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뒤에 서 있던 스튜어디스가 우리 형제를 보곤 흐뭇하게 웃었다.
“형제애가 남다르시네요. 보기 좋아요.”
민국이가 내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속삭였다.
“형, 잘해봐.”
“민국아, 미국에서 나랑 데이트하면 법에 걸려.”
“형? 그게 무슨 소리야?”
민국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얼른 스튜어디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했다.
“암튼 여러 가지로 감사해요. 여기 계시는 동안 연락 주시면 저희가 밥 한번 살게요.”
“지금 사시면 안 돼요?”
“비행 안 피곤하세요?”
“피곤하지만, 배가 더 고파서요.”
[흠… 작업인가?]
고마운 분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참, 제가 아직 미성년자라서요. 술 안 파는 음식점에 가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나는 적당히 에둘러 말했다.
스튜어디스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민국이가 하버드생이라고 했는데… 미성년자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좀 월반을 많이 해서요. 한국 나이로는 14살이에요.”
“네에?”
스튜어디스는 거의 경악을 했다.
[뭐, 이런 일쯤은 익숙하다고.]
하버드 교정에서 내 번호를 따려는 여자들.
‘페이스 노트’로 연락처 달라는 여자들.
식당과 카페 기타 등지에서 내게 연락처를 달라는 여자들에게 이 말을 하면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나와 민국이는 똑같이 턱을 매만졌다.
“민국이가 그 이야기는 안 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하하하.”
스튜어디스는 유쾌하게 웃었다.
“어머, 14살?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네….”
“어쩐지. 민국이가 형아가 ‘저스트’가 나온 육아 프로그램의 아기라고 하기에… 하버드생이면 나이가 좀 안 맞는데. 그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보니 키도 크고 해서 내가 잘못 생각했나 했지.”
“죄송해요. 민국이 녀석이 워낙 장난기가 많아요.”
“장난 아니라고, 형아. 누나, 우리 형아 멋있지 않아요?”
민국이는 자랑스럽게 나를 소개했다.
“멋있어. 근데 나랑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안 되겠어, 민국아.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치이… 형아, 미국 드라마 보면 중딩도 막 연애하던데, 형은 왜 안 되는 거야?”
“미국에서는 성인이 미성년자랑 사귀는 건 안 되는 거야, 전민국.”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민국이는 조금 툴툴거렸다.
“하아… 누나, 친절해서 좋았는데.”
“민국아, 그럼 형이랑 누나랑 친구하면 되지.”
“진짜요?”
“그럼.”
스튜어디스는 끝까지 친절하게 민국이를 달랬다.
“누나, 그럼 우리 형이랑 오늘 저녁에 밥 먹어요. 우리 형이요. 돈도 잘 벌어요.”
스튜어디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올려다봤다.
“근데… 민국이가 말할수록 미스터리네. 이 나이에 하버드생인데, 돈도 벌어?”
“그게 좀 길어요. 감사의 의미로 제가 저녁 사면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래…. 민국아 뭐 먹고 싶어?”
스튜어디스의 물음에 민국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당겼다.
“형아… 누나가 먹고 싶은 게 내가 먹고 싶은 거야.”
[이 녀석, 완전 선수잖아.]
* * *
우리는 시내의 작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민국아, 진짜 누나 먹고 싶은 거 먹어도 괜찮아?”
“네! 누나 나도 파스타 먹을 줄 알아요.”
“근데 내가 동생들한테 얻어먹어도 되나 모르겠어.”
“은지 누나, 우리 형아 부자예요!”
스튜어디스는 이름은 정은지였고, 이 일을 한 지는 5년 정도 됐다고 레스토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참, 성국아. 정말 무슨 사업하는 거야?”
“혹시 ‘페이스 노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니….”
아직 ‘페이스 노트’가 한국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한국에서 하는 도토리월드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랑 고등학교 동창인 마크가 개발했다가, 이제 제법 커지는 중이에요. 투자도 받고요.”
“혹시 그래서 이쪽에서 지내는 거야?”
“네. 학교 근처 사무실에서 있었는데, 아무래도 실리콘밸리 쪽으로 와야 비슷한 일하는 사람들끼리 좀 더 교류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제 슬슬 의문들이 하나씩 풀리네. 이 외모에 미성년자인 이유도. 거기다 하버드생이 난 왜 샌프란시스코 쪽에 있지? 이런 생각도 했거든.”
