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그레이스는 온화한 얼굴로 갈비를 내 앞으로 밀었다.
미국 생활 동안 그레이스는 내 엄마와 같은 분이었다.
“성국아, 그래도 졌을 때 상처받지 않는 법은 배워둬. 괜찮다면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소개해줄게. 참, 미국에서 정신과를 다닌다는 것은 한국에서처럼 큰일이 아니야. 우린 다 누구나 조금씩 마음의 병을 안고 살잖니.”
“네….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나는 얼른 대답하고 소갈비를 입에 넣었다.
[저번 생에서 정신과 상담 수도 없이 받았어, 그레이스. 너무 걱정하지 마.]
기업 총수의 자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외발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이다.
내 말 한마디에 기업이 움직일 만큼 삼전 그룹이 허술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실수 하나가 삼전 그룹의 주가를 떨어뜨리긴 했다.
그럴 때마다 밀려드는 압박감.
그걸 견디기 위해서 정신과 상담을 수도 없이 받았다. 그 결과, 내가 얻은 결론은 딱 하나였다.
모든 싸움에 지지 않으면 된다. 이기는 걸 습관으로 만들면 된다!
질 때도 있겠지만, 웬만하면 이기면 된다. 죽을 때까지!
그레이스가 텅 빈 고기 판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더 먹을 거죠?”
“네!”
리미미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한국에서 그렇게 많이 팔린다는 소주도 한잔하면 안 될까요?”
“왜 안 돼요. 성국이만 빼면 우린 모두 성인이니까, 걱정 말고 다들 한잔씩 해요.”
“성국아, 소주가 뭐야?”
마크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연한 보드카라고 생각하면 돼.”
“기대되는데….”
문득 마크가 나를 쳐다봤다.
“성국, 네가 어떻게 소주 맛을 아는 거야?”
아차!
이럴 땐 쓸데없이 예리한 마크였다.
“…우리 엄마와 아빠가 밤마다 골뱅이 소면에 먹던 거야. 그때 소주를 드셔서 내가 맛이 어떠냐고 물어봤거든. 마크, 우리 집이 얼마나 가난했었나 하면… 아빠가 일하시는 식당에서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골뱅이를 들고 와서….”
울컥. 소주를 보니 엄마와 아빠가 문득 떠올랐다.
그레이스가 내 등을 도닥였다.
“성국아, 괜찮아?”
“소주 보니까 엄마, 아빠 생각이 나서….”
그 말에 리미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야 멀어서 그렇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지만, 리미미는 사정이 그렇지 못했다.
그레이스가 조용히 리미미에게 물었다.
“리미미 씨는 부모님이랑 같이 나온 거 아니죠?”
“네…. 아직 북에 계세요. 얼마 전에 돈 보내 드렸더니, 전화 통화를 5분이나 했어요. 우리 사장님이 주시는 월급 꼬박꼬박 모아서 부모님 데리고 오는 게 제 소원이에요.”
리미미는 시원하게 소주를 원샷했다.
“와, 깔끔하네요! 우리 부모님이 마셨더라면 좋아하셨을 건데….”
[하아… 우리 집 사연보다 더한 강자가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나는 차가운 물을 벌컥 들이켰다.
“성국, 마크!”
이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피터였다.
“미안, 일 마치고 오느라 내가 늦었지?”
“괜찮아요, 피터.”
“성국, 안 본 사이 더 어른스러워졌는데?”
[원래 어른이라고, 피터.]
“마크도 좀 더 성숙한 느낌이고….”
나는 얼른 리미미를 소개했다.
“피터, 여기 리미미 씨요.”
“미미, 삐삐 친구인가?”
나와 마크는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터, 아재 개그라니….]
미국이라고 해서 아재 개그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레이스는 뭐가 좋은지 피터의 말에 웃고 있었다.
[하아, 연애란 좋은 거야….]
리미미는 다행히 별 반응이 없었다. 윙클 형제에게 했듯이 한 방 날리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 돈줄은 기가 막히게 알았다.
“미국 오니까 제 이름이 참 글로벌하더라고요. 부모님이 아마 제 미래를 조금은 아셨나 봐요.”
“참, 성국이가 리미미 씨 부모님 관련해서 내게 부탁을 했어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브로커를 찾아 달라고요.”
