게 하나 있어.”
“그게 뭔데?”
“바로 알림.”
“알림?”
“내 글에 누가 댓글을 달거나 그러면 바로 알림이 뜨는 거지. 안 그러면 매번 들어가서 확인 해야 하잖아.”
“성국아! 넌 정말 천재야! 어떻게 내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을 해?”
“마크, 그냥 우리 둘 다 천재인 것으로 하자.”
마크는 들뜬 얼굴로 ‘페이스 노트’의 프로그램을 만지기 시작했다.
“성국, 이거 정말 좋은 아이디어야. 지금 당장 프로그래밍 해볼게. 미미 씨 출근하라고 하면 오버일까?”
“이제 정직원인데, 야근 수당 준다고 하지, 뭐.”
나는 얼른 리미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사장님, 저 혹시 생각해보니 잘라야 해서 전화하셨어요?
“그럴 리가요. 리미미 씨, 지금 출근 가능해요?”
- 네에? 방금 퇴근했는데요?
“마크랑 제가 지금 아주 끝내주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거든요. 야근 수당은 물론 드립니다!”
- 집에 있어봤자 할 일도 없었어요. 대신 저녁으로.
“햄버거 사드릴게요!”
- 당장 가겠습니다,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