“저, 사기꾼 아니에요.”
“알아. 기사 다 봤잖아.”
민국이 녀석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나온 기사들을 모두 은지에게 보여줬다.
은지는 빙긋 웃더니 봉골레를 포크로 돌돌 말았다.
민국이는 그 모습을 따라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았다.
“누나, 이렇게 먹는 거예요?”
“응.”
민국이를 바라보는 은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은근히 은지에게 물었다.
“누나, 민국이요. 꿈이 가수거든요.”
“정말?”
“H.A.T 같은 가수가 되는 게 소원인데, 누나가 보기에 어떠세요?”
“공항에서 보는 순간 민국이가 한눈에 들어오긴 했어. 우리 연예인 많이 보잖아. 솔직히 너나 민국이나 외모로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손에 꼽을 정도야.”
[뭐라고? 지금 나랑 민국이 녀석이랑 비교하는 거야?]
은지는 계속해서 나와 민국이의 외모에 대해서 떠들었다.
“성국이는 뭐랄까. 약간 차가우면서 근접하기 힘든 외모거든. 너무 잘생겨서….”
[내가 그런 아우라가 좀 있지.]
“근데 민국이는 잘 생기기도 했는데, 굉장히 친근한 느낌이 들어. 장난기도 많아 보이고, 왠지 말 걸어도 친절하게 답해줄 것 같고….”
민국이는 뭐가 좋은지 히죽거렸다.
[전민국, 네가 나보다 못생겼단 소리야.]
“만약 내가 미팅 나갔는데, 성국이랑 민국이처럼 잘생긴 남자들이 있다면 당연히 난….”
[나겠지.]
“민국이 고를 것 같아.”
“뭐라고요?”
놀라서 그만 속마음이 나오고 말았다.
은지는 유쾌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성국아, 왜 이렇게 놀라?”
“형, 봐봐. 내가 형보다 인기가 더 많다니까.”
“…….”
나는 굳은 얼굴로 파스타 면을 호로록 넘겼다.
“성국아, 넌 정말 너무 잘생겨서 접근하기가 어려워. 거기다 민국이는 이렇게 살가운데, 너는 좀 과묵하잖아.”
“누나, 우리 형아 진짜 딱 자기 할 말만 하고요. 유머도 없고 짤도 없어요.”
[민국아, 넌 이따가 형이 얼마나 짤 없는지 스케줄표 보면서 이야기해보자.]
나는 묵묵히 파스타를 호로록 먹으면서 조잘거리는 민국이를 살폈다.
잘생겼지만 귀여운 이미지. 살가운 성격이라….
[이런 이미지의 아이돌도 한 명 필요하지.]
은지는 민국이랑 이야기를 나누다 나를 쳐다봤다.
“성국아, 나도 ‘페이스 노트’ 가입해도 돼?”
“네, 누나. 친구분들한테도 많이 홍보해 주세요.”
“당연하지.”
* * *
숙소에 도착한 전태국은 방문자 한 명 없는 자신의 ‘페이스 노트’를 살피며 예쁜 여자들의 계정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뒤에서 젊은 양 비서가 햄버거와 음료를 준비해서 전태국에게 내밀었다.
“도련님, 좀 드시면서 연구하세요.”
“겨우 햄버거야?”
“이쪽에서 굉장히 유명한 햄버거집에서 사 온 거예요. 아마 ‘페이스 노트’에서 일하시다 보면 자주 드시게 될 거예요.”
“진짜 저렴하긴….”
이때, ‘페이스 노트’ 화면에 비행기에서 본 정은지의 사진이 떴다. 막 가입한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이것 봐라? 나 보려고 가입했구만….”
전태국은 얼른 정은지에게 친구 신청을 했다.
* * *
나는 은지에게 식당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페이스 노트’ 친구 맺기를 알려줬다.
“제가 누나한테 신청했으니까, 수락하면 돼요.”
이때, 은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야, 전태국….”
슬쩍 보니 어느새 전태국이 번개와 같은 속도로 은지에게 친구 신청을 한 상태였다.
“누나, 그냥 거절하시면 돼요.”
“아, 그래?”
“당연하죠.”
“오케이!”
은지는 내 친구 신청을 금방 수락했다. 그리고 전태국의 친구 신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 * *
“이게 뭐야? 어? 거절했어?”
