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핸드폰을 들고 조용한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철수 형, 저 성국이에요.”
- 성국아, 저녁 먹는 중이지?
“네, 형.”
- 미안한데… 혹시 오늘 늦게라도 시간 안 될까? 전재형 회장님이 널 보고 싶어 하시거든. 우리가 너희 호텔로 갈게.
[전재형 회장,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어쨌든 만나야지만 전재형 회장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형. 그럼, 9시에 로비에서 봬요.”
- 그래, 이따 봐.
* * *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성국아, 무슨 일 있니?”
그레이스가 심각한 내 얼굴을 보더니 물었다.
“삼전 그룹 회장님이 자꾸 보자고 하셔서요.”
“삼전이라면 한국에서 가전제품이랑 반도체 만드는 회사지?”
피터도 삼전 그룹에 대해서 잘 아는 눈치였다.
“네.”
“나도 눈여겨보고 있는 회사 중 하나야. 근데 그 회사랑 성국이가 어떻게 잘 알아?”
“제가 예전에, 그러니까 아기 때 삼전 전자 모델이었거든요.”
그 순간, 그레이스만 빼고 모두 나를 쳐다봤다.
제일 놀란 건 리미미였다.
“사장님, 혹시…. 예전에 ‘저스트’가 애들 키우는 그 프로 나오셨어요?”
“리미미 씨가 그 프로를 어떻게 알아요?”
“당연히 알죠! 북조선에서도 얼마나 인기 있었다고요! 제가 북조선에서 불법 비디오 구하려고 얼마나 애썼다고요! 태국에서는 그거 맨날 다운 받아 보느라 진짜 고생했습니다. 제가 ‘저스트’ 완전 팬이었거든요! 근데, 사장님….”
리미미는 갑자기 나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뭘 또 그런 눈으로 보고 그래, 리미미. 나 잘 자랐지? 원래 보통은 어릴 때 귀여운 애들이 잘생겨지기 힘든데, 난 다 이뤘거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때, 마크가 올라간 내 어깨를 쓰윽 내리더니 속삭였다.
“성국아, 너 또 속으로 잘난 척하고 있었지?”
나는 가는 눈으로 마크를 쳐다봤다.
그러자 마크가 피식 웃었다.
“맞네. 맞아. 성국이 보면 잘난 척할 때 꼭 어깨를 으쓱하더라고요.”
[해파리 마크, 생각보다 예리한걸.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리미미는 나를 다시 한번 찬찬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 근데 그 귀여웠던 얼굴은 다 어디로 갔어요?”
[뭐라고? 내가 예상한 건 이 반응이 아닌데….]
“애기 때는 볼살이 아주 통통하니 귀엽더니…. 지금은….”
[지금은 뭐어? 지금은 잘생긴 남자잖아! 리미미, 다음 말을 어서 하라고! 말을 그렇게 먹어버리면 어떻게!]
리미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이스가 의아한 얼굴로 리미리를 쳐다봤다.
“미미 씨, 성국이 정도면 잘 생기지 않았어요? 솔직히 잘생긴 정도가 아니죠. 성국이 한국 유명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캐스팅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정말 그때 어린 성국이 보면서 저 자식은 나중에 커서 남조선뿐 아니라 북조선 여자들도 다 홀리겠구나, 했는데… 사장님은 뭐, 그 정도는 아니신 거 같아요. 우선 저를 못 홀리시거든요.”
나는 테이블 아래 손을 불끈 쥐었다.
[리미미 씨도 내 스타일은 아니거든! 마크 스타일이지!]
“그럼, 미미 씨 스타일은 어떤데요?”
그레이스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저야, 젊음의 상징인 정우승 배우죠.”
“어머, 나도 좋아하는 배우에요.”
그레이스도 맞장구를 쳤다.
“그레이스도 좋아하세요?”
“참, 나 한국에서 정우승 배우 실제로 본 적 있잖아요.”
“어머, 어때요? 실물도 장난 아니죠?”
“미미 씨, 난 정말 정우승보다 잘생긴 남자는 태어나서 본 적이 없어요.”
쩝.
이 상황은 뭐지?
여자 둘은 정우승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고, 나와 피터, 그리고 마크는 눈만 끔뻑였다.
마크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우승이 누구야?”
“대한민국 남자 배우인데, 잘생긴 걸로 유명해.”
[앞으로 20년은 쭉 잘생길 거야. 쭉 결혼도 안 하고….]
나는 쓴 입맛을 다셨다.
* * *
호텔 로비 정각 9시.
내가 로비에 내려가자 젊은 양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국아, 여기!”
“회장님은요?”
“안쪽에 계셔. 들어가 봐.”
“형은 여기서 기다리는 거예요?”
