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36화 (136/231)

제136화

“철수 형이라고?”

전태국이 못마땅한 얼굴로 뒤를 돌아왔다.

[하아, 저 면상을 여기서 또 보네….]

나는 얼른 다가가 젊은 양 비서를 반겼다.

전태국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왜 기분 나쁘게 계속 보는 거야?]

“전성국. 넌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해야지.”

“어른이요? 아하,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나는 고개를 숙이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제스처였다.

전태국은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왜 그러세요?”

“어린놈이 어디서 악수를 하자고 해?”

“태국이 형도 충분히 어린 것 같은데요. 그리고 악수가 왜 나쁜 건가요? 여기는 미국인데요. 누가 누군가에 고개를 숙여서 인사할 때는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나 그러는 곳이거든요.”

젊은 양 비서가 번지는 미소를 참는 게 보였다.

“진짜 오늘 일진 한번 사납네. 양 비서, 나 따라와.”

전태국은 그대로 포럼회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국아, 이따가 프레젠테이션 구경 갈게.”

“네, 형.”

젊은 양 비서는 얼른 전태국을 따라 들어갔다.

마크가 다가오더니 내게 물었다.

“성국아, 저 사람 누구야?”

“대한민국에 삼전이라는 그룹이 있어.”

“혹시 TV 만드는 회사 아니야? 본 거 같은데.”

“맞아. TV 만들지. 그 회사 후계자.”

마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후계자? 상속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은 아버지가 기업 총수면 그 자리도 아들에게 물려주거든. 그걸 재벌이라고 하고….”

“북조선에는 독재자가 있고, 남조선에는 재벌이 있는 거네요?”

“그런 셈이죠.”

북조선의 독재자, 남조선의 재벌이라….

리미미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성국아, 근데 너 긴장 안 돼?”

“전혀.”

“너 또 허세 부리는 거지?”

“무슨 소리야. 나 원래 이런 거 하나도 안 떨잖아.”

[삼전 그룹 부회장일 때 취미가 프레젠테이션이었어. 나만큼 프레젠테이션 잘하는 사람을 대한민국에서는 본 적이 없어. 물론 미국에는 찰리 잡스가 있었지만….]

“자, 들어가서 최종 리허설 하자.”

나는 후드 티를 매만지며 포럼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프레젠테이션 30분 전.

[왜 이렇게 긴장되지?]

저번 생에서는 정말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더 긴장이 됐다. 저번에는 어차피 삼전 그룹 사람들 상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서 편했던 건가?

그런데 더 문제는 마크도 옆에서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이다.

“성국아, 나는 Q&A만 나갈 건데도 이렇게 떨리는데 넌 괜찮아?”

[안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마크, 그냥 편하게 생각해. 우리가 연습한 예상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없을 거야.”

“그, 그렇겠지?”

이때, 그레이스가 피터와 함께 들어왔다.

“최종 리허설 잘 끝났다면서?”

“네, 그레이스.”

그레이스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청심환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이건 혹시 몰라서 준비한 건데. 청심환이라고, 한국 사람들이 떨릴 때 많이 먹는 거야. 혹시 필요한 사람 있어?”

“저요!”

“저요!”

나와 마크는 동시에 손을 번쩍 들었다.

마크가 나를 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흠… 들켰군….]

그레이스는 청심환을 직접 까서 나와 마크에게 내밀었다.

“둘 다 많이 긴장되지? 어서 먹어.”

나와 마크는 한 번에 청심환을 씹어 먹었다.

마크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성국, 왜 이렇게 쓴 거야?”

“쓴 게 몸에 좋은 거라는 한국 속담이 있어.”

나는 꾹 참고 청심환을 씹어 삼켰다.

이때, 피터가 나를 잠시 구석으로 끌고 갔다.

“성국, 아까 최종 리허설 잘 지켜봤어. ‘페이스 노트’의 역사와 사용법. 사용자들의 데이터 등 아주 훌륭했어. 근데 말이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근데, 였다.