리미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
[뭐, 이런 걸로 놀라긴…. 나 원래 조용히 움직이는 스타일이라 이런 건 말 잘 안 한다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리미미 씨 이야기 들으니 아무리 믿을 수 있는 라인이라고 해도, 너무 한 라인만 오래 타다 보면 타성이 생겼을 거예요. 만약 그렇다면 그들도 리미미 씨를 파악하고 있을 것 같아서 제가 피터에게 따로 부탁했어요.”
“성국이 그들이 제시한 조건인 부모님 몸값이나 기한 같은 것도 진짜인지 다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지금 믿을 만한 브로커와 접촉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줘요.”
리미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와 피터에게 90도로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진짜 ‘페이스 노트’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슬쩍 리미미 씨의 옷을 잡아끌었다.
“리미미 씨, 여기 북한 아니에요. 그리고 ‘페이스 노트’보다 좋은 조건 나오면 언제든지 이직해요.”
“그런 조건 없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
“내 생각도 그렇긴 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크가 감탄 어린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성국, 너 정말… 네 나이에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생각하는 거야? 정말 볼 때마다 감탄스러워.”
“내가 좀 어른스럽지.”
“성국아, 그리고 요즘 내가 느끼는 건데.”
“뭐, 마크?”
“너 요즘 말이 아주 많아진 것 같아. 예전에는 할 말만 하고 속으로 뭔가 생각하는 느낌이었거든. 근데 이제 거침없이 표현하는 느낌이 들어.”
[이런, 또 들켰네.]
예전엔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말들이 나이 들면서 점점 밖으로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네 속내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난 좋아.”
뭔가 적응 안 되게 감성적인 분위기로 흐르자 피터가 얼른 잔을 들었다.
“다들 안 본 사이 좀 더 끈끈해진 거 같네. 이틀 뒤의 포럼을 위해서 건배하자고!”
다들 소주가 든 잔을 들었다.
물론 난 깡생수!
“누가 건배사를 할까?”
피터가 나와 마크를 번갈아 봤다.
나는 이번에는 마크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마크, 네가 해.”
“어? 내, 내가…?”
마크는 눈동자를 잠시 굴리더니 잔을 들었다. 그리고 힘 있게 외쳤다.
“‘페이스 노트’의 발전을 위하여.”
* * *
마크가 술에 알딸딸하게 취해서 침대에 앉았다.
나는 차가운 우유를 마시면서 모레 있을 포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성국, 우리가 ‘페이스 노트’를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내놓는 자리잖아.”
“응.”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우리를?”
“대단하다고 여길 거야.”
“정말 그럴까? 그냥 대학생들 장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마크는 술 때문인지 조금 감성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크의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술버릇이 시작됐다.
“성국, 솔직히 난 여기까지 온 것도 믿기지가 않아. 너랑 나랑 고등학교 기숙사 한방에 배정되고 나서 네가 나한테 이런 거 한번 만들어 보자고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당연하지. 내가 엉덩이에 땀띠 나면서 그 고등학교 들어간 이유가 널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침착하게 차가운 우유를 마셨다.
“그땐 정말 장난으로 시작한 거였잖아. 나 같은 너드한테는 솔직히 오프라인보다는 인터넷에서 사람들 만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단 생각도 들었고….”
마크는 말을 하면서 졸린 눈을 비볐다.
“성국아, 참 너랑 나랑 많은 일이 있었네. 제시랑도 그렇고…. 참, 제시 말이야. 타일러랑 헤어진 거 같아. ‘페이스 노트’ 보니까….”
“마크, 너 아직도 제시 몰래 보고 있던 거야?”
“아니야. 성국 너도 알다시피 난 한번 빠졌다가 헤어 나오면 또 금방 잊잖아. 친구니까 그냥 아는 거지….”
마크는 술만 먹으면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널뛰기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성국, 그냥 걱정돼서.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페이스 노트’를 알리는 자리잖아. 우리 잘될까?”
“마크, 나는 네가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어. 우리 모두 아직 젊잖아.”
“넌 젊은 게 아니라 어리지.”
마크가 히죽거렸다.
“아무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야, 마크.”
“응… 나도 믿어. ‘페이스 노트’도 너도.”
마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침대에 그대로 쓰러졌다.
