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나는 가방을 들쳐 멨다.
이때, 오랜만에 제시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데니스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여전히 제시는 예쁘고 섹시했으며, 하버드 남학생들이 누구나 한 번쯤 사귀고 싶어 하는 여신이었다.
나는 데니스의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데니스, 진정해.”
“성국, 네가 그동안 학교를 안 와서 잘 모르겠지만, 제시 인기는 어마어마해.”
제시는 내 앞에 딱 멈춰 서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성국, 대체 그동안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었던 거야?”
“사무실에 처박혀서 일만 했거든….”
“‘페이스 노트’에 올라오는 소식으로 오랜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하는 건 좀 아쉽잖아.”
[타일러랑 사귄다고 연락 안 한 게 누군데!]
제시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코를 찌르는 진한 향수 냄새가 났다.
“성국, 다음 강의는 뭐야?”
나는 데니스를 쳐다봤다.
“데니스, 다음 강의는 뭐야?”
“점심 먹을 시간이긴 해.”
그 말을 듣자마자 제시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성국, 같이 점심 먹자. 근데 마크는 왜 안 보여?”
“마크는 아마 사무실에 갔을 거야.”
이유는 당연히 리미미가 사무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 셋이 같이 점심 먹자.”
“난 좋아!”
데니스가 얼른 대답했다.
나는 하지 말라며 데니스의 등을 세 번 두드리려다가 급히 뗐다.
[정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이 버릇을 못 고치네.]
제시가 앞장섰다.
“성국, 요 앞에 타코집 어때?”
“나야 다 좋아. 한창 먹고 자랄 나이잖아.”
[제시, 나 아직 미성년자야. 조심해.]
* * *
제시는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더니 ‘페이스 노트’에 올리곤 내게 보여줬다.
“성국, 어때? 나 친구 숫자 장난 아니지?”
“제시, 다 아는 친구들은 아니지?”
“친구의 친구잖아. 건너 다 아는 친구지, 뭐.”
“마이클 샨델 교수가 주의 줬잖아. 넌 인기 많으니까 조심해.”
“성국, 내 걱정 해주는 거야?”
[아니, 너 때문에 혹시 ‘페이스 노트’에 피해 입을까 봐 그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타코를 밀어 넣었다.
데니스는 황홀한 눈으로 제시를 쳐다봤다.
[다들 혈기 왕성한 20대군. 연애 그거 별거 아닌데, 왜 다들 그걸 못 해서 안달인 거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국, 근데 너… 이제 학교에 안 나올 작정이야?”
“작정은 아니었는데, 일이 바빠서….”
“아까 마이클과 하는 대화 들으니까, 사업하느라 학교 그만둔다는 거 아니었어?”
“어… 그렇게 될 것 같아.”
어차피 우리 사무실이 실리콘밸리로 옮기는 것은 ‘페이스 노트’를 통해서 곧 공개할 예정이었다.
나는 타코를 베어 물면서 제시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나랑 어찌할 생각 따위는 깨라고!
“제시, 우리 곧 실리콘밸리로 이사해. 자연스레 학교도 못 나올 거고, 숙소로 그쪽으로 다 옮길 거야.”
“성국….”
제시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한동안 말도 없었다.
“제시, 우리에게는 ‘페이스 노트’가 있잖아. 서로 소식은 다 알 수 있어.”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아하, 포럼 때 결정 난 거라 진짜 며칠 안 됐어. 데니스 다음으로 네가 제일 먼저 아는 거야.”
“그래도….”
제시는 한 입 깨문 타코를 접시 위에 다시 내려놨다. 기운 없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제시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여자들이 이렇게 쳐다볼 땐 항상 무서웠는데….]
나는 살짝 뒤로 몸을 뺐다.
“성국, 이번 주말부터 너 어디에도 가면 안 돼.”
“무슨 소리야?”
“내가 파티 주최할 거니까, 넌 꼭 와야 해.”
“제시, 고마운데… 다음 달에 아플사에 가서 사무실도 보고 숙소도 구해야 해서 주말에 여기 있을지 장담 못 해.”
“그럼, 안 되는데….”
이때, 데니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제시, 너 매주 파티 열지 않아? 그냥 평소처럼 열면 되고, 성국이 시간 될 때만 가면 되잖아.”