이 말 뒤에는 꼭 앞의 칭찬을 다 뒤집는 부정적인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피터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한 방이 없다고 할까나. 이건 전적으로 프레젠테이션에 관한 거야. 그러니까 ‘페이스 노트’의 비전을 설명할 딱 한 단어. 그게 좀 부족한 것 같아.”

[나도 그걸 모르겠다고, 피터….]

어젯밤 내내 나를 괴롭힌 것도 이거였다.

프레젠테이션에서 설명은 누구나 다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프레젠테이션이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은 마지막 딱 한 마디였다.

나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피터는 내 어깨를 도닥였다.

“성국, 처음이니까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피터? 할 말 다 하고 괜찮다니!]

이때, 문이 열리면서 무대 담당 스태프가 뛰어 들어왔다.

“지금 앞 팀 거의 끝났거든요. 10분 쉬고 바로 들어갈 거니까 준비해 주세요!”

나와 마크가 서로를 바라봤다.

“마크, 준비됐어?”

“아, 아니…. 하지만 최선은 다해볼게. 성국, 넌 괜찮아?”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라면 자신 있게 당연하다고 외쳤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때, 리미미가 다가왔다.

“사장님, 마크, 모두 힘내세요! ‘페이스 노트’가 성공해서 진짜 북조선 친구들이랑 함께했으면 좋겠네요.”

순간, 뭔가 찌릿하게 내 뇌를 자극했다.

“리미미 씨, 방금 한 말이요.”

“뭐요? 파이팅이요?”

“아니요. 그다음 말이요?”

“북조선 친구들이랑도 ‘페이스 노트’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요?”

“네. 그게 가능할까요?”

“인터넷망만 깔리면 어디든 가능하지 않겠어요, 사장님?”

“그렇죠!”

나는 드디어 ‘페이스 노트’의 비전을 찾았다!

이때, 무대 스태프가 다시 뛰어 들어왔다.

“자, 이제 무대 나가서야 합니다. 다들 준비되셨죠?”

“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 * *

핀 조명이 나에게만 쏟아졌다.

청심환의 위력인지 익숙한 조명 때문인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페이스 노트’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마크라는 기숙사 룸메이트와 함께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일상을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는 건 어떨까? 더 나아가서 이 일상이 우리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 친구의 친구, 또 그 친구의 친구랑 공유하는 건 어떨까. 이런 고등학생들의 순수한 생각이 바로 ‘페이스 노트’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마크와 단둘이 해맑게 기숙사 방에서 찍은 사진도 곁들였다.

관객석에서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해맑은 두 고등학생이 만든 이 ‘페이스 노트’의 역사적인 첫 게시물은 바로 이거였습니다.”

바로 내 ‘페이스 노트’에 있던 첫 게시물이었다.

- 안녕, 난 전성국이야!

“정말 심플하죠? 하지만 이 인사 하나에 달린 댓글을 보십시오.”

최근까지 이 인사말에 달린 댓글은 천여 개가 넘었다.

관객석에서는 감탄사가 몇 번 튀어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댓글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럼, 제 글에 제일 최근에 달린 댓글이 뭔지 한번 살펴볼까요?”

관객들은 조용해졌고, 나는 ‘페이스 노트’의 알림을 켰다.

그러자 제일 최근에 달린 댓글 알림이 떴다.

“제가 얼마 전에 낸 퀴즈에 댓글이 올라왔네요. 원래 처음 마크랑 만든 이 사이트 이름은 ‘페이스 페이퍼’였습니다. 저희 고등학교에는 ‘페이스 페이퍼’라는 신입생들의 얼굴과 인적 사항이 적혀 있는 친구 만들기용 책자가 있었거든요. 참, 저희 단순했죠?”

관객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페이스 페이퍼’가 너무 길고 직관적이지 못하다면서 ‘페이스 노트’라는 이름을 제시해준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굉장한 유명인이고요. 제가 이 유명인을 맞히는 사람에게 밥을 사기로 했는데, 아직까지 맞힌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럼, 지금 온 알림의 주인공은 맞혔을지 한번 볼까요?”

나는 자연스럽게 화면에 띄운 내 ‘페이스 노트’의 가장 최근 알림을 클릭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댓글이 보였다.

관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내 입술이 저절로 올라갔다.