드르렁. 드르렁.
곧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노트북으로 이번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살폈다.
마지막 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서 계속 고민 중이었다.
바로 ‘페이스 노트’가 지향하는 세계관이었다.
[‘페이스 노트’의 비전….]
그게 떠오르지 않았다.
* * *
로비로 내려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피터와 그레이스가 우리를 반겼다.
피터가 약간 난감한 얼굴로 우리 세 사람을 훑었다.
후드 티에 청바지 차림인 나.
체크 셔츠 차림인 마크.
거기다 피어싱 가득한 리미미.
“세 사람… 이렇게 지금 포럼에 가겠다고?”
“피터, 전 편한 게 좋아요. 새 시대를 여는 신기술 포럼인데, 양복 입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지만… 이건 너무 편한 거 같은데. 그레이스,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인가?”
“피터, 성국이를 한번 믿어 봐요. 요즘 실리콘밸리에서는 다들 편하게 다니잖아요.”
“내가 진짜 옛날 사람이구나….”
피터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었다.
“근데, 다들 성공해도 이렇게 입고 다닐 거야?”
“당연하죠. 피터, 옷에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아요.”
“저도요. 성국이가 저한테는 체크 셔츠가 잘 어울릴 거 같다고 해서 색깔별로 샀어요.”
마크는 새로 산 체크 셔츠를 보이며 웃었다.
[마크, 10년 후 대한민국 판교에서 가장 유행하는 스타일이야.]
“그래, 출발해 보자고. 앞에 차가 기다리고 있어.”
피터는 우리를 차로 안내했다.
그러곤 내게 다가와서 조용히 물었다.
“성국, 자신 있지?”
“자신은 항상 있어요.”
“역시!”
피터는 내 어깨를 도닥였다.
근데 사실 오늘은 좀 자신이 없었다.
밤새 고민한 ‘페이스 노트’의 비전을 정확하게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 * *
전재형 회장이 아들 전태국을 데리고 새 시대를 여는 기술 포럼장에 도착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양 비서의 아들 젊은 양 비서가 두 사람을 맞았다.
“회장님, 도련님. 오늘 보실 만한 기업들 프레젠테이션 준비해 봤습니다.”
전재형 회장이 젊은 양 비서가 내민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바로 ‘페이스 노트’였다.
성국이가 미국인 친구인 마크와 만든 것이었다.
전재형 회장은 시간표를 확인했다.
“오후 2시에 ‘페이스 노트’ 프레젠테이션 시작하는 건가?”
“네, 회장님.”
“그래, 그건 꼭 보고 싶네.”
“아버지, 전 그거 안 보고 다른 거 봐도 되죠?”
전태국의 말에 전재형 회장은 속으로 화를 눌렀다.
“태국아. 이건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번 포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기업인데 그걸 안 보겠다고?”
“성국이 따로 불러서 프레젠테이션 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옛날에 저희 집에서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나요?”
전재형 회장은 또 한 번 화를 눌렀다.
“태국아, 여긴 미국이야. 그런 인맥으로 사업하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되지만, 오늘 저녁 자리에서 브리핑할 때 네가 본 회사가 ‘페이스 노트’보다 가망 있어야 할 거야.”
“저도 이제 다 컸잖아요. 대학에서 비즈니스도 공부하고요. 대충 감이 있다고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기업을 20년 넘게 운영했어도 선택할 때마다 매번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데, 겨우 이제 대학생인 녀석이 감이 있다고?
전재형 회장은 남들 눈이 있어 화를 꾹 누르고, 젊은 양 비서를 봤다.
“양 비서, 이 일을 끝으로 그만둔다고?”
“네, 그래도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모실게요.”
“그래, 자네가 성국이랑 연락해서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해주게.”
“네, 회장님.”
전재형 회장은 그대로 포럼회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로 처진 전태국이 젊은 양 비서를 매섭게 쳐다봤다.
“양 비서, 괜히 바람 들어서 나가봤자 삼전 그늘이 제일 좋다는 거나 깨달을 거야. 그동안 나 모신 거 생각해서 6개월 안에 돌아오면 받아줄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련님.”
양 비서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절대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박차고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때, 뒤에서 누군가 양 비서를 불렀다.
“철수 형!”
바로 성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