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마크와 리미미는 편하게 소파에 앉았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파에 걸터앉았다.
전태국이 바쁘게 눈알을 굴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국이 형, 학교에서 발표하듯이 편하게 해보세요.”
“그, 그게….”
전태국이 태도로 봐서는 학교에서 발표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던 게 분명하다.
[첫날이니 혹 준비가 미흡하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봐주지….]
나는 차갑게 전태국을 쳐다봤다.
하지만 전태국은 어금니를 꽉 물더니 원망 어린 시선으로 젊은 양 비서를 흘깃 쳐다봤다.
보나 마나 화가 누구에게 미칠 게 뻔해 보였다.
“태국이 형, 첫날이라 준비가 안 된 거죠?”
“어… 맞아. 성국아.”
전태국은 얼른 대답을 했다.
처음의 거만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고, 내 말 한마디를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여겼다.
하지만 이건 조금 늦게 끊어지는 썩은 동아줄이다.
[양비서에게 해코지하지 못할 정도로 높이 올라갔을 때 떨어뜨려 주지.]
“태국이 형, 아직 회사 생활이 익숙지 않은 모양인데요. 그래도 아침 출근 시간이랑 퇴근 시간은 지켜주세요. 그리고 ‘페이스 노트’의 인턴이니 당연히 분석은 필요하시잖아요. 인턴 마지막 날, 전재형 회장님이랑 삼전 그룹분들도 오셔서 형이 한 달 동안 ‘페이스 노트’에서 일한 거 보시기로 했거든요. 그 준비 겸, 삼 일 후에 다시 프레젠테이션은 들을게요. 철수 형도 같이 준비해주세요.”
“응, 성국아.”
전태국은 그제야 겨우 숨을 내뱉더니 애써 미소를 지었다.
“다들 오늘 저녁에 뭐 해? 내가 오늘 아침에 늦은 것도 미안하고… 그런 의미에서 술 한잔 살게. 근사한 데서.”
“전 동생도 있고, 술은 마실 수 없는 나이라서요. 죄송해요.”
나는 먼저 선수를 쳤다.
“성국아, 너는 밥만 먹으면 되잖아.”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어려울 것 같아요.”
마크도 별로 흥미가 없는 투였다.
“태국, 근사한 데는 성국이랑도 많이 갔는데 우린 편한 데가 더 좋아. 성국이 동생도 있으니까 집에서 조촐하게 두 사람 환영회 겸 맥주나 마시자. 난 김에 맥주 마시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
“저두 찬성입니다!”
리미미도 격하게 반겼다.
“저… 여자분은 한국분 맞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입니다, 태국 씨. 저희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에서는 재벌이라는 개념은 인민의 적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리미미의 자기소개에 전태국은 예상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리미미, 역시 보통이 아니야.]
리미미의 저 말 한마디로 어떻게든 여자에게 껄떡거려 보려는 전태국을 완전 차단함과 동시에 여자라고 우습게 보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때, 내 ‘페이스 노트’의 알람이 떴다.
채드 천이었다.
- 성국, 오늘 시간 돼? 오후에 어떤 회사에서 투자 설명회 하는데, 벤처 하는 사람들 거의 모일 것 같아. 내가 친구들한테 네 이야기했더니 다들 데리고 오라고 난리야.
- 좋죠! 참석할게요.
나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 그럼, 이따 12시에 내가 데리러 갈게!
나는 채드 천의 댓글을 확인하다 문득 마크와 리미미를 쳐다봤다.
마크가 불길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미미 씨, 성국이가 또 무슨 일을 시킬 것 같은데요.”
“사장님,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세요. 그거 딱 사식 눈빛인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와, 저 미소는 더 무서운데. 성국?”
“마크, 리미미 씨. ‘페이스 노트’ 사용자들끼리 사용하는 메신저가 있으면 어떨까요?”
마크가 손으로 머리를 탁 쳤다.
“성국! 그거 만들라는 소리잖아!”
