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집안을 일으켜세우겠습니다-147화 (147/231)

제147화

“여기가 형이 지내는 숙소야.”

나는 민국이의 캐리어를 들고 숙소의 문을 열었다.

민국이는 축 늘어진 어깨로 발을 질질 끌며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거실에서 햄버거를 먹고 있던 마크와 리미미가 민국이를 반겼다.

“민국아! 나 마크야, 기억나지?”

“네에….”

민국이는 힘없이 대답했다.

“성국, 민국이가 왜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거야?”

“오는 택시 안에서 내가 여름 방학 스케줄표를 보여줬거든.”

“기운 없을 만도 하네….”

그리고 나는 리미미를 소개했다.

“민국아, 여기는 어학원 다녀오면 너 공부 관리해주실 리미미 씨야. 우리 회사 직원이시기도 해.”

“반가워, 민국아.”

리미미는 친근하게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아, 네…. 근데 이름이 꼭 북한 사람 같네요.”

“응. 나 북조선 출신이야.”

그 말에 민국이의 눈에 또다시 지진이 일었다.

“진짜 북한 사람이세요?”

“응. 내가 북조선에서 초중고대학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았거든. 북조선에서 김일성 대학 가기는 미국에서 하버드 대학 가기보다 어려워. 내가 북조선에서 교육받은 방식 그대로! 민국아, 관리해줄게!”

“혀엉!”

민국이는 거의 울듯이 내게 매달렸다.

“혀엉, 나 형 말 잘 들을게. 북한 무서워!”

“리미미 씨는 안 무서워. 말만 잘 들으면….”

“형,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응?”

“민국아, 네가 영어 공부하고 싶다고 엄마, 아빠한테 졸랐다며?”

“응….”

민국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미국에서 공부하려면 한 달에 얼마나 드는 줄 알아?”

“히잉. 모르지.”

민국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아빠가 아침부터 가게와 회사에 출근해서 뼈 빠지게 버신 돈으로 너를 이렇게 보내신 건데, 네가 영어도 제대로 못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겠어?”

“그게….”

“안 되지?”

“어엉. 형아.”

민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형이 준 스케줄표대로 열심히 따라 하면 너튜브라는 회사에 데리고 갈게.”

“형아, 너튜브가 뭐야?”

“자기가 만든 영상을 누구나 올릴 수 있는 플랫폼이야. 민국아, 앞으로는 가수가 되려면 자신이 만든 영상을 직접 올려서 대중들에게 먼저 선보여도 성공할 수가 있을 거야.”

“진짜, 형아?”

“형이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어?”

“아니!”

민국이는 그제야 기운을 차렸다.

“공부 열심히 할 거지?”

“형아, 그럼 나 그 회사 구경하고 내가 춤추는 거 영상 올려도 돼?”

“당연하지. 단, 형아한테 먼저 보여줘야 해.”

[잘못했다가는 네 인생의 흑역사가 된다고, 민국아.]

“응! 그럴게! 형아, 오늘부터 당장 공부 시작할까?”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민국아, 시차 적응해야 하니까 오늘은 씻고 푹 자자.”

“응! 형아, 근데 나 오늘 형아랑 같이 자는 거지?”

“당연하지.”

나는 내 방을 민국이에게 보여줬다.

민국이는 방 이곳저곳을 보더니 작은 간이침대를 쳐다봤다.

“형아, 여기서 나 자는 거야?”

“응. 왜? 너무 작아?”

“아니… 나, 형아랑 같이 잘래. 형아 꼭 안고.”

[민국이 녀석 잠버릇 고약한데….]

민국이는 어느새 내게 달려와서 매달렸다. 그러고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형아, 같이 자자. 침대 넓잖아.”

“알았어. 대신 잠버릇 고약하면 침대 따로 쓰는 거다.”

“응! 형아! 나 먼저 씻을게. 아, 그리고….”

민국이는 갑자기 캐리어를 열더니 엄마가 싸준 각종 반찬과 김을 꺼냈다.

“이거 엄마가 형 가져다주라고 했어. 김이랑 반찬이야.”

“알았어. 어서 씻고 나와.”

“응. 형아!”

민국이는 어느새 신이 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 * *

나는 주방에서 엄마가 보낸 반찬을 풀어봤다.

고추장부터 각종 밑반찬에 김까지. 정말 한가득 보냈다.