- 정답은 찰리 잡스! 성국, 언제 밥 사줄 거지?

댓글 작성자는 바로 찰리 잡스였다.

“정답을 맞히신 찰리 잡스 씨, 제가 아는 그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저한테 연락 주세요. 바로 밥 사드립니다!”

관객석은 웅성이기 시작했고, 찰리 잡스가 주목한단 소식에 연신 사람들이 강당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가슴이 웅장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떨렸던 마음도 가라앉았고, 핀 조명마저 즐거웠다.

나는 ‘페이스 노트’의 설명을 마치고 어두운 관중석을 쳐다봤다.

이제 그토록 오래 고민한 ‘페이스 노트’의 비전을 말할 차례였다.

숨 한번 쉬고.

“‘페이스 노트’는 동부의 고등학생 둘이 시작했지만, 지금 저희들은 미국 어디든 친구가 있습니다. 심지어 빌 게이트와 찰리 잡스도 저희 친구죠! 여러분들은 이들과 친구를 맺고 싶지 않습니까?”

“네에!”

관객석에서 대답이 터져 나오자 웃음소리가 유쾌하게 뒤를 이었다.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다.

“여러분이 인터넷이 되는 노트북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있든 ‘페이스 노트’를 통해서 저와도 친구가 될 수 있고, 빌 게이트, 찰리 잡스, 데미안 허스트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친구 수락만 하신다면 북조선의 김정일하고도요.”

관객석에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두운 관객석을 응시했다.

“전 세계의 모두와 친구가 되는 것. 그게 바로 ‘페이스 노트’의 미래입니다!”

짝. 짝. 짝. 짝. 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

삼전 그룹의 부회장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박수와 환호가 들렸다.

마크와의 Q&A 시간은 부족할 정도였다.

주최 측에서는 할당된 30분보다 10분을 더 줬지만, ‘페이스 노트’에 대한 관심은 좀처럼 식지 않았다.

“저희에게는 시간이 가장 큰 벽이네요. 여러분, 오늘 너무 재미있었고 마크와 저는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혹시 저희가 궁금하신 분들은 마크와 저의 ‘페이스 노트’를 방문해 주세요!”

나는 얼른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왔다.

피터와 그레이스는 박수를 쳤고, 리미미는 환호했다.

“사장님! 마크! 완전 대박 멋졌어요!”

“리미미 씨, 진정해요.”

“성국, 끝까지 고민하던데 비전 정말 끝내줬어. 세상 모두를 연결하겠다니! 진짜 감동적이었어.”

[이런 거 껌이라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크가 나를 툭 쳤다.

“성국, 너 지금 속으로 엄청 잘난 척했지?”

“마크, 좀 이런 건 이제 모른 척해주면 안 돼?”

“내 추측이 맞았네.”

이때, 대기실로 젊은 양 비서가 들어왔다.

“성국아, 정말 멋있었어! 오늘 본 프레젠테이션 중에서 최고였어. 아마 앞으로 이렇게 멋진 프레젠테이션은 못 볼 거야.”

[역사는 내가 갱신할 거니까 기대하라고, 양 비서.]

하지만 지금은 겸손하게.

“철수 형, 감사해요.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네요.”

“참, 회장님이 너랑 식사 약속 잡고 싶다고 하시네.”

“식사 약속이요?”

“응, 언제 시간 괜찮아?”

“내일 저녁 비행기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럼, 내일 점심 어때?”

“…….”

달칵.

대기실 문이 다시 열리면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바로 찰리 잡스였다.

“찰리!”

“성국, 오늘 아주 멋졌어. 나보다는 못하지만 프레젠테이션 잘하던데.”

[역시 찰리는 내 과야.]

“찰리 덕분에 프레젠테이션이 더 극적이었어요. 댓글 감사해요.”

“안 그래도 그거 확답 받으려고 왔어. 내일 점심 사주는 거 어때? 나, 저녁에는 다시 아플 컴퍼니로 돌아가거든.”

젊은 양 비서가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전재형 회장이냐, 찰리 잡스냐. 그것이 문제로군.]

나는 턱을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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