“사장님, 사식 좀 골고루 넣어주세요. 여기 비싸고 맛있는 집 많다고 들었습니다.”
리미미는 이미 포기한 듯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그럼, 전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나는 책상을 정리 중인 전태국과 젊은 양 비서를 흘깃 쳐다봤다.
“두 분은 회사 일 익히시고요. 삼 일 후 프레젠테이션 기대하겠습니다! 저녁에 뵐게요! 참, 양 비서님 집에 가는 길에 민국이 픽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이 아니라 그것도 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양 비서 센스는 여전하네!]
나는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 * *
채드 천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실리콘밸리 근처 호텔에서 열리는 만남의 자리였다.
캐주얼하게 소개하긴 했지만, 나름 규모들이 있는 회사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나는 괜히 후드티를 매만졌다.
“성국, 저번이랑 똑같네. 후드티만 입어도 잘생긴 거 말이야.”
“근데 여기는 무슨 자리에요?”
“어… 중국에서 누가 자기 사업 설명회를 연다는 거야. 우리야 여기서 간단히 요기도 하고, 중국에서는 요즘 어떤 사업을 하는지 구경도 할 겸해서 왔지. 그리고 이런 자리에 웬만하면 다들 모이니까 서로 얼굴 익혀두면 좋을 거야.”
채드 천은 강의할 때와는 달리 전혀 떨지도 않고,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리지도 않았다.
[중국에서 온 사업가가 누가 있지?]
나는 채드 천의 안내에 따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의 작은 강당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벤처 박람회와 포럼에서 이미 본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때, 누군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성국!”
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억양의 남자는 안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일론!”
나는 반갑게 일론과 인사를 나눴다.
“성국, ‘페이스 노트’는 봤어.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채드가 먼저 했더라고. 오늘 오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달려왔지.”
“저만 보러 오신 건 아니죠?”
일론은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점심 좀 때우려고. 요즘 테슬론때문에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저도 같이 때워요.”
이때만 해도 일론 머스트의 테슬론은 누구에게도 기대받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번 돈을 다 쏟아붓고 있어서 일론의 재정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일론과 채드 천은 망설임 없이 준비된 음식 코너로 가서 먹을 것을 가져왔다.
이때, 내 눈에 이 행사의 주최 회사가 눈에 들어왔다.
강당에 걸린 플래카드.
- 알리바바스 투자 설명회
[알리바바스! 역시!]
나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알리바바스의 창업자인 마운. 미국 이름 스티브 운을 찾았다.
삼전 그룹의 부회장 시절에 알리바바스의 마운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중국에서 영어 강사로 시작해서 중국 내 아마조네스와 같은 인터넷 상거래 업체 알리바바스로 중국 최고의 부자가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나는 얼른 마운을 찾았다.
작은 키에 독특한 페이스라 잊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마운은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성국, 어서 음식이나 먹고 우리끼리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
일론이 나를 잡았다.
“일론, 난 여기 투자에 관심이 생겨서요.”
“중국 업체에 투자하게?”
“그냥요. 저는 이따가 밥 먹을게요.”
나는 얼른 일론을 뿌리치고 마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반갑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나 이래 봬도 6개 국어 하는 남자야.]
“안녕하세요.”
“어? 중국 분이세요?”
마운이 특유의 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요. 한국 사람입니다. 중국어를 조금 배워서요.”
“조금이 아닌데요. 여기 와서 영어로 계속 말해서 힘들었는데, 중국어를 하니 편하네요.”
마운은 조금 긴장을 푼 채 편하게 이야기했다.
[역시 중국어를 계속 공부해두길 잘했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영어에 능통한 마운이지만, 타국에서 계속 영어로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표현의 한계도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마운, 알리바바스라는 회사에 대해서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미국의 아마조네스와 비슷한 회사에요. 인터넷 상거래 업체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중국은 대륙도 넓고 인구도 어마어마하잖아요. 중국에서 1위를 한다면 미국에서 1위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성공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인터넷 상거래 플랫폼이에요.”