“성국, 이거 그거지?”

마크는 김을 보자 반색을 했다.

“마크, 김도 알아요?”

“당연하죠, 미미 씨. 이거 맥주랑 먹으면 맛있다고 성국이가 알려줬어요.”

리미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장님, 이걸 맥주랑 먹어서 맛있는 거 어찌 압니까?”

나는 태연하게 리미미를 쳐다봤다.

“리미미 씨, 어쩜 그렇게 마크랑 똑같은 질문을 하죠? 당연히 난 모르죠. 엄마, 아빠가 말해서 아는 거죠.”

“아하. 그럴 수 있군요.”

리미미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마크는 얼른 맥주를 꺼내서 리미미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도 깠다.

“성국, 동생 돌보고 회사 일까지 하려면 바쁘겠어.”

“내가 뭐 하는 게 있다고. 다 스케줄표대로 움직일 텐데.”

[이곳은 자유의 나라 미국이지만, 민국이게는 스파르타지!]

나는 씨익 웃었다.

“사장님, 가끔 보면 주도면밀하게 무서운 분 같습니다.”

“리미미 씨,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가족이라도요.”

나는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민국아, 기억해라. 내가 널 3살 때부터 밥벌이시킨 것을!]

* * *

시차에 아직 적응을 못 한 민국이가 침대에서 뒤척였다.

“형아, 나 잠이 안 와.”

“민국아, 어서 자. 형아는 일찍 자야 내일 회사 가서 일한다고.”

“형아. 그럼, 나 형아 꼭 껴안고 자도 돼. 아기 때처럼?”

[아기 때 기억이 난다고?]

나는 얼른 민국이를 바라봤다.

어느새 민국이를 내 허리를 꼭 안았다.

“이러니까 진짜 아기 때로 돌아간 것 같아, 형아.”

“민국아, 아기 때 기억이 나?”

[설마?]

“응! 형아가 나 아역 오디션 본다고 TV 보여주고 표정 연습시키고 그랬잖아. 막 나보고 방바닥에 굴러보라고도 하고….”

순간 나는 멈칫했다.

[이게 아이큐 160의 기억력인가? 이 녀석 도대체 어디까지 기억하는 거지?]

“민국아, 형아가 시킨 거 다 기억해?”

“응! 형아가 그때 그랬잖아. 세 살이면 밥벌이할 나이라고.”

“민국아, 형아가 언제 그랬어?”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하아. 그런가… 난 그렇게 기억하는데… 형아, 이제 졸리다. 형아, 잘자.”

어느새 민국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제 12살.

초등학교 5학년인 녀석이 세 살 적에 구른 것까지 기억하다니….

나는 잠시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슬그머니 민국이의 손을 잡아 뺐다.

그러자 민국이가 다시 내 배를 꼭 껴안았다.

“형아, 가지 마.”

“알았어. 형아, 여기 있어. 어서 자.”

“으으응….”

민국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멍하니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봤다.

내가 그동안 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생각에 동생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한 형과 오빠였을 터였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 집이 그나마 밥은 먹고 살 형편이 됐다.

나는 뒤척이는 민국이는 도닥였다.

“민국아, 앞으로도 형은 참 가혹한 형일 것이야. 형은 많은 거 안 바래. 네 밥벌이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해. 알았지?”

“으응….”

민국이는 잠결에 대답했다.

나는 얼른 민국이의 엄지손가락에 도장을 찍었다.

* * *

젊은 양 비서는 전태국의 방문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똑. 똑. 똑.

하지만 방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젊은 양 비서는 문에 대고 말을 했다.

“도련님, 저희 8시 반에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일어나셨어요? 도련님?”

인기척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젊은 양 비서는 다시 문에다 대고 말을 하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도련님, 들어갑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태국의 코 고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그리고 바닥에는 맥주 캔이 수없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젊은 양 비서는 얼른 전태국을 흔들었다.

“도련님, 지금 일어나셔야 회사에 안 늦으세요.”

“아이씨, 뭐야? 지금 몇 시야?”

“도련님, 8시가 넘었어요.”

“나 오늘 좀 늦게 간다고 해.”

“도련님, 여기는 삼전 그룹이 아니라 도련님이 인턴으로 일하셔야 하는 곳이에요. 늦으면 곤란하십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나 몰라. 나 더 잘 거니까, 이따 10시쯤 와서 깨워. 어서 나가!”

