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2화
늦은 시각.
‘페이스 노트’ 사무실.
오늘은 간만에 일찍 퇴근한 마크와 미미 대신에 나와 데니스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바로 데니스의 시나리오 때문이었다.
데니스는 머리를 쥐어짰다.
“성국, 왜 이렇게 초조하기만 하지. 이야기가 도대체 나오지가 않아.”
“데니스, 맥주 한잔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봐.”
“하아….”
데니스는 오늘 저녁에만 벌써 열 번이 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가득 찬 맥주 캔을 눈으로만 바라봤다.
[하아… 알코올 당기는 밤이지만.]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나는 맥주를 꺼내서 데니스에게 건넸다.
“성국아, 넌 우유라도 마시지 그래?”
[우유도 물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데니스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나를 빤히 쳐다봤다.
“성국, 난 정말 재능이 없나 봐.”
“데니스, 그 이야기 한 번만 더 하면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어떻게 하버드까지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보다 한 번 정도 적게 하는 것 같아.”
“미안… 나도 답답해서.”
“데니스, 오늘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시나리오 방향성 잡으려고 모인 거잖아. 이야기를 하나둘 풀어 나가 보자. 지금 어디까지 썼어?”
“우선 <채찍>의 캐릭터는 그대로야. 너랑 이야기한 대로 예술대학에 막 새로 들어온 드럼 연주자가 악독한 스승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그 이야기 말이야.”
[흠… 천기누설 좀 해야 하나… 그럼, 먼저 계약 관계부터 정리해야겠군….]
물론 난 데니스가 만드는 영화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데니스, 정말 나랑 같이 시나리오 쓰고 싶어?”
“당연하지.”
“그럼, 우리 계약서를 작성하는 게 어떨까?”
“어?”
데니스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데니스, 난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계약 관계를 처음부터 분명히 하고 일을 시작하는 게 좋다고 봐. 마크와 나를 봐. 우린 이미 고등학교 때 서로 지분 이야기까지 다 해놔서 지금 서로를 믿고 지지하면서 ‘페이스 노트’를 만들고 있잖아.”
[안 그랬으면 마크가 내 뒤통수 쳤을 거야.]
데니스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미셸이랑도 그 문제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싸우긴 했어.”
“근데, 미셸 아이디어는 완벽하게 걷어냈어?”
“응….”
데니스의 대답이 석연치 않았다. 곧 데니스는 변명처럼 말을 이었다.
“사실 미셸의 아이디어는 별거 아니었어. 남자 주인공 친구 역할을 하나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거든. 친구가 사실 엄청난 실력자인데, 그 악독한 선생님 밑에서 드럼 치다가 인생 망친 거야. 남자 주인공은 그걸 보고 자기 드럼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거든…. 이런 아이디어는 누구나 낼 수 있잖아.”
“누구나 낼 수 있는데, 이미 넌 그 아이디어를 이용했고 다 걷어내지도 못한 거지?”
“그게… 사실은 맞아.”
데니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지만, 나중에 <채찍>이 극장에 걸려서 흥행하기 시작하면 미셸이 얼마든지 소송을 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얼른 데니스에게 제안을 했다.
“데니스, 내가 보기에 미셸의 아이디어는 흔하긴 하지만 <채찍>에는 얼마든지 등장할 수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일 것 같아. 미셸의 아이디어 때문에 발목 잡혀서 이 시나리오가 계속 답보 상태인 것 같은데… 내가 해결할게. 대신, 나와는 계약하고 시나리오 시작하자.”
“성국, 어떻게 해결할 거야?”
“미셸에게 너와의 시나리오 작업 동안 나온 모든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살 거야. 시나리오에 당연히 미셸의 이름이 오르는 일은 없을 거고. 만약 미셸이 이 시나리오가 영화화된 후에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린다면….”
[솔직히 알려도 데니스의 명성에 지장을 줄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우리가 지불한 금액의 100배를 지불하라는 계약서를 제시할 거야. 데니스, 네가 미셸의 상황을 잘 아니까 물을게. 미셸이 지금 돈이 필요해?”
“어… 잠시만….”
데니스는 얼른 노트북을 열어서 미셸의 ‘페이스 노트’를 확인했다.
“흠… 사실 미셸이 준비하던 토크쇼 일정이 내년으로 밀리면서 경제적으로 그렇게 좋지는 않아.”