마운의 말은 정확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피눈물을 흘렸다.
돈이 부족했다!
“참,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전성국이라고 합니다.”
“성국. 멋진 이름이네요. 나는 마운이에요. 마가 성이요. 미국 이름도 있어요. 스티브 운이라고요.”
“어떤 이름으로 불러드리길 원하세요?”
“당연히 마운이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잖아요.”
마운은 선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운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바로 흙수저 동질감!
[흠… 이게 먹힐 수 있을까….]
나는 이 동질감을 한번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운, 나는 ‘페이스 노트’라는 기업을 고등학교 동창인 마크와 창업했거든요.”
“사실은 나도 알아요. 성국 군이 들어오는데, 조금 놀랐어요.”
“저를 어떻게 아세요?”
“뉴욕에서 열린 새 시대를 여는 포럼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 봤어요.”
[나를 한 번 보면 잊기 힘들지.]
나는 어깨를 슬쩍 으쓱했다.
“그때, 보고 정말 젊은 친구들의 상상력에 감탄했거든요. 나야 기껏 있는 물건 인터넷에서 모아서 파는 건데, 이 친구들은 정말 아이디어를 파는구나. 그 생각을 했어요.”
“저희도 계속 발전 중이에요.”
“거기다 성국 군 외모 보고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요. 나는 키가 작아서 회사 면접에서도 수없이 떨어졌거든요. 아마 그 기억 때문에 누구도 떨어뜨릴 수 없는 사업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었는지도 몰라요.”
마운은 자신의 치부로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역시 사람들은 자국어로 말할 때 좀 더 솔직해졌다. 그리고 다른 투자자들은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나는 듣고 있었다.
“근데 성국 군은 내가 봐도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잘생겼잖아요. 세상 불공평한 거 맞죠?”
“세상 불공평하죠. 저도 사실은 굉장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거든요. 미국 유학도 후원으로 온 거예요.”
“진짜요?”
마운의 눈이 더 커졌다.
“네. 저희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아세요. 정말 아무것도 없이 만나셔서 두 분이 결혼하셔서 저를 낳으신 거라서 어릴 적에 단칸방에 저희 가족이 다 같이 살았어요.”
“와! 나도 그랬는데!”
[역시 흙수저끼리는 나라를 떠나서 통하는군!]
마운은 계속 말을 이었다.
“성국 군은 그럼 후원으로 유학 와서 이런 사업을 시작한 거군요?”
“네. 마운은 이 사업을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물론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어떻게 이 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누군가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마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운은 자신의 첫 직장인 기술대학 영어 강사 시절에 무역업을 하는 사람들을 가르쳤었다.
그때 영어 강사보다 무역이 돈을 더 잘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어 강사라고 해봤자 결혼해서 애까지 있는데, 먹고 살기가 정말 팍팍했거든요. 그래서 무역업에 뛰어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인터넷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이건 정말 신세계더라고요. 제가 인터넷을 중국 사람들에게 소개할 초기만 해도 다들 저보고 사기꾼이라고 했어요. 근데, 이제는 중국 사람들도 조금은 인터넷에 눈을 뜨고 있거든요.”
중국어로 말문이 트인 마운은 엄청난 수다쟁이였다.
마운은 자신이 알리바바스를 창업하게 되고, 초기 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한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는 다양한 나라로부터 다양한 투자를 받아서 사업을 더 키울 생각이라는 말까지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나는 마운의 말이 끝나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마치의 초원이 호랑이가 사슴이 지쳐 쓰러지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듯이.
말을 마친 마운은 시원한 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마운, 내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될까요?”
“뭐든지요.”
“제가 돈이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마운과 같은 처지에서 시작해서 사업을 일구는 입장으로서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거든요. 작지만 제 투자 받아주실 수 있겠어요?”
10년 후 알리바바스가 상장되면 3,000배 넘는 투자금을 회수하게 된다.
[마운, 우리 같은 흙수저 출신이잖아. 제발 내 흙수저 좀 알리바바스에 얹게 해줘!]