“그건 그냥 친목 파티이고… 난 성국이 송별 파티를 길게, 아주 많이 해주고 싶었다고.”
나는 타코를 한 입 먹고 오물거렸다.
제시는 나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파티 계획을 세웠고, 나는 왜 다시 태어나도 여자를 이해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했다.
데니스가 옆구리를 푹 찔렀다.
“성국, 뭘 그렇게 생각해?”
“데니스, 네 영화의 로맨스는 다 새드엔딩이었으면 좋겠어.”
“왜?”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는 일도. 여자가 남자를 이해하는 일도 불가능한 일인 것 같거든.”
나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국, 넌 아직 어려서 그래.”
[데니스, 내가 말이야. 벌써 인생 2회 차라고! 연애도 너보다 많이 했어!]
물론 데니스는 남녀 관계의 이 진리를 뒤늦게 깨닫고 모든 영화마다 남자 주인공이 헛발질하거나, 사랑하다 헤어지는 아주 바람직한 엔딩을 만든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인가? 또 민국이가 미국 보내달라고 떼쓰나….]
예상과 달리 피터였다.
“피터, 무슨 일이세요?”
- 성국, 아플 캠퍼스 근처에 끝내주게 좋은 숙소가 나왔어. 방 세 개짜리 콘도인데, 욕실은 두 개고. 리미미 씨만 괜찮다면 여기 빌리고 싶은데….
“피터, 근데 숙소 비용이 너무 비싸면 저희가 감당이 안 되는데요.”
- 걱정하지 말게. 이것도 다 투자 아닌가. 거기다 이 비싼 실리콘밸리에서 사무실을 공짜로 얻었는데, 내가 이 정도 투자는 해야지. 우리 직원이 숙소 사진이랑 위치 사진 메일로 보낸다고 하니까, 상의해보고 연락 주게. 이렇게 좋은 데는 금방 나가거든.
“네, 금방 연락드릴게요.”
나는 얼른 남은 타코 하나를 들고 일어났다.
“성국, 벌써 가게?”
“어, 팀원들이랑 상의할 게 있어서. 데니스랑 마저 먹어. 나 먼저 갈게.”
“성국, 이번 주부터 너 송별회야. 시간 되면 꼭 와야 해.”
“어, 알았어.”
나는 대충 대답을 하고 사무실로 뛰어갔다.
* * *
달칵.
문이 열리자 마크와 리미미가 각자의 컴퓨터만 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점심은 먹었어요?”
“마크는 아직 안 먹고, 저는 먹었어요. 사장님.”
“근데… 왜 따로 먹었어요?”
“마크가 햄버거 먹자고 해서, 제가 다시는 햄버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면박 줬더니 마크가 삐졌거든요.”
“미미 씨, 내가 삐지다니. 난 그냥 햄버거 먹은 지도 오래고 호의 차원에서 한 말인데, 미미 씨가 톡 쏘니까 그랬죠.”
“제가 톡 쏜 게 아니라 북조선 말투가 원래 이래요, 마크.”
“잠깐!”
나는 얼른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크, 리미미 씨. 우리가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성국, 뭔데?”
“피터가 연락해 왔는데, 우리가 머물 아플 캠퍼스 근처에 마음에 드는 숙소가 나왔대. 방 세 개 콘도라는데, 우리보고 상의해서 얼른 알려 달래. 이런 좋은 매물은 금방 나간다고.”
리미미가 난감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사장님, 전 좋은 숙소는 못 구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도 반지하 살았잖아요.”
“피터가 사무실 비용 굳었다고 숙소까지 렌트해 주겠대요. 그러니 걱정 말고 우선 사진이나 봐요.”
나는 얼른 노트북을 켜서 메일을 확인했다.
피터 회사의 직원이 상세한 사진을 여러 장 보냈다.
그리고 피터가 구한 숙소는 생각보다 더 훌륭한 곳이었다.
거실과 주방도 널찍했고, 심지어 테라스까지 있었다.
거기다 방 두 개는 욕실을 가운데 두고 이어졌고, 나머지는 게스트룸처럼 방과 욕실이 아예 따로 있었다.