미셸이 낸 아이디어는 솔직히 별 거 아니었지만, 데니스가 그 아이디어에 발목 잡혀서 끙끙거리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데니스, 내가 미셸이랑 연락해서 해결할게. 그리고 우리 계약 조건은 이거야. 나는 미셸의 아이디어를 사는 것으로 투자를 시작한 거니까, 이제부터 네 영화의 정식 투자자 중 한 명이고, 후에 <채찍>이 영화화되면 난 당연히 그 부분에 대해서 권리를 행사하고 싶어. 괜찮아?”
“성국, 네가 내 시나리오에 도움을 주는 건데. 공동 작가로라도 이름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데니스, 난 너랑 이야기만 나눌 뿐이고 쓰는 건 네가 다 쓸 거잖아. 난 투자자로 충분해.”
나는 데니스가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흥행하면 투자자가 돈은 다 가져간다고….]
데니스는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이었다.
“성국… 다 좋은데… 그러려면 변호사도 사야 하고….”
데니스는 내가 돈 얼마로 <채찍>의 투자자가 되는 것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어서 미셸과의 관계를 정리하고픈 마음뿐이었다.
“데니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걱정하지 마.”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 * *
나는 미셸에게 ‘페이스 노트’를 통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미셸이 데니스의 시나리오에 낸 아이디어를 1만 달러에 사겠다는 내용이었다. 천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그리고 계약서 내용도 요약해서 보냈다. 돈을 더 달라면 협상의 여지는 있었지만, 먼저 밑밥을 깔 필요는 없었다.
- <채찍> 작업을 하면서 낸 아이디어 일체를 1만 달러에 넘긴다.
- 후에 영화화되었을 때, 어떤 주장도 하지 않는다.
- 이 내용을 후에 공익적, 상업적, 그 어떤 용도로든 밝힐 시에는 받은 금액의 100배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데니스가 옆에서 초조하게 계속 맥주를 마셨다.
“성국, 미셸이 수락할까?”
“데니스, 미셸은 나보다 네가 잘 알잖아.”
“그렇지….”
데니스는 맥주를 하나 새로 더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미셸이 수락할지 안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미셸은 길게 고민하지는 않을 거야. 결정을 엄청 빨리 내리거든. 그리고 그 결정을 밀고 나가고…. LA에서 온 제안도 거의 10분도 안 돼서 결정하고, 나에게도 같이 떠나자고 제안한 거야.”
데니스의 말대로 미셸에게서 딱 30분 후에 답이 왔다.
나는 얼른 메시지를 클릭했다.
- 좋아. 1만 달러에 팔게!
“데니스, 미셸이 수락했어.”
“역시….”
데니스는 조금 씁쓸한 얼굴이 됐다.
“데니스, 이제 지겨운 족쇄에서 해방됐는데 속 시원하지 않아?”
“솔직히 미셸의 아이디어가 천만 원이나 줘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고. 그렇게 쉽게 대답했다는 것은 내 시나리오가 영화화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 아닐까?”
데니스의 자존감은 지금 지하를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데니스, 괜한 걱정은 하지 마. 우선은 이제 넌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시나리오 작업만 하면 되는 거야.”
“고마워, 성국.”
[10년 뒤엔 내가 더 고마울 거야.]
나는 얼른 미셸에게 답을 보냈다.
- 계약서 내일 중으로 변호사 통해서 보낼게.
- 고마워, 성국. LA에 놀러 오면 연락해!
- 알았어, 미셸. LA에서 잘 지내길 바랄게.
우리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나는 늦은 시각이지만, 계약서를 작성해서 효진 그룹의 변호사에게 메일로 보냈다. 그리고 기지개를 쭉 켰다.
데니스는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겼다.
“성국, 우리도 이제 기숙사 들어가자.”
“그래.”
“근데, 성국. 어째 나보다 네가 더 속 시원한 얼굴이야?”
“친구의 걱정을 덜어줘서 그래.”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빙긋 웃었다.
[<채찍>에 숟가락 얹기 성공!]
* * *
드디어 공포의 금요일이 다가왔다.
마크가 이른 아침부터 체크 셔츠 세 개를 들고 우리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막 일어나서 바지를 입고 있던 데니스가 마크를 향해 베개를 던졌다.
“마크, 노크라도 좀 해!”
“아, 미안. 성국, 데니스. 나 급해서 그래. 이 세 개 셔츠 중에서 뭐가 가장 괜찮아?”
빨강, 초록, 파란 체크 셔츠였다. 더군다나 체크의 간격마저 모두 똑같았다.
나는 이불을 머리 위까지 다시 올렸다.
[판교 스타일 잘못 전수했어….]
막 후회가 되는 참이었다.
마크는 얼른 이불까지 내렸다.