“응, 그래야 할 것 같아.”
“저녁은 드셨어요?”
“당연히 먹었지. 내 걱정은 하지 마.”
젊은 양 비서는 예전처럼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슬쩍 봉투를 내밀었다.
“성국아, 이게 뭐야?”
“들어오는 길에 유명한 베이글 집이 있다고 해서 좀 샀어요. 바쁘시더라도 식사는 꼭 챙겨 드세요.”
예전에 뉴욕에서 같이 유학할 때 젊은 양 비서가 참 좋아하는 베이글 집이었다.
“이런 건… 내가 챙겨야 하는 거 하는데….”
“철수 형이 제 비서도 아닌데, 왜 이런 것까지 챙겨요.”
[양 비서, 이번 생에서는 내 비서 아니야….]
나는 측은한 눈으로 젊은 양 비서를 바라봤다.
초슈퍼울트라 갑으로 살 때는 몰랐는데, 나도 이번 생에서 흙수저 물고 태어나서 바닥부터 여기까지 올라오다 보니 젊은 양 비서의 고생이 눈에 밟혔다.
젊은 양 비서가 살짝 감동한 눈치였다.
“성국아, 고마워… 잘 먹을게.”
“네, 형. 여기 호텔 라떼 괜찮아요.”
“어… 고마워. 회장님 기다리시겠다. 어서 들어가 봐.”
젊은 양 비서는 얼른 나를 전재형 회장이 기다리는 바로 안내했다.
* * *
어둑한 바 한가운데, 전재형 회장이 앉아 있었다.
“회장님, 안녕하세요.”
“성국 군. 여기 앉지.”
“네.”
나는 전재형 회장과 마주 앉았다. 그러곤 주저 없이 주문을 했다.
“우유 부탁드려요.”
“저희 우유도 있긴 한데, 논 알코올 칵테일 메뉴도 있으니 한번 보세요.”
여자 종업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
“괜찮습니다. 우유 주세요.”
[알코올 안 들어간 칵테일 마실 바에는 차라리 우유가 낫다고.]
전재형 회장은 지그시 나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전재형 회장은 저번 생의 아버지였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도, 파악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확실히 부자 사이로 만났을 때와 현재는 달랐다.
전재형 회장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찰리 잡스와 선약이 있다고?”
“네….”
찰리 잡스와 전재형 회장이 거의 동시에 제안한 거였지만, 젊은 양 비서가 선약이라고 잘 말해준 모양이다.
자존심 센 전재형 회장의 성격을 잘 알아서였고, 동시에 내 거절의 이유도 적당히 만들어 줬다.
“찰리 잡스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지?”
“피터가 개인적으로 찰리 잡스와 아는 사이셔서 소개 받았어요. 아플사 구경도 갔었구요.”
“그렇구나. 예전에 할아버지가 찰리 잡스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나도 안다고, 전재형 회장. 말 돌리지 말고 어서 하고 싶은 말이나 하시지.]
나는 여자 종업원이 건넨 우유를 벌컥 들이켰다.
“성국 군. 투자는 그럼 피터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펀드 말고는 아직 없는 거지?”
“네….”
“흠… 내가 그래도 경제에 오래 발을 담근 사람으로서 조언해도 될까?”
“조언 부탁드릴게요.”
조언은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다만 걸러 들을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했다.
전재형 회장은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벤처라는 게 사실은 투자를 얼마나 확실한 기업으로부터 받는 게 중요한 거잖아. 특히 ‘페이스 노트’처럼 아이디어는 좋은데, 창업자들이 젊은이들인 경우는 대부분 비즈니스 경력이 없어서 실수를 하는 경우를 내가 종종 봤거든.”
[전재형 회장, 나 비즈니스 경력만 20년이야.]
나는 모른 척 우유를 천천히 마셨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야 드디어 본론이군….]
“성국 군, 삼전이 ‘페이스 노트’에 투자자가 되고 싶은데… 어떤가?”
역시….
늦은 시각. 다급하게 나를 보자고 할 때 어느 정도 예상한 이야기였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우유를 마셨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슬기롭게 뚫고 나갈 수 있을까?….]
전재형 회장은 끈질기게 나를 쳐다봤고, 나는 일부러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하는 척을 했다.
[조건이라도 알아볼까?]
우유잔을 내려놓고 나는 전재형 회장을 똑바로 쳐다봤다.
“회장님, 생각하시는 조건이 있으세요?”
“성국 군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참 뭐라고 이야기해야 하지… 낯설다고 해야 할까….”
전재형 회장은 괜히 딴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그룹의 아기 광고 모델로 본 게 정말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청년이 되어가는 모습도 보여주고… 더군다나 창업까지 해서 나와 이렇게 말 상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전재형 회장. 나는 이제 더는 삼전 그룹의 광고 모델이 아니야.]