[내가 저번 생에서 혼자 살던 뉴욕의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성국, 우리 둘이 욕실 가운데 있는 이 방 하나씩 쓰고. 동떨어진 방은 리미미 씨가 쓰면 될 것 같은데, 어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리미미 씨는 어때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좋죠, 사장님! 북조선에서도 이렇게 좋은 집에서는 살아본 기억이 없어요!”
리미미는 좋을 때도 목소리 톤이 거칠어졌다.
내가 마크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마크, 리미미 씨 말대로 북조선 말투가 좀 거칠어.”
“이따 한국 식당이나 가자고 해야겠어. 사과의 의미로.”
“마크, 연애 금지야.”
“성국, 너도 같이 가게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마크는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했다.
[마크, 어쭈? 이제 짝사랑도 서서히 식어가는 건가….]
“성국, 너랑 나랑 혼자 방 쓰는 게 대체 얼마 만이지?”
“마크, 난 혼자 방 쓴 기억이 별로 없어.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처음 태어났던 곳은 진짜 이 사무실보다도 작은 원룸이었어. 거기서 세 식구가 살다가 심지어 남동생까지 태어났다니까….”
마크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성국, 나 그 이야기 한 번만 더 들으면 백 번이야.”
“사장님, 저도 이 사무실에 온 지 몇 달 안 됐는데도 벌써 열 번은 들은 것 같아요.”
[하아…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러니 혼잣말을 끊을 수가 없지….]
나는 씁쓸하게 차가운 우유를 벌컥 마셨다.
이때, 리미미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를 쳐다봤다.
“사장님, 근데 여기 금발의 미인이 왜 사장님 송별 파티를 매주 연다고 광고하나요?”
“설마… 제시야?”
마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래, 짝사랑이 좋은 점이 마음에 여러 여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지…. 마크,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
“아까 수업 때 만나서 실리콘밸리로 갈 것 같다고 이야기했거든. 그랬더니 매주 여는 파티를 그냥 내 송별회를 주제로 또 계속 열겠대.”
“사장님, 근데요.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리미미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네, 뭐든 물어보세요.”
“미국에서 파티 하면 보통 어떻게 노나요?”
“그냥 뭐, 싸구려 술 마시고, 음악에 맞춰 춤추고. 구석에서는 이런저런 주제로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하고. 그러다 눈 맞으면 손잡고 나가고 그러죠. 물론 전 안 그러고요. 마크는 못 그러고요.”
“성국!”
마크가 버럭 했다.
“아하….”
리미미가 뭔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리미미 씨, 파티 한 번도 안 가봤어요?”
“네, 사장님. 탈출해서 먹고살려고 알바만 하루에도 몇 개씩 뛰다 보니 파티 같은 데는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성국아, 그럼 이번 주말에는 특별한 일도 없는데… 우리 같이 제시네 파티 갈까?”
“제가 가도 됩니까, 사장님?”
리미미는 처음 보는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 눈을 보고 거부하면 지옥에나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금요일 저녁에 일 마치고 다들 같이 가죠.”
“사장님, 파티 갈 때 무슨 옷 입나요? 시상식처럼 드레스 입고 가나요?”
“아니요. 전 그냥 이렇게 입고 갈 거고요.”
“미미 씨, 저도 체크 셔츠 입고 갈 거예요.”
“리미미 씨, 우선 패션테러리스트 두 명이 입장하니 뭘 입고 가도 괜찮을 거예요.”
“드레스코드는 맞춰야죠!”
리미미는 얼른 ‘페이스 노트’에 친구가 여는 파티에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댓글이 주르륵 달리는 것 같았다.
“자, 그럼. 피터한테 그 숙소로 정했다고 말할게요.”
“사장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리미미는 댓글에 정신이 이미 팔린 상태였다.
“난 찬성이야. 성국!”
나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숙소였다.
나는 얼른 피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피터, 만장일치 찬성입니다. 너무 훌륭한 숙소예요!
곧 피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 당장 계약할게!
나는 숙소 사진을 다시 한번 쭉 훑었다.
찰리 잡스가 빌려주기로 한 아플 캠퍼스의 사무실. 그리고 숙소까지 정하고 나니 이제 정말 점점 실리콘밸리에 가는 것이 실감 났다.
[실리콘밸리라….]
IT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꿈꾸는 그곳에 드디어 내가 입성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