전태국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젊은 양 비서는 어쩔 수 없이 방문을 닫고 나왔다.

* * *

젊은 양 비서가 차에 시동을 걸면서 미안한 듯 말을 걸었다.

“성국아, 난 너희 데려다주고 다시 집으로 와야 할 것 같아. 도련님이 아무리 깨워도 못 일어나시네.”

[전태국이 그렇지 뭐. 기대도 안 했어, 양 비서.]

“괜찮아요, 형. ‘페이스 노트’가 작아도 엄연히 회사인데, 이러시면 회사 차원으로 대응하면 되죠, 뭐.”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성국아, 첫날인데 사정 좀 봐줘. 도련님이 회사 출근은 처음이잖아.”

“형, 저는 14살에 하버드를 다니면서 일을 하는데, 20살도 넘은 어른이 시간도 못 지키면 안 되죠.”

리미미가 차를 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싹수가 아주 병아리 저리 가게 샛노랗네.”

“미미 누나, 그런 말을 북한에서도 써요?”

민국이는 어느새 살갑게 리미미에게도 말을 걸었다.

“민국아, 난 너한테 영어 가르쳐줄 거지 북한말 가르쳐줄 거 아니야.”

“미미 누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참, 미미 누나. 오늘 옷 너무 잘 어울려요.”

민국이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무뚝뚝한 리미미도 어느새 민국이의 살인미소에 넘어가고 있었다.

[여자들이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겨우 저런 낮은 수에 넘어간다고!

그 순간, 리미미가 슬쩍 웃으며 민국이의 어깨를 도닥였다.

“민국아, 누나가 저녁에 북조선 말도 알려줄게.”

“진짜요? 나중에 저 가수 되면 북한 사람한테 진짜 북한말 배웠다고 자랑해도 되죠?”

“그럼.”

마크가 내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성국아, 너랑 민국이랑은 성격이 완전히 반대야.”

“얼굴도 반대야. 난 조각 미남. 저 녀석은 성격 미남이거든.”

“풉.”

마크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마크, 일이나 가자.”

“그래, 성국아. 난 네가 얼굴도 잘생겼는데, 왜 여자가 없을까 고민했거든. 그런데 지금 보니까 없을 만해.”

“뭐라고?”

“아, 아니야. 어서 회사 가자.”

[난 민국이랑 달라. 난 내 여자한테만 따뜻한 남자라고!]

* * *

전태국은 10시가 넘어서 겨우 회사에 도착했다.

부스스한 머리에 잠이 덜 깬 얼굴.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았지만, 어느 좌판에서 산 옷보다 못해 보였다.

전태국은 사무실 안을 휙 두르더니 젊은 양 비서를 찾았다.

“양 비서, 내 자리 어디야?”

“도련님이 원하는 자리에 책상 두고 일하시면 됩니다. 어디가 마음에 드세요?”

전태국은 이곳저곳을 보더니 리미미 옆을 가리켰다.

“난 저기.”

[예상에서 어쩜 한 치도 안 벗어나냐, 전태국.]

아무리 저번 생의 피가 섞인 동생이었지만, 정말 한심했다.

나는 얼른 전태국을 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저번 생의 아버지인 전재형 회장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싫은 사람일수록 앞에서 웃어라.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면.

“태국이 형, 첫 출근 축하해요.”

“어…. 그래, 성국아.”

“형, 그동안 ‘페이스 노트’에 대해서 연구 많이 하셨죠?”

“어… 당연하지.”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표정의 대답이었다.

“형, 그럼. 지금 당장 ‘페이스 노트’에 대해서 그동안 연구한 거 브리핑 좀 들어보죠.”

“지금?”

전태국은 당황했다.

“네, 형. 저희는 시간이 금인 사람들이에요. 늦게 출근하셨으니 늦은 만큼 저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셔야죠.”

나는 마크와 리미미를 불렀다.

“마크, 리미미 씨. 회의 준비 합시다. 첫 출근한 전태국 씨와 양철수 씨의 ‘페이스 노트’에 대한 브리핑 좀 들어보죠.”

내 말에 전태국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전태국, 다이아몬드 수저 물고 태어나서 삼전 그룹은 거저먹을 수 있지만, ‘페이스 노트’는 절대 안 돼.]

나는 빙긋 웃으며 팔짱을 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