“성국, 그러지 말고 좀 봐줘 봐.”
“데니스, 예술가가 좀 봐줘.”
나는 데니스에게 마크 셔츠 고르는 일을 떠넘겼다.
“마크, 내가 보기엔 오늘은 초록이야.”
“초록? 그렇지? 나도 그래. 오늘은 초록이 좋은 것 같아.”
마크는 흰색 티 위에 초록 체크 셔츠를 걸쳤다.
“오늘 파티 복장 끝!”
“마크, 그렇게 좋아?”
“성국, 우리 그동안 ‘페이스 노트’에 파묻혀 있어서 파티가 도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파티가 뭐 별거라고… 나이 들면 다 시끄러워서 싫어져.]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성국, 너는 뭐 입을 거야?”
“마크, 네가 색만 다른 체크 셔츠를 입듯이 나는 세탁하고 안 입은 회색 후드 티를 입을 거야.”
데니스가 옆에서 웃어댔다.
“정말 너희 둘이 천생연분인 것 같아. 둘이 사귀지 그래?”
그 말에 나는 베개를 데니스에게 던져버렸다.
쿵- 그 바람에 바지를 입던 데니스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나와 마크, 데니스는 기숙사 방에서 데굴데굴 웃어댔다.
[젊을 땐 이런 것도 다 추억이지….]
* * *
달칵.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리미미가 우리를 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마크.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의아한 눈으로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 씨, 오늘 의상이 왜 그래요? 어제까지 ‘페이스 노트’에 파티 의상 열심히 찾아봤잖아요.”
리미미의 의상은 평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귓불 가득한 피어싱. 거기다 너덜너덜한 검은색 티셔츠에 데님.
한마디로 나와 마크, 리미미는 그냥 평소 차림이었다.
리미미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와 마크를 번갈아봤다.
“사장님, 마크. 두 분도 평상시랑 똑같은데 왜 저보고만 그러세요?”
“미미 씨, 전 오늘 아침에 엄청 신경 쓴 거라고요. 초록색 체크 고르려고 아침부터 성국이네 방 오갔는데요.”
“뭐, 초록색이나 파랑이나. 체크가 체크죠. 저도 나름 신경 썼어요. 이거 어제 새로 산 티셔츠예요. 메탈리카 버전으로요.”
[우리는 일이나 열심히 해야 되겠군….]
나는 냉장고에서 모닝 우유를 꺼냈다.
“우리는 일 열심히 하다가 다 같이 파티에 가죠.”
“네, 사장님!”
“참, 리미미 씨. 집은 정리됐나요?”
“네, 여름 되기 전에 나갈 것 같아요. 짐도 별로 없어서 실리콘밸리로 가는 거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나는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이때, 젊은 양 비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지?
나는 복도로 나가서 젊은 양 비서의 전화를 받았다.
“철수 형, 무슨 일이세요?”
- 성국아, 태국 도련님이 너희 회사 가서 인턴 하는 것 말이야.
[혹, 자존심 상해서 안 한다고? 그럼 난 땡큐지. 자연스레 삼전 투자도 거절하는 거잖아.]
나는 젊은 양 비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전재형 회장님께서 너희가 실리콘밸리로 이주하면 지낼 숙소 위치를 물어보셔서… 혹, 알려줄 수 있어?
“그건 왜요, 형?”
- 그 근처에 숙소를 잡으실 모양이야.
“흠… 제가 형에게 알려드리지 않으면 형이 좀 곤란하겠죠?”
- 내가 크게 곤란한 건 없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재형 회장의 성격상 분명 마음에 상처 되는 말 한 마디쯤은 할 것이다.
능력이 없다거나, 그 돈 받고 그 일도 못 한다거나. 전태국의 성격이 다른 곳에서 오는 건 아니니까.
[아마 나도 그랬겠지….]
나는 씁쓸함을 속으로 삼켰다.
젊은 양 비서는 얼른 변명을 했다.
- 하지만 성국아, 너도 알다시피. 전재형 회장님이 나서면 어떻게든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너도 지금 편하게 알려주는 게, 어쨌든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내가 이런 말 전해서 미안해.
“형이 뭐가 미안해요. 얼마 전에 숙소 구했는데, 알려 드릴게요. 그 근처로 잡으세요.”
- 응. 고마워.
툭, 전화를 끊고 나는 피터가 구한 숙소 위치를 젊은 양 비서에게 메시지로 전했다.
[집을 우리 숙소 근처로 구하겠다고? 흠… 어디 한번 해보시지.]
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