전재형 회장은 옛날을 추억하곤 살짝 몸을 앞으로 구부렸다.
“성국 군, 우리 삼전이 ‘페이스 노트’의 제1 투자자가 되고 싶네. 그 말은 ‘페이스 노트’를 우리가 인수하고 싶단 말이기도 하고.”
좀 색다른 이야기가 나오길 기대한 건 내 탓인 거겠지?
결국, 삼전 그룹의 전재형 회장은 그들이 대한민국의 작은 기업들을 먹는 방식 그대로 나에게 제안을 한 것이다.
독특한 아이디어나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들을 자본으로 먹어버리는 것이 삼전 그룹이었다.
나는 우유를 한 번 더 마시고 전재형 회장을 쳐다봤다.
삼전 그룹이 미국에서야 그저 가전이나 반도체 만드는 그룹이긴 해도, 어쨌든 대한민국에서의 영향력은 무시하지 못했다.
“회장님, 저희는 피터와 이미 계약이 되어 있어서요. 그리고 마크와 전 공동 창업자라 지분을 똑같이 가지고 있어서 저 혼자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적당히 사실만을 말했다.
“삼전이 그럼 피터와 같은 조건으로 ‘페이스 노트’에 참여할 수는 없을까?”
[전재형 회장, 끈질기긴….]
그렇다면.
“회장님, 저와 마크는 투자자를 고를 때 단순히 계약 조건만 보고 고르는 건 아니에요.”
“그럼?”
“투자자가 우리와 같은 비전을 공유하는지 서로를 충분히 겪어보고 투자를 결정하거든요. 피터도 저희와 같이 사무실에서 생활하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을 겪었고요.”
나는 조금의 거짓말을 보탰다.
“성국 군 말은 삼전이 ‘페이스 노트’와 비전을 공유할 투자자인지 확인하는 기간이나 절차가 필요하단 말인가?”
“네, 회장님. 기분 나쁘게 생각지 마세요. 마크랑 제가 ‘페이스 노트’를 같이 운영하기로 하면서 정한 철칙이거든요.”
나는 적당히 마크 핑계를 댔다.
“그렇다면 우리 삼전에서도 사람을 한 명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내가 직접 가야 할까?”
“직접 오시는 게 베스트이긴 하지만 회장님께서 시간을 내실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질척거리는 걸, 전재형 회장?]
전재형 회장의 표정에서 투자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흠…. 그렇다면 태국이를 ‘페이스 노트’ 투자 책임자로 보내도 되겠나?”
[전재형 회장, 미워도 아들은 아들인 모양이지?]
전재형 회장은 태국이에게 실전 경험을 시키면서 잘하면 대어를 낚을 실적도 챙겨주려는 속셈이었다.
[전태국이라면 충분히 상대해주지….]
“회장님, 그러면 태국이 형의 인턴십을 제안드려도 될까요?”
“태국이를 ‘페이스 노트’에 인턴으로 보내란 말인가, 지금?”
“저희 회사가 보시다시피 아직 작고 또래로 이뤄진 집단이라서요. 서로 편하게 지내면서 생각을 많이 공유하거든요. 태국이 형이 마크랑 나이도 같으니까, 같이 지내다 보면 비전이나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흠… 좋네. 우리도 모험을 해보지. 태국이를 여름 방학 때, 자네 회사로 보내겠네.”
“네, 회장님.”
나는 우유를 끝까지 다 마셨다.
* * *
달칵.
호텔 방 문이 열리자 노트북 화면에 얼굴을 박고 있는 마크가 보였다.
“마크, 뭐 하는 거야?”
“어… 정우승인가 한국 배우 찾아보고 있었어.”
마크는 정우승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성국아, 나는 네가 더 잘생긴 거 같은데….”
[마크, 역시 사람 볼 줄 아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려다 얼른 내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크.”
마크는 배시시 웃었다.
“성국, 잘생겼으니까 인정. 근데 삼전 그룹에서는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우리 회사를 투자하고 싶대.”
마크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성국, 네가 삼전은 잘 알잖아. 그 회사 어때?”
“우선 그 아들을 우리 회사에 한 달 동안 인턴으로 고용하기로 했어.”
“뭐어?”
마크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투자하겠다는 사람에게 들어와서 일하라고 했으니, 놀랄 만한 상황이었다.
“우리와 삼전이 비전을 공유하는지 확인한 이후에 투자를 받아들일지 결정하기로 했고, 그 투자 책임자인 전재형 회장의 아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 비전을 확인하기로 했어.”
“성국, 그 아들이란 사람은 어때?”
“흠… 한마디로….”
[멍청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