전태국은 당황한 얼굴로 정은지의 ‘페이스 노트’에 들어갔다.
그러자 전성국의 이름이 새로운 친구 목록에 바로 업데이트됐다.
“뭐야, 난 거절하고 전성국은 바로 친구 맺기 한 거야? 정말 이것들이. 내가 누군 줄 몰라서 그러나….”
“도련님, 뭔가 착오가 있나 봐요. 우선 저녁 드시고 천천히 해결하세요.”
“아니, 왜 다들 친구 신청하는데 거절인데? 아빠한테 말해서 미국에 삼전 광고 더 때리라고 해야겠어. 내가 분명히 삼전 그룹의 후계자라고 자기 소개도 해놨는데, 미국애들도 다 거절하잖아!”
젊은 양 비서는 슬쩍 전태국의 ‘페이스 노트’를 쳐다봤다.
자기소개에는 삼전 그룹의 후계자.
그리고 대대로 가족들과 찍은 정형화된 가족사진이 올라와 있었고, 프로필 사진에는 누가 봐도 사진관에서 돈 주고 찍은 증명사진 같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한 마디로, 누가 봐도 찐따 같아 보였다.
젊은 양 비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양 비서, 맥주 사뒀어?”
“네, 도련님. 가져다드릴까요?”
“근데… 아까 성국이네 숙소에 보니까 여자 한 명 있던데. 같이 마시자고 할까?”
“오늘은 그냥 편히 마시고 쉬시는 게 어떨까요? 정식 인사 겸 회식 자리는 제가 출근하면 바로 마련하겠습니다.”
“하아… 뭐,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전태국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툴툴거리며 맥주를 땄다.
* * *
은지는 몇 번이고 택시 기사에게 나와 성국이를 부탁했다.
“기사님,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성국아, 민국아. 무슨 일 있으면 누나한테 꼭 연락하고!”
[정은지, 나 어른이야. 영어도 내가 더 잘한다고!]
“누나, ‘페이스 노트’로 안부 물을게요.”
“응. 집에 들어가면 꼭 ‘페이스 노트’에 잘 들어왔다고 남겨야 해. 알았지?”
“네!”
은지는 택시가 코너를 돌 때까지 우리를 지켜봤다.
“형아, 근데 여기 깜깜한데 나 하나도 안 졸려.”
“시차 때문이야.”
실리콘밸리와 한국은 16시간 정도 시차가 있었다.
민국이는 택시를 타고 숙소로 가는 동안 내내 창밖을 신기한 눈으로 훑었다.
“형, 여기 너무 신기해. 나, 이제부터 여기서 정말 공부하는 거야?”
“당연하지. 민국아, 형이 너 여름방학 어학연수 계획 다 짜놨어.”
“어?”
민국이가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다.
“형아, 다 짜놓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레이스가 소개한 최고의 어학원이야. 그리고 어학원에서 집에 돌아오면 널 개인적으로 가르쳐줄 선생님도 구해놨어.”
“형… 집에서도 공부하라고?”
“민국아, 형이랑 계약했잖아. 난 공부 못하면 절대 데뷔 안 시킬 거야.”
“형아… 난 형아가 너무 좋은데. 형아 옆에 있고 싶어서 미국 온 건데….”
민국이는 어깨를 잔뜩 내리고 우울한 목소리로 연기를 했다.
[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할 줄 알고?]
이미 공항에서 민국이와 지희의 연기에 당한 적이 있었다.
“민국아.”
“으응? 형아.”
“더는 자비란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
민국이의 두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나는 민국이에게 스케줄표를 내밀었다.
“민국아, 이게 너의 여름방학 스케줄표야.”
민국이는 자신의 스케줄표를 받아들고는 경악했다.
“형… 이건 너무하잖아. 아침 9시까지 학원에 가서 저녁 6시에 끝나면, 난 언제 놀라고!”
“전민국, 너 놀려고 미국 온 거야?”
“그게 아니라… 나 아직 어린이잖아.”
“전민국, 형은 그 나이에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고 엉덩이 땀띠 나게 공부했어. 놀고 싶은 거 다 놀고 언제 공부하려고 그러는 거야?”
민국이는 스케줄표를 보면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아무래도 형 동생으로 태어난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 같아.”
민국이는 나라가 망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